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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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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3일~5월 10일, 진해-후쿠오카, 최유진 

 

  챙이 긴 모자로 어색한 시선들을 피하며 쓰러질 듯 보이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20년이 지나 돌아온 잿빛 아파트는 그대로였다. 어두컴컴한 계단 입구에 들어서자 묵은 시멘트 냄새가 올라왔다. 한 발, 또 한 발, 천천히 과거의 시간을 밟아 나갔다. 현관문을 열자 과거가 사라지고 깔끔하게 정돈된 현재가 나타났다. 베란다 창문을 열자 사라진 과거가 다시 나타났다. 에어컨 실외기는 그 자리에 있었고 어디선가 앰뷸런스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려왔다. 먼지가 수북한 바람 빠진 자전거와 킥보드, 그 옆으로 모가 닳은 칫솔이 가득 담긴 색 바랜 노란 바가지가 보인다. 아이를 눕힌 채 머리를 잡고 박박 닦아대던 칫솔, 싫다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목을 간질어대며 억지로 닦아대던 닳아빠진 그 칫솔들이 모두 한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부엌에는 칼이며 도마며 냄비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는 음식물 자국 하나 보이지 않고 표면도 반짝거렸다. 싱크대에는 물기조차 없었다. 냉장고에는 먹을 만한 게 들어 있지 않았다. 김치통도 없었고 밑반찬 통도 없었다. 냉동실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도 없이 제대로 밥은 해 먹고 다녔을까. 아이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식탁 테이블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컵라면이 보였다. 태우는 베란다에서 추락 후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컵라면이 놓인 가판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나는 컵라면 1상자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태우에게 먹였다. 맛있게 먹는 아이를 보며 찢어지는 가슴을 잡고 짐을 꾸렸다. 남편이 아이와 함께 목욕을 나간 화창한 일요일 아침에 나는 집을 떠났다. 

  거실의 소파도 텔레비전도 누렇게 빛바랜 벽의 크레용 낙서들도 모두 그대로였다. 안방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현관문을 닫고 나와 태우의 생선 가게로 걸어갔다. 구석에서 고개를 숙인 채, 생선을 손질하고 있는 태우가 보였다. 

  “태우야, 엄마 집에 갔다 왔다.” 

  “여기 앉을 때가 없는데 카페 가서 얘기할까요?”

  아이도 주변 시선이 신경 쓰이리라. 빠른 걸음으로 아는 얼굴을 스치며 시장을 빠져나왔다. 카페 안은 해군 면회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곧 태우가 들어왔다. 

  “너는 군대 안 가도 되냐?” 나는 해군 장병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를 보며 태우에게 물었다.

  “네. 제가 오랫동안 자폐 장애로 등록이 되어 있어서 면제 받았어요. 근데 정민이는 다녀온 것 같더라고요.” 

  “왜?” 

  “걔는 원래부터 장애 등록도 안 했고 중학교 때부터 완전히 회복되어서 그런가 봐요.” 

  “그래. 마유미가 어디서 들었는지 그런 것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엄마한테 은근슬쩍 네 군대 얘기를 물어보더라.” 

  태우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마유미랑 우리 태우는 원래부터 인연이 될 운명이었던가 보다. 내가 처음 영화관 들어갔을 때부터 마유미는 이상하게 거리감도 안 느껴지고 딸 같더라. 집은 가구고 뭐고 변한 게 거의 없던데. 깔끔하게 청소도 잘 되어있고.” 

  “네. 아버지도 집에 안 계시고 저도 잠만 자고 하니까 불편한 것도 없어서 그냥 살았어요.” 

  “저번에 얘기했던 존 김 사건 있잖아.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정민이하고 아버님한테도 얘기해 봤는데 아무래도 제이라는 실종자의 남동생이 수상하다고 그러더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 남동생이란 사람 그 이후로 엄마한테 연락한 적은 없죠?” 

  “응. 왜?” 

  “혹시라도 엄마에게 자기 정체가 탄로 났다고 믿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래, 아직 없어. 신분증 같은 거는 그냥 모르는 척하려고. 괜히 신경 쓰다 네 말처럼 되면 안 될 것 같아서.” 

  “엄마. 혹시 연락 와도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하세요. 엮이면 안 될 것 같아요.” 태우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당부했다. 


  진해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일본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느닷없이 켄 사장이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드문 일이었다. 이틀 후, 우리는 후쿠오카 타워 근처에 위치한 장어덮밥 전문점에서 만났다. 개별 룸이 많은 큰 가게였다. 기다란 검정 포렴을 걷고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네모반듯한 황갈색 나무 용기 속 고슬고슬한 밥 위에, 노릇하게 잘 구워진 기다란 장어 세 마리가 먹음직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구두쇠로 유명한 사람이 어쩐 일로 비싼 장어를 대접하는 건지. 분명 따로 부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한국은 잘 다녀왔어?” 

  “네, 아들도 만나고 필요한 일도 하고 왔습니다.” 

  “거, 편하게 먹으면서 얘기하지.” 

  그는 빤히 올려다보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장어 한 젓가락을 입에 집어넣고 오물거린 다음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도 장어 하나를 밥에 싸서 입에 넣었다. 녹차를 마시며 그가 가볍게 말을 툭 던졌다. “내가 왕년에 사람을 죽여 봐서 아는데 말이야.” 

  그의 말에 순간 입속에 있던 음식물 일부가 튀어나와 그릇 옆에 떨어졌다. 물수건으로 재빨리 닦았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사람을 죽이면 제일 무서운 게 뭐일 것 같나?” 

  뚱딴지같은 노인의 말에 완전히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오래도록 알고 있던 켄 사장은 지독한 구두쇠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논쟁하는 것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난데없는 말에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구별되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얼마 전부터 영화관 주변에 수상한 남자 한 명이 보이네. 자네는 눈치채고 있었나? 어수룩한 회사원같이 보이는 친구 말이야.” 

  나는 마시던 물을 푸 하고 내뱉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사실 긴장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사방으로 튄 물을 물수건으로 허겁지겁 닦았다. 그가 말을 꺼낼 타이밍에는 음식을 입에 넣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자네를 노리고 있어. 이유를 아나?”

  “모릅니다. 전 일본에서 원한을 산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사람을 죽인 자는 말이지. 그게 들킬까 봐 무서워 계속 대뇌인 단 말이야. 실수하지 않았는지, 누가 보지는 않았는지. 자네라면 안 그러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그 사람의 두려움 속에 자네가 들어있기 때문이야.” 

  “전 그 사람과 일면식도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자넨 딱 걸려들었어. 그 회사원은 말이지, 저번에 제이와 함께 영화관에 들어왔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야.” 

  “네?” 

  “우리 영화관 캐널시티 지점의 사사키네.” 

  “그럴 리가.... 전혀 다르게 보이던데....” 

  “그렇겠지. 그러니까 사사키지. 도저히 못 알아보겠던가?” 켄은 껄껄 한참을 웃었다. “그럼 그의 두려움 속에 왜 자네가 발을 딛게 되었는지, 그가 왜 자네를 노리게 되었는지 알아보지.” 

  “잠깐만요. 사사키가 왜 하카타 본점으로 제이를 유인해 그런 이상한 일을 해야 했죠? 둘은 무슨 관계가 있어서. 그것도 시내 영화관에서.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바로 이 사건의 핵심이야. 자신이 일하는 영화관 본점에서 작업을 했다. 그건 영화관 자체에 비밀이 있기 때문이야.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는 부분. 거기가 핵심이야.” 

  “그럼.... 우리 영화관의 누군가가 사사키에게 제이를 영화관으로 유인하라고 한 건가요?” 

  켄 사장은 장어 한 젓가락을 다시 입에 넣고 오물거렸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셨다. 물이 조금 흘러내렸다. 

  “바로 나지. 내가 사사키에게 시켰던 거야.” 

  “사장님이요?”

  그는 녹차를 천천히 입가에 갖다 대며 말했다. “흥분하지 말게. 그래야 얘기를 하지.” 그가 컵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네가 알고 있는 존 김은 내 오랜 친구야. 내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에 있을 때 그가 많이 도와줬어. 무얼 바라고 그런 건 아닐 거야. 공원에서 조깅하다 우연히 알게 된 사이니까. 참 힘들었을 때야. 국적도 다른 생면부지의 가난뱅이 일본 유학생인데 잘해 주더라고. 아무튼 그렇게 미국에서 후원을 받았지. 이후에 나는 일본으로 돌아왔어. 어느 날 존 김에게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부탁을 하나 하더군. 사람을 한 명 찾고 있다고. 여장 남자라고 했지. CCTV 사진을 몇 장 받았는데, 사람 찾는 데는 그걸로 충분했어.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두말하지 않고 약속했지. 나는 안면인식 기술 전문가였고, 사람 한 명쯤은 충분히 찾을 힘이 있었으니까.” 

  “왜 존 김이 사장님에게 사람 찾는 일을 부탁했는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안면인식 전문가라 해도....” 

  “오늘 내가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자네가 생각하는 영화관과 실제 영화관은 다를 수 있다는 얘기지. 나는 존 김의 부탁을 받은 후, 곧바로 캐널시티 지점의 사사키에게 악마사냥을 지시했고, 정확히 일주일 후 사사키는 한국으로 날아가 서울 강남역의 한 오피스텔에서 존 김이 추적하던 인물을 찾아냈지.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겨 버렸어.” 

  이야기는 갈수록 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그렇다고 이런 스토리를 지어낼 사람도 아니었기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잡은 사람이 진짜 여자였단 말이지. 여장 남자가 아니라. 이름은 사만다 김. 그녀는 외모가 흡사한 제이 김이라는 남동생이 있었어. 존 김이 찾고 있던 진짜 타깃은 사만다가 아니라 제이였던 셈이지. 결과적으로 우린 사람을 잘못 봤던 거야. 제이가 미국에서 얼마나  사만다 행세를 하고 다녔는지 알겠나? 사사키가 헷갈릴 정도면.... 아무튼 존 김은 그렇게 잡은 사만다를 죽이지 않길 원했어. 그래서 사사키가 그녀를 후쿠오카로 데려왔지.” 

  “어떻게요?” 

  “데려오는 건 일도 아니야. 출입국에 여권 도장 받는 길만 있는 건 아니잖아. 여하튼 그렇게 사만다가 일본에 온 지도 꽤 되었어. 그런데 말이야, 존 김이 죽기 얼마 전 후쿠오카로 불쑥 찾아오더니 드디어 타깃을 찾았다고 했어. 일산 레인보우센터 원장이라더군. 그 사람이 진짜 라고 말했어. 그래서 사사키가 한국으로 갔는데, 타깃은 죽지 않고, 존 김이 죽어 버렸어. 그 사건은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아직 친구 약속도 못 지켰는데 말이야.”    

  “네....” 

  “임무 실패 후 사사키도 후쿠오카로 일단 돌아왔어. 그리고 한참 뒤에 사사키는 타깃이 세미나 차 일본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다시 D-day를 노렸던 거야. 그날이 바로 자네가 영화관에서 제이 와 사사키를 본 날이지.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더라고.” 

  “어떤....” 

  “큐피드 바에서 사사키가 계획대로 제이에게 접근해 잔에 약을 넣었는데, 제이가 의심해 잔을 바꿔치기한 거잖아. 그래서 영화관으로 이동 후, 제이를 죽이려던 사사키의 계획은 잔이 뒤바뀐 탓에 실패한 거고.” 

  “그렇죠.” 

  “자넨 모르겠지만, 난 이 흐름에서 어색한 냄새가 나.” 

  “왜....” 

  “영화관의 비밀 때문이야. 우린 사람들의 안면을 모니터링하거든. 관리자들은 영화관을 레몬이라 불러.”  

  “네? 레몬요? 사람들의 안면을 모니터링한다고요?” 

  “놀랐겠지만 사실이야. 그날 영화관 모니터링 결과, 사사키의 연기는 어색한 것으로 판명됐어. 이런 경우를 불일치라고 부르지. 제이와 사사키에게는 특수약물의 반응이 안면인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표정도 전부 엉터리였지. 그는 제이를 진짜로 죽일 의도가 없었단 말이야. 처음에는 나도 사사키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안면인식 전문가야. 레몬은 사람의 미세한 표정 변화, 예를 들어, 1밀리의 눈가 떨림이나 1밀리의 입술 움직임도 간파해 낼 수 있고, 그것이 어떤 때 나타나는 현상인지도 전부 알 수 있어. 그걸 사사키가 간과했어. 그는 배신자야.” 

  ‘표정 전문가.... 안면인식....’ 어렵고 생소한 말들이었다.  

  “우리는 사사키가 제이에게 매수된 것으로 보고 있어. 그렇다고 레몬의 정체가 제이에게 탄로 날 가능성은 낮지만....” 

  “왜요? 매수될 정도면, 탄로 나도 여러 번 날 것 같은데.” 

  “그건 말이지. 좀 다른 차원의 스토리야. 레몬을 노출시키면 사사키의 모든 것도 사라지지. 그걸 그가 모를 리가 없어.” 그가 잠깐 머뭇거렸다. “그리고 존 김의 죽음도 사사키가 의심돼.” 

  “왜 사사키가 존 김을 죽여야 되나요?” 

  “제이에게 매수되었으니까. 존 김의 죽음에서 사사키의 냄새가 나.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가 자네를 노리는 거네. 자넨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그의 수상한 냄새를 맡은 거야.” 

  “사장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제이가 레몬의 전문가인 사사키를 어떻게 매수할 수 있었을까요? 도저히 불가능한 일 같은데.... 말씀들이 스케일이 커서 도통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세상의 묘미가 거기에 있지. 약점을 물고 물리는 관계에서 안 될 게 뭐가 있겠나?” 

  “약점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경찰에 신고할까요?” 

  나는 켄 사장에게 그동안 제이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했다. 그는 생각하는 조각상처럼 턱을 괸 채, 진지하게 내 말에 집중했다. 그리곤 복화술사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사사키는 내게 맡기고, 자네는 서울에서 제이를 만나게. 확인할 것이 있네.” 그는 친구 존 김과 지키지 못한 약속을 실행할 적임자를 찾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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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1일, 진해, 윤정민 

 

  빗길을 지나는 자동차 소리에 눈을 떴다. 작은 창을 여니 어둑한 거리가 축축이 젖어 들고 있었다. 멀리서 후드티의 남자가 모자를 눌러쓴 채, 주먹을 허공에 내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서둘러 용무를 끝내고 운동화 777을 신고 앞코로 바닥을 차며 나왔다. 

  “태우야! 록키 같다.” 

  그는 신이 난 듯, 원투 하며 주먹을 뻗어 댔다. 우리는 가볍게 몸을 풀고 평소와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비 냄새가 올라왔고 텅 빈 거리는 더욱 쓸쓸해 보였다. 해안가 도로를 돌아 로터리에 다다르자 태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정민아, 생각해 봤는데 이번 사건들은 전부 윤 선생님과 연결된 거잖아. 그런데 뭔가 이상해. 너무 소극적인 느낌이 들어. 혹시 윤 선생님은 약점이 잡힌 건 아닐까?” 

  약점이라.... 난 왜 그 생각을 지금까지 못 했을까.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고 잔기침이 나왔다. “우리 저기서 따뜻한 캔 커피 하나 마실까?” 나는 비 올 때면 가끔 들르던 편의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온장고에서 따뜻한 캔 커피를 꺼내 들고 있으니 계산대의 중년 남자가 처량한 눈길로 쳐다봤다. ‘이런 날씨에 뭣들 하고 있나?’라는 얼굴이었다. 커피 한 모금의 온기가 온몸 가득 퍼져 나갔다. 

  “태우야, 넌 어렸을 적 기억이 살아 있잖아. 자폐증 있던 때와 없어졌을 때는 어떤 차이점이 있어?” 

  “내 맘은 변한 게 없는데, 주변 사람이 변했지 뭐....” 

  “그거 말고는 없어?”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 그저 표현을 못했을 뿐이지. 근데 왜?” 

  “그냥 궁금하더라고. 나는 현재와 과거의 내가 다르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거든. 그게 아닐 수도 있겠네.”  

  “그래. 난 그대로라고 생각해. 윤 선생님이 날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신 거지.” 

  태우는 목을 젖혀 커피를 탈탈 털어 마신 후 빈 깡통을 휴지통에 던지며 말했다. “우리, 간만에 영화나 한 편 볼까?” 일본 영화관에서 일하는 엄마와 여자 친구 영향인지 그는 갑자기 영화 얘기를 꺼냈고 우리는 그날 오후 오랜만에 영화관으로 향했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태우의 은색 쎄라토는 창원의 오래된 상가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좁고 어두운 지하와 달리, 탁 트인 쇼핑몰 세상이 나타났다. 남자 둘이 팝콘과 콜라를 들고 영화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여자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영화 시작까지는 광고까지 고려하면  30분은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 멀뚱히 사람 구경을 하고 있으려니 화장실을 다녀온 태우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늦었지. 미안.” 

  “오랜만에 예쁜 여자들 구경하니 좋네. 전화하고 왔냐?” 

  “아니. 비상구 같은 거 확인하고 왔지.” 

  “무슨 비상구?” 

  “엄마가 그러는데, 영화 시작할 때 비상구 가리키는 영상이 나오잖아. 그건 비행기 탈 때, 스튜어디스들이 비상시 행동요령을 알려주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된대. 그만큼 영화관은 사고가 나면 위험하다는 방증이라네. 그래서 영화관 올 때면 항상 두 눈으로, 두 발로 직접 비상구를 확인해야 한대.” 

  “너도 참. 노이로제 걸리겠다. 누가 영화관 와서 비상구부터 확인하냐? 다른 사람이랑 오면 기겁하겠어.”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옛날 일본 영화관에는 가끔 공무원들이 위장해서 영화를 보거나 근처 카페에서 온종일 영화관 감시를 하거나 했다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세금 문제 때문에, 극장들이 관객 수를 속이는지 감시하는 경우가 많았데. 필름 값도 안 나오게 적자가 나도.... 그리고 또.” 

  “또 뭐?”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 같고.” 

  “무슨?” 

  “관객이 거의 없어도 매출을 부풀리는 것.” 

  “그런 것도 있어?” 

  “어. 그런 경우도 있대.” 

  “참 재미있는 세상이네. 왠지 여기 영화 보러 오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렇지? 뭔가 비밀스러운 장소 같잖아. 불이 꺼져 있어야 자연스러운 곳이고. 밝고 조용한 곳과는 대비되는 공간이지.” 

  “영화 보러 와서 이런 생각하는 사람은 또 처음 봤는데.” 

  선입견이 깨지고 있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정규 교육도 못 받고, 책도 안 읽고, 공부도 많이 못해 어리숙하지만 착한 친구. 그것이 내가 가진 그에 대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남들과 다른 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극장에 들어서자 광고 소리, 과자 부스럭거리는 소리, 잡담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정다운 극장의 소리였다. 사람이 많았지만 좌측 끝 2인 좌석이라 옆 사람 신경 쓰지 않아 좋았다. 어디선가 기분 좋은 레몬 향이 났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영화에 깊이 빠져 있을 때쯤, 고무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태우가 했던 말 때문인지 슬쩍 겁이 나기 시작했다. 영화에 빠진 태우에게 냄새에 대해 말했고 우리 둘은 슬며시 극장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연기는 보이지 않았고 밖에 있는 극장 직원 한 명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착각한 것일까....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린이 갑자기 쿵 소리를 내며 꺼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만 별도의 안내 방송이나 지시는 없었다. 타는 냄새가 점점 심해지자 앞자리 여자 두 명이 출구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니 덜컥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태우와 함께 서둘러 가방을 메고 일어서려는데 밖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불이야! 불이야! 순식간에 극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상등이 보이는 쪽으로 사람들이 100미터 달리기 하듯 달려갔고, 출구는 빠져나가려는 사람들로 엎어지고 넘어지고 밟고 힘겨루기가 한창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아비규환이 펼쳐졌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연막탄을 터뜨린 것처럼 연기는 순식간에 극장 안을 휘감아 들어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기침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태우가 가방에서 작은 펜을 꺼내 버튼을 누르자 손전등이 켜졌다. 태우를 흉내 내며 옷소매로 코와 잎을 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사람이 몰리지 않은 반대편 출구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메케한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갑고 숨쉬기도 점점 어려워졌다. 한순간만 정신 줄을 놓으면 훅 하고 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반대편 출구 문을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다시 힘을 줘 당겼다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사람이 몰려 있는 반대편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때였다. 극장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 두 명이 녹색 야광 봉을 들고 극장 안으로 허둥지둥 뛰어 들어와 출구 바로 앞에서 수신호로 사람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녹색 야광 봉 신호에 따라 질서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병목현상으로 엉망이던 출구도 소란이 진정되며 스르르 정체가 풀리는 듯했다. 우리도 드디어 관리인을 지나쳐 출구를 빠져나가고 있었고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갑자기 뒤에서 “이거 쓰세요!”라고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뒤돌아보니 내게 한 말이 아니었다. 검정 마스크를 쓴 사람이 관리인에게 산소호흡기 모양의 마스크 같은 것을 건네주고 있었다. 이런 아수라장에서 다른 사람을 챙기는 것인가.... 출구로 빠져나오자 까만 연기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어 제대로 숨도 못 쉬고 눈도 뜨기 힘들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태우와 나는 자세를 낮추고 티셔츠로 얼굴을 막은 채, 사람들 꽁무니를 쫓아 비상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말발굽 같은 소리를 내며 헬멧과 우주복 차림의 소방관들이 우리를 지나쳐 빠르게 극장으로 올라갔고 맨 뒤에 오던 한 명이 비상계단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인솔해 아래로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들과 합류해 본의 아니게 맨 마지막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고 소식은 즉각 지역뉴스를 타고 방송되었다. 원인은 쇼핑몰 의류상가의 누전에 의한 것으로 50대 남녀 2명이 질식사하고 많은 사람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사망자는 영화관 관리자들로 손님들을 모두 밖으로 피신시키고 극장 내에서 쓰러졌다고 했다. 그들의 책임감과 희생정신은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태우가 아니었다면 나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영화관에서 세상과 작별했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영화관 옆 대형병원으로 옮겨졌고, 언제 나타났는지 경찰들이 수시로 움직이고 있었다. 영화관이란 둥근 판 위에 있던 사람들이, 병원이란 판으로 그대로 옮겨진 것 같았다.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장난치고 웃음 짓던 그 얼굴들은 넋이 나간 무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병원 관계자의 큰 목소리는 멍한 사람, 전화하는 사람, 우는 사람. 그냥 집에 가겠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허공 위를 에워싸며 메아리치고 있었다. 침대 구석에 걸터앉아 하얀 마스크를 쓴 간호사들을 보니 극장에서 누군가가 마스크를 건네던 일이 떠올라 태우에게 물었다. “극장에서 수신호 하던 관계자들이 마스크 쓰는 거 봤는데. 사람들도 거의 다 빠져나왔고, 우리가 거의 맨 마지막 아니었냐?” 

  태우는 병원에서 나눠 준 종이를 보다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래. 관리인들은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도 괜찮았는데. 연기도 별로 안 마셨을 것 같고. 심지어 마스크까지 썼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혹시 끝까지 남아서 쓰러진 사람이라도 있는지 살펴보다 그렇게 된 게 아닐까?” 

  마지막 상황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다급했던 장면이라 안개 낀 것처럼 기억이 흐렸다. 관리인에게만 마스크를 건네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했다. 그렇다 해도 태우는 과대망상처럼 안전에 관해 생각이 앞서 나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태우와 나는 그 병원에 입원하지도,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지도 않고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영화관 트라우마가 생길지도 모를 끔찍한 일이었다. 우리는 집에 돌아와서도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간직하기로 입을 맞췄다. 


  54 


2019년 5월 12일~5월 14일, 서울-진해, 최유진 

 

  이번엔 쾌속선 대신 비행기를 탔고, 부산 대신 인천으로 입국했다. 제이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영화관은 장안동 사거리에 있었다. 매표소 직원들은 친절했고, 청결 상태도 좋았다. 표를 끊고 목적지인 10층으로 향했다. 상영관 내부도 넓고 쾌적했다. 붉은 좌석의 VIP석은 회장님 집무실 의자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버튼 하나로 한껏 누워 발을 뻗을 수 있었고, 팔걸이 옆엔 다과를 놓을 수 있는 테이블도 놓여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감동할 상황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고가 시작되고 익숙한 레몬 향이 나기 시작했다.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카메라 같은 것은 찾기 힘들었다. 앞뒤, 좌우를 돌아봐도 마찬가지였다. 어찌하다 영화관에서 프런트 매니저로 10년 넘게 일했지만, 어둠 속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성전환한 사람과 결혼 후 10년 만에 그 진실을 알게 된 그런 기분 정도 될까.... 

  하카타 본관에서 사사키가 제이를 유인하고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는 켄의 말이 생각났다. 그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사사키는 그런 대담한 보여 주기 연극을 펼칠 만큼 레몬을 배반할 이유가 있었을까. 제이라는 놈은 도대체 누구기에, 사사키 같은 킬러를 매수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내일, 이곳으로 그 무서운 인간 제이를 유인해 악마의 낙인을 찍어야 한다. 그가 이곳으로 순순히 온다는 말은 레몬 향 영화관의 비밀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음 날 밤 12시 30분. 나는 제이와 목적지에서 만났다. 상영관 내부는 예상대로 관객이 거의 없었고, 나는 예행 연습했던 VIP석에 앉아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잘 지내셨죠?” 그가 슬며시 앉으며 말했다. 남자의 모습이었다. 

  분실물이 담긴 봉지를 내밀었다. “이거 돌려드리려고요.”

  그가 물건을 받아들며 덤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이거 주시려고 이렇게 먼길을 오셔서. 사실, 일본에서는 밝히기가 그랬어요. 부끄럽기도 하고.”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한국에 볼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온 거니까. 요즘 그런 분들 많아요.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예전에 한국에서도 저를 본 적이 있나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의 눈빛을 마주할 수 없었다. 

  “제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일본에서 발생한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가요? 유감스럽지만 저는 한국에서 여사님을 뵌 기억이 있는데요. 초면이 아닐 텐데....” 

  어둠 속에서 능청스럽게 들려오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서 사이코패스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심장 박동이 서서히 빨라지고 있었다. 레몬이 전부 지켜보고 있고 두려울 것이 없다고 자신을 진정시켰다. 그는 내가 존 김과 친구이자, 태우의 엄마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사사키를 통해 레몬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그를 한국에선 만난 기억이 없었다. 

  “어디서요?” 놀라는 척 연기를 했다. 

  “거기가 어디였더라....” 그는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비웃었다. 

  “저는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아세요!” 나는 단호히 말했다. 

  “아는 일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가 비열하게 속삭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일본에서 여기까지 온 사람 잡고 왜 이상한 말로 협박하시는 거예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차분해야 했지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내가 기억 못 하는 것이라면 그는 나를 어디선가 목격했고, 혹시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떠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구석자리에서 커플이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협박이라뇨.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은 져야죠.” 

  “앞으로 이런 일로는 더 뵙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있었다. 안 보는 듯 그의 귀 윗부분 머리에 눈길이 스쳤다. 가발을 오래 쓴 표식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켄 사장이 말한대로 10분을 끌었고, 그의 다양한 표정을 상상하며 감정 연기로 감정을 유도했다. 이제 그의 시각적 이미지는 유효한 정보로 데이터화 되어있을 것이다. 하카타 본관에서 사사키와 함께 촬영된 데이터, 존 김의 집에서 촬영된 CCTV 데이터, 레인보우 원장의 각종 사진 등과 비교 분석되어 최종 결과값이 나올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짙은 화장과 변장에도, 성형수술을 한다 해도, 지구 어디에도 숨어 지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특수가면을 쓰거나 또는 완전히 안면을 갈아엎어 표정을 만들어 내는 신경조직과 근육들을 새롭게 이식하지 않은 이상, 그는 독 안에든 쥐가 될 것이다. 

  나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뒤로 한 채, 겁에 질린 듯 극장을 뛰쳐나와 도로변에 주차된 택시를 타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 커피를 사서 창원행 심야버스에 오르니 커튼이 처진 채 불이 꺼져 있었다. 수면실 같아 출발도 전에 스르륵 잠이 들었다가 휴게소에서 눈을 떴다. 앞 좌석 그물망에 넣어둔 작은 캔 커피를 꺼냈다. 미지근했지만 그립고 달콤한 연유 맛이 났다. 다시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버스는 어느새 황량한 창원의 새벽 거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연주회 전에 존 김과 만났던 카페에서 커피를 잘 못 가져갔던 남자가 뇌리를 스쳤다. 그의 옆머리 가발 흔적이, 그 표식이 빛났다.  


  진해 신시가지에 위치한 찜질방에서 좀 더 눈을 붙인 후, 태우에게 전화했다. 태우는 집으로 오라 했지만 아직 그곳에서 단둘이 만나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로망스 카페로 이동해 창가 자리에서 아들을 기다렸다. 왜 경찰에 신고하지 못할까. 증거가 없어도 전문가들이 수사하면 좋지 않을까.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많은 사람이 신경 써야 하는 건지 답답했다. 협박당하고 마음 졸이며 사는 것은 화장실에서 뒤처리를 안 하고 나온 기분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엄마!” 태우 말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언제 왔니?” 

  “방금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요즘 너무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나는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 제이라는 사람이 왜 그러는지 느낌이 와요.” 

  “제이? 그 사람이 뭐?” 

  아들은 주변을 둘러본 후 조용히 얘기했다. “그 사람은 여장하고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성적으로 학대했어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수도 없이 나쁜 짓을 했을 거예요. 정민이 말로는 존 김의 딸도 그놈에게 당했고, 피해자가 수도 없을 거라는데. 한국에서는 일산 레인보우에 있는 아이들이 전부 그놈에게 당했을 거라고 했어요. 거기에다 죄를 숨기려 사람까지 죽였으니 이젠 막 나갈 수밖에 없어요. 들킬 바에야 한 사람이건 몇 사람 더 죽이건 차이가 없게 느껴질 거란 말이죠. 그러니 더 위험한 거라 생각해요.” 

  그랬다. 사건은 감당이 안 될 만큼 커지고 있었다. 죄의 무게는 덮을수록 끝도 없이 늘어날 것이다. 

  “그럼 존 김도....” 

  “네. 그래서 죽였을 거예요.” 

  “태우야, 사실 우리는 제이와 연관도 없는데....”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하며 말했다. 

  아들은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근데 벌써 그 사람 눈에는 우리도 똑같은 사람들로 보일 걸요.” 

  “똑같은 사람이라니?” 

  “자기 정체를 아는 사람들. 누구라도,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으면 자기가 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기분이 들지.” 

  순간 켄 사장의 당부를 어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태우에게  비밀을 알리고, 서울에서 제이를 만났던 일에 대해서도 모두 말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레몬이 노출되면 죽는다는 협박이 떠올라 입을 뗄 수 없었다. 불쑥 엄마를 믿어달란 말이 튀어나오려 했다.

  “그래, 아무쪼록 너희는 몸조심해야 한다. 엄마도 도움 줄 사람을 찾아볼게. 정 안 되면 우리 그냥 경찰에 신고해 버리자. 그편이 훨씬 안전할 것 같아. 보는 눈이 많아져야 어떻게 못 할 것 아니니.” 

  “아무튼 몸조심하세요. 누군가 미행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태우가 먼저 일어섰다. 나도 일어서려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표시 제한에 통화 메시지는 간결했다. “100% 일치”라는 기계음이 들리더니, 전화는 바로 끊겼다. DNA 친자 감별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용어였다. 켄 사장의 세계는 ‘일치’와 ‘불일치’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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