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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Sep 10. 2024

집밥에 대한 달콤한 생각들

먹는다는 행위에는 인간의 모든 감정이 얽혀있는 것 같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어 음식을 먹기도 하지만,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먹기도 한다. 먹음으로써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경멸하고 혐오하고 수치스러워하기도 한다.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더 잘 굶기 위해 돈을 쓰기도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식욕이 왕성하고 먹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랬기에 먹는다는 행위에는 언제나 죄책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스트레스성 폭식증이 있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자취를 하면서 건강한 식사를 하지 못해 살이 쪘다. 언제나 기복이 심하고 편안하지 못했던 내 식생활은 지난한 시간을 거쳐 마침내 최근 일 년여 간 많이 안정되었다.


식생활이 안정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뭐니뭐니해도 “제대로 된 집밥을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대학 기숙사에서 살던 시절과 함부르크에 오고 나서 첫 일 년간 자취를 하던 시절 때는 외식비를 아끼기 위해 직접 요리를 해먹곤 했지만 최대한 빠르고 저렴하게 먹기 위한 요리들이 대부분이었다. 원팬 파스타가 거의 주식이었다고나 할까. 다양한 음식을 여럿 준비해서 예쁘게 차려놓고 먹기에는 시간도 여력도 넓은 식탁도 없었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역치도 낮아서 뭘 먹어도 그냥저냥 맛있었고, 몇 달 간 김치나 쌀밥을 먹지 못해도 신경쓰지 않았다. 따뜻하고 간이 된 음식이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그랬던 나의 “집밥”이,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크게 바뀌었다. 남자친구는 단어만 들어도 빈약해보이는 “자취생 밥상”과 “유학생 밥상”의 편견을 깨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날 당시 나와 마찬가지로 독일생활 5년차였던 남자친구는 이미 넓따란 부엌에 각종 조리도구와 식자재를 갖춰두고 주변 친구들이 “M군의 레스토랑”이라고 농담삼아 부를 정도로 본격적인 요리를 해서 친구들과 스스로에게 대접하는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의 첫 데이트 때도 남자친구는 나를 위해 멋진 저녁을 요리해주었다. 그때 어려운 중화요리를 계량까지 지켜가며 정석적으로 해내는 남자친구를 보면서 '이 남자, 귀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만리타향에서 혼자 자취를 하면서도 스스로의 생활을 내팽개치지 않고 성심성의껏 돌봐온 거니까. 이후 결혼을 약속하고 함께 살기 시작하며 나 역시 요리에 이전보다 더욱 성의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행복한 집밥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독일에 사는 한국인 여자와 일본인 남자, 이 특이한 조합에서 그 다채로움이 가장 빛을 발할 때는 뭐니뭐니해도 같이 무언가를 먹을 때다. 나는 처음으로 같이 쌀밥을 먹을 때 남자친구가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는 걸 보고 일본인스럽다고 생각했다. 남자친구는 내가 국을 먹을 때 숟가락을 찾고, 수저를 세로로 놓을 때 한국인스럽다고 생각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쌓여 어느새 내가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고, 남자친구가 찌개를 숟가락으로 떠먹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물이 들었다며 웃는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식사 예절 교육이 아이에게 조금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고 농담을 하는 것도 덤이다.


아래는 우리가 함께 나눈 행복한 집밥 요리의 기억들이다(글에 올리려고 사진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남자친구가 옆에 와서 “와 맛있겠다~ 여기 어디 레스토랑이야? 어디야? 가고 싶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루 종일 고생스럽게 일하고 진이 다 빠져 집에 돌아왔을 때 먹는 따뜻한 한 끼는, '이걸 위해 내가 오늘 하루도 열심히 돈을 벌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만큼 보람차다. 그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주앉아 먹을 수 있다면 정말 더할나위 없다. 그렇게 함께 드는 식사는 신성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유대와 보람의 시간이다. 이제 더는 그곳에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끼어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마르지 못한 여자지만, 마음의 허기가 잘 관리되는 한 육체적 허기가 통제를 잃고 날뛰는 일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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