Conne Island의 저녁식사를 끝내고 친구는 자신의 집까지 나를 차로 태워주었다. 친구네 집은 라이프치히의 서쪽 동네 Lindenau에 있는데, 이곳도 굉장히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동네기 때문에 라이프치히에 갈 기회가 있다면 꼭 들러보길 권하고 싶다. 내가 라이프치히에 이사 오고 처음으로 살았던 집이 Lindenau 근방이었고 그 이후로도 그 동네에서 뻔질나게 놀았기 때문에 간만에 보는 풍경이었음에도 마치 늘 걸치고 있는 옷처럼 익숙하고 편안했다. 익숙한 길을 지나 익숙한 집에 도착한 우리는 아이스크림, 과자, 소주, 리큐어를 꺼내놓고 미처 끝내지 못한 수다를 열심히 떨었다.
왼쪽 사진의 프링글스 아저씨가 울상 짓고 있는 게 유달리 귀여웠다. 맵기는 그냥저냥. 저기 오레오 아이스크림 뒤에 쭈르륵 서 있는 술 세 병은 라이프치히에서만 제조되는 리큐어인데, 대황 맛, 밤 맛, 오이 맛 리큐어이다. 그게 무슨 맛이냐며 뜨악 싶겠지만, 엄청 맛있으니까 기회가 닿으면 마셔보길 바란다. 제조장의 이름은 Connewitzer Likörfabrik. 병당 15유로 정도 한다.
오른쪽 사진의 일품진로는 거의 3년 전에 내가 친구한테 생일선물로 준 것인데 아껴마시느라 아직도 절반 넘게 남아있었다! 별로 비싸지도 않으니 팍팍 마셔도 되는데 귀한 술이라며 아껴온 마음이 고마웠다. 간만에 마시는 일품진로의 맛은 깔끔하고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밤을 새워 놀고 싶었지만 그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근교 도시 Jena(예나)로 떠나야 했기에 적당히 갈무리하고 잠이 들었다
예나는 남자친구가 대학을 다닌 도시로, 대학이 도시 전체를 지탱하고 있을 정도로 작은 대학도시지만 고즈넉하고 유서 깊은 곳이다. 라이프치히에서도 기차로 한 시간 반 거리라 나도 예전에 몇 번 갔던 적이 있다. 정작 그때 남자친구와 나는 서로를 전혀 몰랐다. 대학을 비슷한 시기에 가까운 곳에서 다니다가 일을 시작하면서 함부르크에서 만난 것이 묘하고 귀중한 인연이다.
이번에 꽤나 갑작스럽게 라이프치히 행을 택한 것도 남자친구가 먼저 휴가를 내고 예나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겸사겸사 내 친구들도, 남자친구의 옛 친구들도 보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
예나도 라이프치히도 독일의 내륙 지방이라, 해양성 기후로 연중 비가 많이 내리고 극심한 기온차를 보이지 않는 함부르크와는 달리 겨울엔 굉장히 춥고 여름엔 뜨겁고 건조한 내륙성 기후를 띤다. 그간 촉촉하고 축축한 함부르크 기후에 적응이 되었는지 간만에 느껴보는 건조한 열기에 ‘맞다, 이런 느낌이었지’라는 생각이 들며 감회가 새로웠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샤워 후 머리카락도 더 빨리 마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날은 정말 햇빛도 위험수준으로 뜨거웠고 여독도 어느 정도 쌓여 햇빛 아래에서 돌아다니다가는 정말이지 쓰러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난 뒤 해가 가장 뜨거울 오후 세 시에서 여섯 시까지는 커튼을 모두 친 채 낮잠을 자고, 오후 일곱 시가 가까이 되어서야 남자친구의 동창들과 만나기로 한 맥주집으로 향했다.
남자친구는 독일에서 교육학 석사를 전공했다. 동창들도 당연히 교육학 쪽에 몸 담은 사람들이었기에 여러모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초등학교 과정이 끝날 때까지 점수라는 것을 매기지 않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였다. 남들의 점수와 비교하지 않고, 오직 어제보다 더 나은 스스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집중하게 한다는 것이다.
독일에 산 지 6년 째, 독일 공교육의 문제점과 한계점들이 점점 명확히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냥 이곳의 교육방식이 좋다고는 말을 못 하겠지만, 그래도 절대평가를 실시하는 것만큼은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지나친 경쟁구도로 몰아넣는 한국의 상대평가 시스템보다 바람직하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다 성적까지 매기지 않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독일에서도 아직 아주 극소수의 학교에서 실험적으로 행하고 있는 방식이라 아직 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저녁 내내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차를 타고 돌아갈 것이 걱정되어 밤 11시쯤 나만 먼저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는 남자친구와 친한 친구네 집이었는데, 그 친구는 전공생도 아니면서 수상할 정도로 일본어를 잘하는 빨간머리 독일남자로, 나도 이미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어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편의상 J군이라고 하겠다).
내가 도착했을 때 J군은 누군가와 일본어로 열띤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냐, 괜찮냐, 힘내라 같은 말들이 주로 들려오기에 통화가 끝나고 무슨 일이냐 물어보니, 이번에 여름방학을 맞아 1달 정도 여기 대학으로 단기 연수를 온 일본인 학생들이 미리 예약해둔 차편이 취소되는 예고도 없이 취소하는 바람에 오밤중에 오도가도 못하고 괴팅엔 역에서 밤을 새야 하는 지경에 처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역시 드높은 악명을 실망시키지 않는 독일 철도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 학생들이 처음 독일에 와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싶어 정말이지 유감스러웠다.
독일 사람들이 준법 정신이 철저하고 공공질서를 잘 지킨다는 말은 독일 내에서는 이미 옛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길에는 거진 2미터마다 쓰레기통이 설치되어 있음에도 사람들은 길바닥에다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리고, 유모차 바로 옆에서도 아랑곳 않고 담배를 피운다. 가장 최악의 장소는 온갖 사람들이 다 이용하는 대중교통으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앞좌석에 신발 신은 발을 올리고 헤드폰 없이 소리를 있는 대로 키운 동영상을 보고 목청 높여 영상통화를 한다. 음악을 시끄럽게 틀고 술을 마시는 것도 다반사요, 지하철이나 기차 내에서 담배를 피우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있다. 오죽하면 최근 함부르크 지하철 내 전광판에 "담배를 피우지 맙시다," "앞좌석에 발을 올리지 맙시다," "음악을 틀지 맙시다“ 같은, 유치원에서 졸업했어야 할 공공예절 수칙을 공익광고랍시고 틀어주고 있겠는가. 이렇듯 객차 내도 이미 심각한 수준이지만, 기차역들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온갖 이상한 사람들이란 사람들은 다 끌어모으는 자석 같은 곳으로, 폭력과 무질서와 더러움이 난무한다. 나 역시 그냥 갈 길 가고 있는데 걸리적거린다면서 앞에 있던 사람한테 발로 걷어차인 적, 그냥 출근 전에 빵집 가판대를 쳐다보고 있었을 뿐인데 지나가는 남자한테 아무 말도 이유도 없이 머리를 얻어맞은 적, 자판기 옆에 흥건하게 고인 핏자국(아직 붉고 신선했다. 십분만 더 일찍 그 자리에 있었어도 무슨 난동을 목격했을지 모른다)을 목격한 점, 어떤 여자가 칼로 자해를 하고는 팔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채로 태연하게 버스에 올라타는 걸 본 적이 있다. 시간 엄수 같은 것도 대체 뭐가 기준인 지 모르겠는 것이, 병원이나 관공서에 예약을 하고 가도 한두 시간씩 기다리는 것은 예사요, 기차는 제시간에 오면 그게 박수를 칠 일이고, 두 시간 씩 늦거나 아예 결편되어 버리는 일도 흔하다. 이렇게 독일 내의 현실과 독일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그 차이가 극심한데,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에 전반적으로 로망과 환상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이 강박적으로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본인들의 나라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왔다가 자신들의 잘못도 아닌 일 때문에 더럽고 위험한 곳에서 밤을 새야하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감히 상상만 해볼 뿐이다.
그 학생들에게는 기나긴 밤이 되었겠지만, 피곤했던 나는 금방 곯아떨어졌고 아침은 빠르게 밝아왔다. 나는 8시 무렵 다시 라이프치히로 이동했다.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차를 타기 전에 한 시간 정도 만나기로 한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지만, 할머니가 독일인이셔서 독일 여권을 받아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그래도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어학원을 다닐 때 나와 같은 기숙사에 살게 되면서 친해졌다. 같이 산 시간은 몇 달 되지 않고,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지만, 카페, 문학, 여행, 예술 등에 관심이 많은 것이 비슷해서 아직까지 좋은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이 친구가 최근 유튜브에 브이로그도 업로드하고 있는데, 영상이 꽤 감각적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씩 봐주시길… (링크: https://youtube.com/@daonnan)
내가 커피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까 이런 사진에는 소품이 있어야 기깔나게 나온다며 책 한 권을 스윽 꺼내 내밀던 친구. 그에 질세랴 나도 내 오닉스 포크5를 스윽 꺼내어 배치했다. 이렇게 사진과 소품과 커피와 분위기에 있는 여자 둘이 모여 위의 사진이 탄생했다. 어째 좀 기깔나게 찍혔습니까.
길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 아쉬웠지만 자리를 파하고 일어서 이동하는데, 시내 중심의 한 건물벽에 쓰인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사실 6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미 눈에 익었던 문구였다. 하지만 익숙한 벽화가 이번에는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Real Life
…eine Anleitung
Du sollst / nicht:
1. deinen Pass verbrennen
2. Geographie vernichten
3. Staatenlosigkeit annehmen
4. Staatsbürgerschaft ablehnen
5. Ländergrenzen sprengen
6. Nationen abschaffen
7. Kontinente ignorieren
8. Städte auflösen
9. Republiken aufgeben
10. dich separieren!
진짜 삶
…지침서
이렇게 하면 됩니다 / 안됩니다
1. 스스로의 여권을 태우는 것
2. 지리학을 폐기하는 것
3. 무국적을 받아들이는 것
4. 국적을 거부하는 것
5. 국경을 폭파하는 것
6. 국가를 없애는 것
7. 여러 대륙을 무시하는 것
8. 도시를 없애는 것
9. 공화국을 포기하는 것
10. 가족 및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
현재 유럽의 정세는 내가 이 글을 처음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혼란스럽다. 가자 지구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독일은 이 모든 정치에 깊게 연관되어 덩달아 서민들의 생활도 불안해지고 있다. 불특정다수, 소프트타겟을 대상으로 한 범죄와 폭력사건도 빈번해지고 있으며 난민 정책에 회의를 가지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인생이 언제 쉬운 때가 있었겠느냐만은, 세상이 언제는 평화로웠겠느냐만은, 이렇듯 국경이 폭파되고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대거로 양산되는 상황이 예전에는 그저 무심히 보고 지나쳤던 글에 눈길이 가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라이프치히 방문은 끝이 났다. 거기서 보낸 절대적인 시간은 짧았지만, 짧게 느껴지지 않는 만남들이었다. 조만간 또 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