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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Sep 24. 2024

굿바이 섬머

엽편소설, 그리고 인사


"섬머는 영미권에서 여자이름이라지."

"독일어로는 남성명사야."

그렇게 말하며 섬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접힌 눈 옆으로 옅게 주름이 잡혔다. 바라보는 내 마 음 한 구석에 작은 파도가 쳤다.


올 여름에는 바다를 한 번도 보러가지 못했다. 일, 일 , 일, 일만이 몰아치는 나날이었다. 밤늦게까지 폭풍처럼 몰아치던 일이 끝나고 나면 옷도 머리카락도 땀에 젖어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세탁기 속에서 데굴데굴 구르다 물에 푹 젖은 채로 바깥으로 끄집어내진 세탁물이 된 기분이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땀내처럼 들러붙은 피로에 제대로 얼룩이 지워지지도 못한 후줄근한 티셔츠 같은 기분이 이어졌다. 하지만 섬머를 볼 때만큼은 마치 상쾌한 바닷바람을 맡은 듯이 마음 속 응어리가 조금은 풀어지곤 했다.


섬머와는 코인 세탁소에서 만났다.


간만에 일이 없는 저녁이었으니 아직 해가 떠 있을 때 세탁을 마쳐두고 싶었건만, 낮의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밀린 청소와 설거지와 장보기를 마치고 나니 숨돌릴 틈도 없이 저녁 어스름이 지고 있었다.

더이상 미뤘다간 당장 내일 입을 옷이 없을 지경이 었기에 한가득 쌓인 옷들을 부랴부랴 가방에 쑤셔넣고 코인 세탁소로 향했다. 사람이 많으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 세탁소 안은 한가했고 세탁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들을 바라보며 일을 두 개나 하는데도 세탁기 있는 집에서조차 살지 못하는 스스로의 상황을 조소했다.


그때였다.

커다란 한숨 같은 소리가 나더니 세탁소 안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세탁기들도 모두 꺼졌다. 꾸르륵, 하는 물소리가 멈추고 주변은 순식간에 어둠과 정적에 휩싸였다. 유리문과 창문 너머로 빨간색과 오렌지 색 불빛이 반짝이는 바깥의 어둠이 흘러들어왔다.


"정전...?"

아무래도 이 세탁소 내부나 건물만 정전인 것 같은데, 일단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출구의 유리 문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정전 때문에 꺼진 것인지 자동문이 열리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데 뒤에서 저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탁소 안에 다른 손님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얼핏 수수한 얼굴이 말갛고 섬세했다. 남자는 잠깐 실례합니다, 라고 말하더니

나와 자동문 사이로 들어와 섰다. 남자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발돋움을 해서 문 위에서 무언가를 찾더니 센서 옆 구석에서 작은 빨간색 버튼을 찾아내 눌렀다. 그리고 유리문 틈 사이로 손을 넣어 옆으로 밀자 닫혀있던 문이 평범한 미닫이 문처럼 스르르 열렸다. 바깥의 후덥지근한 밤공기와 소음이 얼굴 가득 느껴졌다.

"열렸어요."

그것이 나와 섬머의 첫만남이었다


섬머를 만난 후에도 내 생활에 큰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나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었으며, 눈뜨고 있는 시간 동안에는 줄곧 일을 했다. 돈을 버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집안일을 했다. 혼자 살아도 빨래며 장보기며 청소며 요리며 할일은 쉬지 않고 생겼다.

혼자 살지만 그렇다고 완전하게 혼자 사는 것도 아니었기에 옆방에 사는 남자가 물건을 집어던지고 난동을 부리는 소리가 얇은 벽 너머로 들려올 때는 불안감에 몸을 떠는 것도 예전과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의 밤늦은 퇴근길에 마중을 나오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때때로. 때때로보다는 조금 더 자주. 어쩌면 이틀에 한 번씩. 정확하게 카운트하지 않은 밤들 사이로 섬머는 나를 기다렸다. 일터에서 데굴데굴 구르다 땀에 흠뻑 젖어 나온 나에게 오늘도 수고했어, 라고

말하며 캔맥주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힘이 다 빠져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걷는 내 옆에서 함께 천천히 걸었다. 때로는 나와 함께 벤치나 공터에 주저앉았다. 날벌레가 달라붙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의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짜릿하게 목구멍을 쏘는 맥주의 탄산.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오렌지, 망고, 바닐라 아이스크림.


여름의 맛이 났다.


어느 무더웠던 날, 손님들이 평소보다 늦게까지 남아있는 바람에 퇴근 후 막차를 놓치고 말았다. 어차피 지하철 역에서 기다려도 한 시간, 걸어가도 한 시간이라는 생각에 나와 섬머는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걷고 있는데, 하루종일 대지를 무겁게 짓누르던 열기가 한결 가벼워지더니 지금까지 쌓인 압력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호쾌한 빗줄기였다. 계속 가야하나 기다려야 하며 망설이며 잠시 나무 밑에 서 있는데 섬머가 자신의 가방에서 지퍼백 봉투를 꺼냈다. 우리는 거기에 지갑과 핸드폰 등 젖어서는 안되는 물건을 넣고 다시 빗속으로 나섰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우리는 옷을 입고 수영을 한 사람들처럼 흠뻑 젖었다. 머리카락 속까지, 속옷까지 모두 젖었지만 조금도 춥지 않았다. 미지근한 물이 얼굴을 타고 줄기차게 흘러내렸다. 입속으로 흘러들어간 빗물에선 비리고도 투명한 맛이 났다. 뜨거운 습기에 잠긴 밤거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자욱한 물안개에서는 흙냄새가 물씬 풍겼다. 우리는 밤의 끝을, 비의 끝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처럼 걸었다.


여름의 냄새가 났다.


집에 도착한 나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두툼한 수건을 두 장 꺼내 한 장으로는 머리를 말리며 다른 한 장은 아직도 현관에 서 있는 섬머에게 건넸다. 씻고 가, 라고 권했지만 섬머는 너 피곤할텐데 자는 데 방해 돼, 라고 말하고는 웃으며 돌아갔다. 그가 맞은 빗물의 양만큼 젖은 수건을 남겨두고. 내 방 안에서 나는 이불을 몸에 말고 누워 어느새 희부옇게 밝아오기 시작한 새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바탕 비와 열기를 쏟아내고난 하늘은 어딘지 개운하고 상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고 나는 여름 내내 힘들게 일한 값을 받았다. 몇 배는 더 두둑해진 월급 봉투 덕분에 이전에 모아놓은 돈과 합쳐서 드디어 이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 들어간 집에는 세탁기도 있고, 옆방에서 물건을 부수며 난동을 피우는 사람도 없었다. 밤에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이제는 낮에 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고, 이제는 조금 쉬고 싶기도 했다.


바다에도 다녀왔다. 어느새 짧아진 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가슴 가득 짭짤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불어오는 바람이 어느새 차가워서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섬머는 옆에 없었다. 섬머와 함께 가면 좋겠다고 말하던 여름의 바다. 여름은 어느새 끝나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가을에 나무들은 분주히 잎사귀의 색을 바꾸고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꺼내고 있었다. 어느새 끝나버린 여름처럼 섬머도 어느 순간 내 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아니면 떠나온 것은 내 쪽인지도 몰랐다. 어쩐지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섬머는 여름의 물안개, 열에 들뜬 환상 같은 사람이었다. 여름이 끝났으니 섬머도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어쩐지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


서늘한 바닷바람을 실컷 들이마시고 나서 숙소로 돌아와 전골을 끓여먹었다. 1인분의 전골이 보글보글 끓고, 나는 바닷물처럼 짭짤한 국물이 깊숙이 스며든 야채를 꺼내 한 입 베어물었다. 뜨거움이 딱딱하게 굳은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굳어있던 얼굴이 풀리며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창문 밖 검은 밤하늘은 깨질 듯 차갑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보낸 여름밤은 내려다본 적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낯설고 새로운 향이 났다.


굿바이 섬머, 나는 되뇌었다. 굿바이 섬머.





간만에 픽션을 한 편 써보았다. 픽션이라지만 나의 논픽션과 다른 이들의 논픽션이 80% 정도 섞여있는 장르불명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이야기. 그렇다면 장르는 에세이를 표방하고 있는 본 브런치북에 올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시작은 그저, 굿바이 섬머, 라는 문장의 형태가 좋다는 말에서 시작했다. 그 짧은 다섯 글자에서 풍기는 감상을 붙잡아보고 싶었다. 뜨거우면서도 청량한 감상을.


이제 이곳은 완연한 가을이다. 길고 힘든 여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대로 모두 좋았다. 당신의 여름도 그러했길.





이 글을 끝으로 본 브런치북, “세상에 새로운 글은 필요 없을지라도”를 잠시 쉬고자 합니다. 새로운 브런치북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해요. 한 분이라도 기다려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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