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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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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5일, 진해, 윤정민 

 

  J 베이커리 테라스. 담백한 치즈 베이글에 카푸치노 향을 홀로 즐기고 있으니 어김없이 반가운 친구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주일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살짝 툭 쳤다. 

  “친구! 오랜만에 왔네.” 

  “잘 지냈냐?” 

  “나야 단체 주문 시즌 아니면 똑같지 뭐. 진 형이 그러던데, 실종 사건은 종결된 것 같다고 하더라. 존 김 공조수사도 흐지부지된 것 같다고 그러고. 실종자 공개 전단은 배포했다던데. 봤냐?” 

  “그래?” 

  “진 형이 어떻게든 해 보려 했는데, 능력 밖이라 포기했데.” 주일은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크게 켜며 말했다. “형이 너하고 담에 진솔하게 한잔 하고 싶데. 미안하다고. 아버님한테도 그렇고.” 

  나는 그와 다시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태우와 내 아버지에게 사무친 원한이 있는 사람이니 애초부터 그런 감정으로 수사 방향도 잡았을 것이다. 

  주일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찝찝하지?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것들을 전부 헤집어 놓고선 그냥 미안하다니....” 

  “그래. 딱 그 심정이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참아라. 참아.” 

  주일은 진 형사 동생의 죽음에 태우가 엮여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에게 얘기하면 모든 상황이 진 형사 귀에 다시 들어가게 될 공산이 컸다. 친구지만 모른 척해야 했다. 

  “근데 진 형이 이해 안 가는 게 한 가지 남아 있다고 하데.” 

  “뭐?” 

  “아식스 운동화 건인데. 사이즈가 250인가 어린이용 신발 한 짝이 자기한테 배달되어서 너한테 물어보니 모른다고 했다던데.... 자기가 조사를 해 보니 네가 일산에서 엄마 교통사고 때 신었던 신발과 동일한 브랜드란 걸 알아냈다네. 형이 또 너에 대해 이상한 말을 시작해서 네가 모른다고 한 건 그때 기억이 없어서 그럴 수 있다고 내가 일단 말은 했어. 그 운동화를 보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나. 네가 분실했던 275 사이즈 운동화랑 브랜드, 색깔도 똑같아서.... 뭐 짐작 가는 거 없냐?” 

  짜증이 났다. 진 형사와 주일은 수사내용도 공유하는 사이인가. 내겐 비밀로 하라고 잔뜩 겁을 주더니만 둘은 정보를 공유하고 그 이야기가 내게 흘러들어 오도록 하고 있지 않은가. 교활한 인간이었다. 

  “나도 그 신발이 왜 진 형사에게 배달됐는지 몰라. 일산 사고 때 내 신발하고 같은 종류라고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고.” 

  사고 당시 나를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그 운동화를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무슨 의도로 그 옛날의 어린아이 신발을 이제야 진 형사에게 보낸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알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진 형이 자기한테 신발 보낸 사람은 아무래도 널 잘 아는 주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 

  “왜?” 

  “그렇지 않고서야, 오래전 사고 난 아이의 운동화 한 짝과 똑같은 종류의 신발을 경찰에게 무슨 메시지라도 보내는 것처럼 택배로 보내는 짓 따위 할 수 있겠나. 그러더라고. 한마디로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그런 사람일 거로 생각하던데. 사건을 게임처럼 즐기는 사이코패스라는 얘기지.” 

  “그래....” 

  “그래서 자기는 그런 엄청난 놈을 이길 엄두가 안 난데.” 

  일산에서 사고를 당한 날부터 장복산 사건이 있기까지 아버지와 시간을 함께 달려온 사람은 태우 부자와 레인보우 원장 둘 뿐이었다. 태우 부자가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고 치면, 원장 행세를 하며 살아온 제이가 보란 듯 내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 틀림없었다. 장복산에서 분실한 나머지 운동화 한 짝도 그가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진 형사에게 그런 짓을 했을까.... 갑자기 주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아프지? 다 지나간 일이니 신경 쓰지 말자. 진 형도 이제 손뗐고, 서울 전담반도 전부 철수했데. 네가 장복산에서 봤던 여자 얼굴도 기억 못 하는데 목격자라기도 애매하고. 운동화는 그만 잊어버려라. 괜히 마음만 싱숭생숭하다.” 

  제이는 어떻게 내 운동화를 손에 넣었을까. CCTV 녹화 장면에는 트럭에서 내린 여자가 신발을 둔 후, 트럭이 지나가자 뒤따르던 여자가 그 신발을 다시 가져간다. 그럼 내 신발을 가져갔던 두 번째 여자가 제이라는 말이고, 신발을 집 앞에 두고 갔던 첫 번째 여자가 내가 산에서 만났던 여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정민아, 내가 예전부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뭔데?” 

  “너 자폐를 앓았다고 했잖아. 좀 우스운 질문 같지만 어떤 기분이냐? 극복하는 것도 힘들다고 그러던데.” 

  “내가 사고만 안 났어도 뭐라도 얘기해 줄 수 있을 텐데.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 근데 자폐는 왜 궁금한데?” 

  “내가 얼마 전에 초등학교로 빵 배달을 하러 갔거든.” 

  “배달도 직접 가냐?” 

  “바쁠 때는 나 혼자 갈 때도 있어. 선생님들하고 인사도 하고 아이들 얼굴도 익히고 뭐 바람도 쐬고 여러모로 좋아서.” 

  “그래....” 

  “아무튼 빵을 들고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어떤 아이 하나가 복도 벽에 등을 붙이고 손을 싹싹 빌면서 잘못 했어요라고 말하고 있더라고. 똑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리는 게 진짜 무슨 고장 나서 버린 로봇 같더라. 그냥 벌 받고 있나 보다 생각하고 지나치려는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아무도 없는 계단 중간에서 혼자 그러고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처량한 거야. 그래서 지나가는 다른 아이한테 물어봤지. 그랬더니 그 애가 뭐라는지 아냐?” 

  짐작이 갔지만 고개를 저었다. 

  “쟤. 바보예요. 그러는 거야. 내가 바보? 그랬더니. 자폐아라서 그래요, 그러더라고. 가게로 돌아오는데, 우리 어린 시절에도 저런 아이들이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는 거야. 지금 보면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거든. 문득 네가 떠오르더라고. 어떻게 그런 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말투가 조금 이상한 것 말고는 네가 그 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거든.”

  “나는 초등학교에 다녀보지 않아서 어떤지 모르겠다. 태우도 정규 교육을 한 번도 안 받아 봤거든. 아버지가 지도했던 존 김의 딸 제시도 그렇고.... 질문 하나 할까? 자폐아가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면 자신도 그걸 알고 있을 것 같아, 모를 것 같아?” 

  “왠지 모를 것 같은데.” 

  “대부분의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놀리고 괴롭히는 걸 거야. 초등학교를 넘어가는 그런 나이에는 자폐에서 완치된 아이가 드물어서 표현을 못하니 자폐아의 마음이 어떤지 알기가 힘들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분명한 건 애완동물도 자기를 존중해 주는 주인과 학대하는 주인을 구분한다는 거야. 놀리고 괴롭히면 그 기억은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되겠지. 마음을 닫아버린 아이가 나중에 자폐증에서 벗어나건 벗어나지 않건 그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게 될 가능성이 커. 나중에 큰 사건을 일으킬 수도 있는 거야. 되돌리기엔 너무도 큰 사건들 말이야. 압력밥솥도 터지지 않으려면 김을 빼줘야 하잖아? 용량이 크건 작건 간에 계속 압력만 높이면 터지게 되어있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폭발해 버린다고. 언제냐의 문제일 뿐이지.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만 내면은 보통 사람과 비슷해. 의사소통 안 된다고 무시하지 말고, 그때그때 울분을 삭여 줄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그렇군.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얼마나 울분이 쌓여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긴 하더라. 친구들도 놀리고 괴롭히고 선생님들도 신경 쓰는 게 한계가 있을 테니. 뭐랄까. 남의 일 같지 않게 계속 그 아이 얼굴이 생각나데. 그런 아이들은 정민이 아버님 같은 분들이 교육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반 학교에선 무리가 아닐까....” 

  “그래. 장애의 경계선에 있는 아이들은 일반 아이들과 어울리고 놀면 오히려 좋은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을 텐데, 네 말처럼 경계선에서 많이 벗어난 아이들은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할 것 같아. 함께 섞어 놓는다고 될 일이 아니지. 부작용만 심해질 거야.”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 딱 너도 아버지처럼 전문가 같은데. 이참에 너도 진로를 그쪽으로 바꿔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왠지 어울릴 것 같은데.” 

  주일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뚜렷하게 뭘 하고 싶다는 생각도 가져 본 적 없지만, 아버지와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어쩌면 이 길이 내 길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1층에서 사장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주일은 내게 장난치듯 거수경례를 하며 총총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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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6일, 진해, 최유진 

 

  ‘100% 일치’라는 것은 레인보우 원장과 제이가, 존 김이 추적하던 악마와 제이가 동일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켄 사장의 표현대로라면 이제부터 제이는 죽을 날만 기다려야 될 것이다.  

  대로변에 위치한 대단지 고층 아파트의 끝자락을 돌자 뒷산 귀퉁이에 나지막한 동산 하나가 보였다. 봉긋하게 솟은 큰 왕릉 같기도 하고 언덕 같기도 했는데 그곳에 특이한 외관의 소고기 집이 하나 있었다. 켄 사장이 알려줬던 곳이었다. 가게 앞으로 넓게 펼쳐진 주차장 바닥에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이중 주차 구획선이 그어져 있었고 건물 지붕의 재질과 전체 형상, 주변의 조경들 모두 일본에서 오래 생활한 내게 익숙한 것들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큰 홀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고, 히사이시 조의 잔잔한 피아노 음악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운트 앞에서 빨간 뿔테 안경을 쓴 40대 초반의 여자가 빤히 흘겨보는 게 느껴졌지만, 약속한 손님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묵례하자 그녀는 말도 없이 휙 돌더니 알아서 따라오라는 듯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런 여자가 매니저로 있으면 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영업이 제대로 될 리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뒤를 따라 주방 옆으로 연결된 복도를 걸어갔다. 천장부터 창과 바닥까지 전면이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둥근 튜브같이 생긴 복도였다. 튜브 속은 환했고, 바닥의 연못을 가로질러 미로처럼 길게 뻗어 있었다. 특이하게 고기 냄새가 아니라, 레몬 향이 풍겼다. 마치 숲속의 비밀 공간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튜브 끝 좌측 방 앞에서 빨간 안경 여자가 멈춰 섰다. 방문의 눈높이쯤, 사무실이라는 작은 명패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사무실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뒤돌아 작은 유리문을 밀고 바깥으로 나갔다. 나도 그녀를 뒤따라 돌다리를 밟고 연못을 건넜다. 조금 더 걸어가자 잘 정돈된 소나무 숲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풀 사이사이에 둥글고 작은 파이프 같은 것들이 땅에 박혀 있었다. 땅속 지하 생물들이 그 파이프를 물고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저 나무를 보세요!” 그녀는 팬터마임 하듯이 몸을 움직였다. 마치 시력검사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위치에 똑바로 서서 지시했던 나무를 두 눈 부릅뜨고 쳐다봤다. 그러자 오른발 옆으로 다섯 걸음 정도 되는 곳의 바닥이 거짓말처럼 천천히 갈라졌다. 세상에! 내가 디딘 바닥은 지하 세계의 선루프였다. 열려라 참깨 같은 일이었다. 소꿉장난도 아니고 다 큰 성인들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뭘까. 입구를 내려다보니 덜컥 겁이나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 

  “저기....” 

  “네!” 

  “제가 굳이 밑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조용한 식당에서 얘기해도 될 것 같은데요.” 

  빨간 안경은 고장 난 로봇처럼 어색하게 말했다. “초대받은 손님은 안으로 모셔야 합니다.” 

  “뭐라고요?” 

  “내려가시죠.” 

  어이없게도 너무 단호했다. 때 쓰는 초등학생을 나무라는 선생님 같았다. 스무 계단 정도를 내려가니 높은 천고의 수중 터널 같은 느낌의 길이 나왔다. 두 사람은 넉넉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너비였고 벽면은 베이지색 목재로 둘려 있어 폐쇄적인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 같진 않았다. 10미터쯤 더 들어갔을까, 통로가 세 갈래로 갈라졌고 그녀는 중앙으로 곧바로 걸어갔다. 조금 더 들어가자 자동 유리문이 나왔고 나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지시하는 곳에 서서 시력검사를 했다. 문이 열렸다. 어딘가에서 내 얼굴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기계는 일치라고 기계음을 반복했을 것만 같았다. 자동문 내부도 온통 베이지색 나무의 밝은 느낌이었고 인테리어라고는 벽면에 달린 큰 모니터와 그 주변을 둘러싼 긴 테이블과 의자, 마주 놓인 3인용 소파 2개로 단출했다. 60대 초반 정도에 하얀 구레나룻 턱수염을 기른 백발의 남자가 조용히 다가왔다. 빨간 안경은 밖으로 나갔다. 175센티 정도의 키에, 보라색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상아색 로퍼를 신고 있었다. 얼핏 보면 연구실에서 실험에 몰두하는 박사 같은 느낌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성직자나 구도자 같은 분위기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이 멋쟁이 할아버지는 햇살 좋은 날, 이 지하 구석에서 도대체 무슨 연구를 하는 걸까. 묘한 아우라가 다가왔다. 


  “여기 좀 앉으세요.” 그가 베이지색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말투가 어색했다. 

  “네....” 주저하며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이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만,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오래도록 규칙에 따라 살아온 사람이라  조심스러운 것도 도가 지나칠 수밖에 없지요.” 그의 진지한 눈이 빛났다. 오른 눈가는 눈물이 맺힌 것처럼 반짝였다. 

  “사실 어리둥절합니다. 저는 이곳 토박이로 지냈었는데 이런 지하세계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당연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를 수밖에 없죠. 아는 사람이 아는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모르냐 아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네.... 갑자기 켄 사장님이 이상한 얘기를 꺼낸 이후로 생각지도 못하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여긴 뭐 하는 곳인가요?” 

  “이곳은 데이터 저장소입니다. 물건의 창고 같은 곳이지요.” 

  “그 데이터라는 것이 그럼....” 

  “레몬에서 추출된 정보들입니다. 용도야 많겠지만 저희는 고객의 일까지 관여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집적된 자료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보관하고, 필요하면 이관하지요.” 

  “켄 사장님이 가보면 알 거라고 했는데 혹시 무슨....” 

  “잠깐만요. 커피?” 그가 커피머신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네. 블랙으로 부탁드립니다.” 

  그가 능숙한 솜씨로 커피를 내려 자리로 가져오며 말했다. “켄 에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부탁을 잘 안 하는 사람이라 의외더군요. 걱정이란 생선 가시처럼 한 번 제거한다고 완전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멋쟁이 노인은 하얀 잔을 손에 들고 이어 말했다. “안면인식 프로그램 상 제이는 아동 편향적 성도착증, 소시오패스, 과대망상 성향에 미학적 재능이 아주 높습니다.” 

  “마치 관상을 보는 것 같네요.” 

  “네. 어떻게 보면 그렇지요. 좀 더 과학적이긴 하지만.” 

  “박사님. 안면인식 기술은 어떤 건가요?” 

  “기본적으로 사람의 얼굴을 이루는 모든 근육과 조직들을 스탁과 플로우 개념에서 데이터화 하는 것입니다.” 

  “스탁과 플로우요?” 

  “스탁은 정지상태의 얼굴 모양 자체를 말하는 것이고, 플로우는 움직일 때 얼굴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정지상태의 구조를 스캔한 다음,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화해가는 움직임을 데이터화합니다. 간단한 예로 눈의 흰자와 검은자의 모양과 크기, 동공의 움직임과 세기, 방향과 흔들림, 입꼬리 및 입술 모양과 패턴, 귀의 모양과 움직임의 방향 세기, 콧구멍의 변화, 고개의 각도, 눈썹과 이마 움직임의 각도 등 다양한 요소들을 분석하면 사람들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이 지문이나 DNA처럼 새겨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고양이 같은 경우, 평소에는 눈망울이 귀여워도 쥐를 잡을 때는 동공 속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개체마다 눈동자가 늘어나는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요. 저희 프로그램은 그런 것을 포착한다고 보면 됩니다. 눈동자만 봐도 김 씨네 야옹이인지 로버트 씨의 캐티인지 확인이 되지요.” 

  갑자기 숨이 막힐 정도로 부담감이 느껴졌다.  

  “제가 메시지를 받았을 때 100% 일치라고 말하던데....” 

  “레인보우 원장과 100% 일치하는 사람이 제이라는 말씀입니다.”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이런 곳까지 와서 굳이 겁나는 이야기까지 들어도 되는지 걱정됩니다. 전 그냥 켄 사장님 소개로 레인보우 원장과 제이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서 왔거든요.” 

  “선생님을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는 초대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애피타이저만 드릴 수는 없지요. 켄 사장도 얘기했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제부터 선생님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유념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나. 원.... 초대 받은 사람, 초대 받은 사람, 자꾸 그러는데 전 그냥 왔다니까요. 제가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니지만, 솔직히 너무 무서워요. 하는 얘기들이 전부 다요. 부드럽게 돌려 말씀하시지만 이건 뭐 범죄조직의 협박보다 더한 것 같아요. 레몬은 완전한 불법 아닌가요? 사생활을 조금만 훔쳐봐도 죄가 될 텐데. 몰래카메라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네요. 혹시 저도 감시하나요?”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감시해 왔습니다.” 

  “.... 그럼 박사님은 특정 비밀 조직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말씀드릴 수 있는 사실은 켄도 저도 목숨을 걸고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이 세상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얘기네요. 제가 할 일은 그저 입만 굳게 다물고 있으면 되는 겁니까? 저는 이런 곳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에요. 고매한 사상, 인류에 공헌, 이딴 거와 거리가 멀어요. 배운 거라곤 미용뿐이고 딱히 전문기술도 없고 대학교도 안 나왔고. 뭐 다양한 경험 그런 것도 없어요.” 

  하얀 구레나룻 노인은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문 채 벽에 있는 모니터를 검지로 가리켰다. 고속도로 전도 같이 생긴 지도에 노란 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노란 점들이 보입니까?” 

  “네. 많네요.” 

  “저곳이 우리가 운영하는 영화관입니다. 저희는 레몬이라고 부르죠. 한국에는 레몬이 100개가 있고 관리인만 200명입니다. 그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일하는데도 현재까지 자살 당하거나 증발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물론 아주 가끔씩은 있지만....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도 궁금하네요. 인간인 이상 문제가 생길 것도 같은데. 이런 시스템이 외부에 알려지면 파장도 클 것 같고. 어떻게 이런 게 유지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도 안 됩니다.” 

  “그건 레몬을 관리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 자기 일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들이죠.” 

  “어떤 사람들인가요? 세뇌 같은 것을 받은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특수약물을 주입해 매번 기억을 삭제시켜 버리나요?”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세계라면.... 설마 자폐증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표면적인 페르소나 세계에서는 자폐인들을 치료라는 목적으로 바꾸려 하거나 격리라는 방법으로 솎아내려 합니다. 그 근본에는 자신들의 세계에 적합한 인간으로 사회화시켜야 된다는 관념이 있지요. 하지만 페르소나 이면의 그림자 세계에서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림자 세계에서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폐증 환자의 상당수가 지능지수 70을 못 넘고 살아가면서 의미 있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합니다. 어떤 표현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페르소나 세상에서는 당연히 불량품 취급을 받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림자 세상에서는 가장 필요한 유형의 사람입니다. 저희 프로젝트가 지금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도 이런 사람들을 우리 세계로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안면인식 기술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저기요. 박사님. 자폐증 환자는 사람의 표정을 보고 그 사람의 감정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웃는지, 우는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복잡한 시스템의 관리인이 될 수 있습니까?” 

  “그건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만, 저희 시스템은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자폐아들은 사람의 시선이나 몸짓, 표정의 작은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컬러사진과 흑백사진을 비유해 보겠습니다. 자폐아들에게 사물의 본질을 혼동케 하는 컬러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물의 모양이나 움직임의 작은 변화를 본질 그대로, 있는 그대로, 흑백사진처럼 보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색조 화장에 아무리 많은 변화를 줘도, 자폐인들은 그들을 화장 전의 인물과 동일하게 파악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매칭기술을 필요로 하는 저희의 시스템에 최적화된 사람들입니다. 컴퓨터만큼 정확하지만 인간의 응용력도 가지고 있는 셈이죠. 이건 제 생각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이 시스템을 개발하고 운영해온 사람들이 축적해 온 증거입니다.”    

  도무지 이 멋쟁이 할아버지의 세계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 경험의 세계와는 간극이 벌어져 있었다. 자폐증을 가진 아들 키우기가 힘들어 베란다에서 아들을 밀어버린 나는 이런 거대한 담론을 꿈꾸는 사람들과 어울릴 정도의 수준이 아닐지 모른다. 어색한 감정을 겨우 참아가며 말했다. 

  “이 세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그들의 용어로 멋쩍게 말했다. 

  “한 가지는 꼭 기억하고 가세요. 축구장에 탁구공이 떨어져 있다 고 그 탁구공이 쓸모가 없는 건 아닙니다. 탁구공은 탁구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직시하면 됩니다. 탁구가 무엇인지, 탁구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그 탁구공을 주워서 제 자리에 옮겨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축구장의 세계에 매몰되지 마세요.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그는 검지와 중지를 붙인 손을 눈썹에 붙였다 뗐다.

  문밖으로 나오자 빨간 안경의 여자가 딱딱하게 허리를 세운 채 서 있었고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따라 시력검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햇살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몬 향 가득한 유리 복도를 지나서 가게의 홀로 돌아오자, 들어갈 때와 달리 손님들이 북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꿈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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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7일, 진해, 윤정민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아버지의 모습과 거실에 퍼지는 중국어의 큰 울림. 내게 가장 익숙한 풍경이었다. 주일의 말처럼 지금도 많은 자폐아들은 바보 취급을 받으며 방치되고 있을 것이고, 나 또한 그렇게 될지 모를 운명이었다. 발상의 전환일까, 아버지의 기술을 물려받고 싶은 마음이 움텄다. 그에게 다가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버지, 저도 응용행동분석 공부 좀 해 볼까요?”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러다 아무 말이 없다. 

  “제가 자폐를 극복한 산 증인이잖아요. 아버지는 유명한 전문가고. 이대로 묵혀 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자폐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데 뭔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가 눈을 감았다. 눈가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또 주문을 외려는 것일까. 괜히 말했나 싶다. 

  “민아....” 다행히 주문은 아니다. 

  “사건이 해결되면 천천히 생각해 보자.” 

  그럼 그렇지. 아직 그의 머릿속은 사건 생각으로 복잡할 것이다.    “주일이 말로는 사건이 종결되고 장기과제로 이관되었다고 하던데요. 실종된 원장 건도, 존 김 건도 전부 미제사건으로 넘어간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어요.” 

  “그래....” 그가 코로 숨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나마 아버지가 이 정도라도 회복되어 다행이었다. 

  “저와 제시는 과거에 원장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비밀로 해 왔기 때문에 애꿎은 피해자들만 늘어났을 거라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공개가 되면 파장도 클 거고요. 사람들은 원장의 악행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가능성도 있죠. 그런데 제시 아버지는 그 악마 놈 잡으려고 몇 년을 한국까지 헤매고 다녔는데, 아버지는 왜 그 악마랑 주기적으로 만나서 희희낙락 교류만 했냐는 거죠. 그 결과는 뭐. 존 김은 비명횡사하고 아버지는 이렇게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거겠지만....” 

  잔을 잡으려는 아버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전 아버지가 뭘 두려워하는지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왜 존 김처럼 악마를 처단할 배짱조차 없는지, 도대체 그 악마와 무슨 작당 모의를 하신 건지 그게 궁금해요. 무슨 약점을 잡혀서 존 김마저 죽인 사람을 두둔하고 있는 거죠? 증거야 아버지가 만들어 내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명백히 의지의 문제입니다.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버지예요. 이 사건 이대로 묻히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제가 앞으로 그 악마와 이 분야에서 얼굴 맞대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제대로 팔다리 뻗고 살 수 있겠느냐고요?” 

  내 마음의 화산에서 터져 나온 응어리가 그의 창백한 얼굴 위로 쏟아져 버린 것처럼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버지! 제발 겁 좀 내지 마세요. 아문 상처를 자꾸 만지면서 회상하지 마세요. 그 상처 낸 놈을 잡아야지요. 그놈이 여장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죠?” 

  그가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기 시작했다. 아들이 이제껏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일 거라 생각했던 것인가. 

  “제이가 원장 행세를 하다가 가짜 실종 신고를 냈으니, 그 증거를 찾아야만 합니다. 경찰도 찾지 못하는 증거는 아버지가 못하면 제가 찾아내겠습니다. 그놈은 사람 죽는 거 우습게 아는 놈입니다. 넋 놓고 있으면 또 당해요. 그놈한테 조종당하면 안 됩니다.” 

  그가 텔레비전을 끄며 바위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민아, 내 말 잘 들어라. 네가 잃어버린 운동화 999 한 짝은 틀림없이 제이가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집에 있는 999 나머지 한 짝을 불태워 버렸다. 대신 666 한 짝을 진 형사에게 증거로 제출했기 때문에, 네가 공식적으로 작년 4월 1일 신고 나가 잃어버린 운동화는 666이다. 그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숫자들을 함부로 조작하는 일은 불가능할 거야. 운동화 끈 안쪽에 적힌 숫자를 찾아내는 것도 어려울 뿐 아니라, 글씨체와 펜의 종류, 그리고 숫자를 적은 시간과 그 숫자의 의미 등 이 모든 것은 네가 아니면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넌 이해할 거야. 만약 내가 그놈을 공격한다면, 그놈은 보관하고 있던 999 운동화를 나나 너와 연관시킬 거야.” 

  “운동화를 저희와 연관시킨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의 표정이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장복산 실종 사건 당일, 우리 집 근처 CCTV에 찍혔던 영상 기억나지?” 

  “네. 제 운동화를 둘러싼 중년 여자 둘의 암투죠.” 

  “그래. 처음 트럭을 타고 운동화를 우리 집 앞에 가져다 놓은 사람을 A라고 해 봐. A는 운동화에 적혀 있는 네 이름을 보고 우리 집 앞에 그것을 갖다 놓았으니, 널 틀림없이 아는 사람일 거야. 그리고 네가 장복산에서 만났던 사람이고. 맞지?” 

  “그렇죠.” 

  “트럭이 떠나고 뒤이어 운동화를 가져간 사람은 B라고 해 봐. 이 사람은 왜 A를 뒤따라와서 운동화를 가져갔을까? 네 증언에 따르면, 장복산에는 너와 A만 있었고, 네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바람에 너의 잃어버린 운동화를 A가 돌려주었다는 거지. 그럼 그 시각 일어났던 실종 사건은 어떻게 될까? 만약 A가 범인이라면, 자신을 목격한 데다 아는 사람이었던 네 운동화를 집 앞까지 와서 돌려주고 떠났을까? 경찰은 절대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어. 그 이후 A의 행적도 묘원하다는 거야. 동선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증발해 버렸지. 그렇게 되면, 경찰은 바로 네가 범인이고 A가 목격자라고 단번에 뒤집어 생각할 수도 있어.” 

  “아니, 세상에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잘 들어 봐. 네가 범행을 저지르고 도망치다 엎어져서 운동화 한 짝을 흘렸다. 그때 목격자 A가 다가온다. 순간 A가 아는 사람이라 넌 놀라 도망친다. 그런데 아차 하고 생각해 보니 운동화에 이름이 적혀 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도망치다 산속에 숨어서 A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A가 우리 집 앞에 두고 간 운동화를 뒤따라가서 챙기고 A를 쫓아간다. 그렇게 말이야. 더 설득력 있지? 그러면 B는 누구? 바로 네가 돼 버리는 거야.”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운동화 한 짝으로 그렇게까지 몰고 갈 수 있을까요? CCTV에 보면 그 B도 여자였는데. 제가 무슨 조깅하다가 여장까지 하고 나타나요. 그렇게까지는.... 도무지....” 

  “잘 들어 봐.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래서 B라는 새로운 인물이 중요한 거야. A가 집 앞에 두고 간 운동화를 새로운 인물인 B가 가져가야 네 증언이 맞아떨어지는 거야. 너는 단지 신발을 잃어버리고 무서워서 도망친 사람에 불과하단 논리가 제대로 성립될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런데 만약 B가 가져갔던 그 운동화가 너한테 발견이 되었다. 그럼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니? 그걸로 끝이야. 그때는 정말 그 B가 바로 네가 돼 버리는 거야. 네 범행 동기는, 그놈이 네게 저질렀던 악행들이 외부에 밝혀졌을 때,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고. 너는 원장에게 당한 것을 복수한 셈이 되는 거지.” 

  아버지의 시나리오가 사실은 아니었지만 내가 듣기에도 논리적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사건을 분석했을 것이다. 형사가 어떻게 생각할지, 악마가 어떻게 나올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버지, 만약 제가 범인이라면 제이에게 복수를 해야지, 그 놈이 연기했던 존재하지도 않는 원장에게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나요?” 

  그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그건 경찰이 제이가 오랫동안 실종된 원장 행세를 해 온 것을 알지 못하니까 그렇지.” 

  “결론적으로 아버지 말씀은 그 999 운동화 하나로, 제이가 만일을 대비해 일을 꾸밀 수 있다는 얘기네요.” 

  “그래. 난 틀림없이 그놈이 너를 B로 몰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원장이 어디에 있던 그녀를 실종시킨 범인으로. 넌 1년 동안 장복산으로 달리기를 하면서 게스트 모텔 근처의 지리를 잘 알고 있고, 실종 사건도 바로 그 시간에 일어났으니까. 그놈이 사건 당일 실종극을 벌이면서 네 운동화를 우연히 손에 넣게 되었고 그쪽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 생각해 봐. 만약 그놈이 보관하고 있던 999를 몰래 우리 학원 같은데 넣어 두고, 진 형사에게 알리거나 하면 문제가 생길 거야. 그래서 나는 999를 몰래 없애 버리고 경찰에는 666을 제출했어. 그놈이 999로 수작을 부려도 내가 666을 제출했으니, 그 둘은 다른 운동화가 되는 거잖아. 아무 문제 없게 만들어 놨어. 그놈이 오히려 궁지에 몰릴 수 있도록. 죄 없는 너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거지. 운동화 번호에 대해서는 너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를 거야. 남은 666 한 짝은 내가 잘 보관하고 있다. 그건 혹시 몰라 버리지 않았어.” 

  “음.... 납득은 되는데.... 아버지, 그렇다면 그 A는 누구일까요? 제가 장복산에서 만났던 그 중년의 여자.” 

  아버지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말했다. “존 김이다.” 

  예상은 했었지만.... 

  “그 사람도 여장을.... 제가 본 사람은 분명히 여자였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자기 얼굴을 알고 있는 그놈을 계속 미행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겠지. 존 김이 실종 사건 당일 교활한 그놈의 함정에 빠져 버린 거야.” 아버지는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존 김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봐. 사람을 사려고 생각했다면 벌써 미국에 있을 때 킬러부터 고용하지 않았을까. 난 그를 오랫동안 봐와서 잘 알아. 그는 투자할 때도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였던 사람이야. 자산관리인은 두지도 않았어. 제시의 치료 때도 그 저명한 교수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도 않았어. 항상 방점은 본인이 찍었지. 내가 아는 존 김은 제시를 위해 여장쯤이야 하고도 남을 사람이야. 오랫동안 그놈을 찾고 있었고 그놈이 진해에 올 때도 계속 미행했을 거야. 그놈이 낌새를 알아채고 함정을 파서 자신을 노리는 추적자가 존 김이라는 것을 알아냈던 거지. 그 이후에 서울에서 죽였던 거고. 장복산 사건이 일어난 후 존 김에게 위험하다고 누차 말했어. 당신은 함정에 빠졌고, 당신이 쫓고 있다는 것을 그놈이 눈치챘다고. 하지만 한발 늦어버렸지.” 

  “그러면, 우리가 한발 빨리 그놈을 처리할 방법은 없는 걸까요?”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방법이든 생각은 하고 있을 것이지만 딱히 떠오르는 묘안은 없으리라. 갑자기 그를 심하게 쏘아붙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갑자기 눈을 뜨며 말했다. 

  “민아, 중요한 걸 빼먹을 뻔했다. 신발장 맨 위쪽에 새 신발이 있지. 그 한 켤레에 네 이름과 999를 적고 그것을 될 수 있으면 자주 신고 다녀라. 그리고 빈 상자는 꼭 태워 버리고.” 

  “그렇게 할게요. 999는 분실한 적 없는 신발이란 증거를 남겨두기 위해서죠?” 

  “그래. 그리고 만약 정밀감식에 999가 최근에 적힌 것으로 나와도 그건 문제가 없을 거다. 예전 999는 낡아서 버렸다고 하면 되니까.” 

  “그런데 사실 아버지께 말 안 했던 사실이 있어요....” 

  그가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에 진 형사를 만났는데, 자기한테 소포가 하나 배달되었다고 하면서 그걸 보여 주더라고요.”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뭔데?” 

  “250 사이즈 아식스 운동화요. 제가 일산 사고 때 신고 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신발이라는데....”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심각한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언제 말했냐?” 

  “며칠 되었어요.” 

  “민아, 일단 내가 시킨 거 하고, 내일이나 모레 어디 같이 좀 가 봐야겠다.” 

  “어디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엄마가 있는 곳.” 

  드디어 그의 입에서 엄마 말이 나왔다. 왜 인제 서야 또 엄마가 있는 곳에 간다는 것일까.... 또 그의 뒷북치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와 이야기가 끝나자 새 아식스 신발에 999를 적어 넣고, 현관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빈 상자를 태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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