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청 아래에서
단풍이 또 다른 계절을 불러 세웠다 .
남한산성의 단풍은 이미 절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무마다 노랗고 붉음이 겹겹이 물들어, 마치 세월의 빛깔을 한꺼번에 쏟아낸 듯했다. 발끝에 부서지는 낙엽 소리, 차가운 바람 사이로 섞여드는 흙 냄새가 내 마음을 천천히 적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들어 풍경을 담았지만,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그 모든 빛을 눈으로만 새겼다.
스크린보다 눈으로 본 풍경은 더 오래 남는다. 그날의 햇살, 하늘의 농담, 공기 속의 냄새까지.
길을 따라 걷다 문득 눈길이 머문 곳은 인화관(人和館)이었다. 사람이 화합하는 집, 조화로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란 따뜻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다. 잠시 들른 인화관 앞에서 늦가을 햇살이 유난히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단청이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초록의 숨결 위로 붉은 기둥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마치 세월이 빚은 기도의 형상 같았다.
붓끝 하나하나에 깃든 장인의 숨결이 느껴졌고, 물감 한 방울마다 오래된 시간의 온기가 배어 있었다.
단청은 그저 색이 아니었다.그 안에는 사람들의 염원과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그 아래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햇살이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며 내 어깨 위에 머물렀고, 바람은 단청의 무늬를 따라 조용히 흘러갔다.
그 순간, 마음 한켠에서 무언가 잔잔히 일렁였다.
오랜 세월을 품은 색의 울림이 나의 하루에도 번져오는 듯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마음이 단풍잎처럼 조용히 흩날리며 한 줄의 시가 되어 흘러나왔다. 바람은 우리의 침묵을 대신해 단청의 무늬를 흔들었고, 햇살은 그 시 위에 따스한 여운을 더했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계절을 노래하고 있었다.
단청 아래에서
초록의 숨결 위로
붉은 기둥이 하늘을 떠받친다.
붓끝 하나에
천 년의 숨결이 고이고,
물감 한 방울마다
기도처럼 번진다.
바람은 단청의 무늬를 따라 흐르고,
햇살은 기둥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누군가의 손끝이 남긴
시간의 문양 속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선다
남한산성의 가을은 그런 멈춤을 가르쳐주었다. 산길의 고요함과 단풍의 화려함이 공존하는 그곳에서, ‘시간의 무늬’를 본 듯했다. 단청의 색처럼 세월도 사람의 손끝을 거치며 깊어진다. 누군가의 삶도, 나의 하루도 그리 칠해져가는 것이겠지.
가끔은 계절이 말을 건다.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보라”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는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내 삶의 단청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