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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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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일, 후쿠오카-서울-진해, 최유진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아득히 머나먼 곳에서 아이의 어색한 표정과 하얗고 통통한 작은 손이, 고운 감촉이 떠오른다. 원망하는 그 눈빛을.... 정말이지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보고 싶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후쿠오카의 영화관에서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한국에서 도망치듯 일본으로 건너와 낮에는 미용실에서, 밤에는 전통여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사람들이 예쁘다고 말해 줄 때나 한참 어린 남자들이 작업을 걸어대곤 할 때면, 나 아직 안 죽었어 하는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말 안 해도 외국인임을 알고서 친절하게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사람 등을 수도 없이 만나고 지나쳤다. 근본적으로 일본에서의 내 인생은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비정한 세상에서 신경은 언제나 곤두서 있었고,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물설고 낯설은 이국에서는 그저 이렇게라도 내 몸 하나 건사해 먹고 살 수 있다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매달 나가는 생활비를 빼면 수중에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 나날이 떠오르던 과거도 온종일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잊혀졌다. 그리고 어느새 시간은 지나갔고 그렇게 세월을 버텨 나갔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늦은 밤이었다. 료칸 일을 마치고 마지막 지하철을 타기 위해 자전거에 올랐다.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능숙하게 자전거 페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맞바람이 불어 속도가 나지 않았다.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대로변이 아닌 지름길로 방향을 틀었다. 멀리 역의 가로등 불빛이 우산 아래로 보이기 시작했다. 페달을 악착같이 밟았다. 그때, 사람의 신음 같은 것이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한참을 지나쳤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자전거를 멈추고 말았다. 밤늦은 시각에 여자, 그것도 외국인이 복잡한 일에 끼어드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내부의 경고음이 계속 울렸다. 그런데도 몸은 이미 소리 나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들고 있던 점박이 비닐우산이 뒤집어졌다. 똑바로 고쳐 쓸 겨를도 없이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 틈으로 엉거주춤 발걸음을 옮겼다. 비에 흠뻑 젖은 백발노인 한 명이 땅바닥에 쓰러진 채 말없이 내게 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갑자기 꿈틀대는 그의 손만 크게 보여 너무 놀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핸들을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순간 그가 동정심이란 함정을 파 놓은 연쇄살인범일 수도 야쿠자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멈칫거렸지만 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위를 한 번 돌아본 다음, 살며시 노인에게 다가갔다. 주변은 인기척이 없었다. 휴대폰을 꺼낼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자전거를 골목 사이로 가져와 노인 옆으로 세웠다. 그의 상반신을 일으켜 벽에 비스듬히 기대게 하려 했지만, 비에 젖어 늘어진 몸이 너무 무거웠다. 뒤로 돌아 그의 왼쪽 겨드랑이 아래로 내 머리를 넣어 어깨 위로 그의 팔이 걸쳐지게 한 후 힘껏 일어섰다. 순간 그가 갑자기 팔에 힘을 주며 내 목을 조르고, 칼을 꺼내 위협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다행히 그의 팔은 계속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를 자전거 뒷자리에 엎드리는 자세로 앉혀 그의 가슴이 안장에 고정되게 했다. 뒷머리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핸들 위에 그의 손을 올리고 내 손을 포갠 다음 자전거를 옆에서 끌고 달렸다.        

  천만다행으로 노인은 연쇄살인범도 야쿠자도 아니었다. 그는 후쿠오카에서 살롱형 영화관 세 곳을 운영하는 켄이라는 사업가였다. 그 외의 신상 정보에 대해선 지금도 잘 모른다. 또 그가 무슨 이유로 그곳에서 머리에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나는 성격상 스스로 말하지 않는 것은 일부러 캐묻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아니었다면 자식도 없는 켄의 인생은 비 내리는 어두운 골목에서 조용히 스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인연이 되었던지, 나는 켄의 영화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본점은 후쿠오카의 중심인 하카타역 대로변에, 지점 두 곳은 캐널시티와 텐진 상가에 각각 있었다. 빌딩 사이 자투리 공간에 자리한 초록색 원주 모양의 3층 본점 건물은 하카타역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눈에 띄었다. 1층은 천장이 높은 호텔식 로비가 있고, 그 끝에는 매표소와 작은 매점이 있었다. 옆으로 뫼비우스 같은 하얀색 내부 계단이 회전하며 2층과 3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2층과 3층의 상영관은 각각 200석 규모였지만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관과는 다른 특색이 있었다. 좌석은 고전 방식의 철제의자를 고수했음에도 푹신한 가죽 쿠션이 새로 설치되어 있었고, 맨 뒤쪽에는 다다미로 된 가족석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영화관 내부가 레몬 향기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이 인공 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난 그 레몬 향이 싫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세상에는 희한한 곳이 많다. 직원 중에는 한국어를 잘하는 젊은 여자도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마유미였다. 과연 한국인 손님이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일본까지 와서 일본 영화를 보는 한국 사람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녀는 영화관에서 한 번도 한국어 실력을 발휘해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오랫동안 영화관과 함께 동고동락한 나이 많은 베테랑들이었다. 현장 직원들은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이었다. 청소를 맡은 아주머니 두 분부터 매점의 할머니까지, 모두들 영화관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영화관에서 일하며 애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까지 다 보낸 그런 스토리였다. 나는 점심시간이면 마유미와 함께 도시락을 먹고, 쉬는 시간이면 커피도 마시며 한국 얘기를 하곤 했다. 나이 차가 무색하게 언니 동생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 10년차가 된 지금도 월급은 3백만 원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규칙적으로 일하고 쉬는 생활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일이 고되지 않았고, 보험에 집세와 교통비도 제공되었다. 연휴가 생기면 틈틈이 한국에도 오갔다. 후쿠오카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면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았다. 매달 13일에 뜨는 특가를 자주 이용했다. 한국에 들어갈 때면 진해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 태우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태우의 자폐증이 많이 좋아져 말도 할 수 있고, 정민이라는 또래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켄은 내가 아픈 아들을 두고 일본으로 건너온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조용히 나를 불러 마유미를 아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어떠겠냐는 제안을 했다. 마유미가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고, 한국어도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뜻밖이었지만 근사한 제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태우의 자폐증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좋아졌다 해도, 보통 사람처럼 살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며칠을 고심했지만 어찌 되었건 한 번쯤 만나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유미에게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내 우려와 달리 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밝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성격상, 한 번쯤 예의상 응했을 수 있었다. 그래도 호기심 때문인지 이상하게 적극적이었다. 이후 정민에게 비밀 데이트 프로젝트를 부탁했고, 마유미는 진해에서 태우를 만났다. 잘 되면 좋지만 안 돼도 좋은 경험으로 남으리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모든 일이 내 마음 같지는 않을 것이다. 켄의 한 마디로 인연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마음을 뚫어보고 그 마음을 보듬어주는 켄 사장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화창한 오후 2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리무진을 타고 명동에서 내린 다음, 택시로 장충동에 있는 제시의 집으로 향했다. 오르막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작은 경비초소가 보였고, 한 남자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온화한 표정 속에 매서운 눈빛이 감춰져 있었다. 그를 따라 제시의 집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넓게 펼쳐진 잔디 마당 앞으로 슬라이딩도어가 활짝 열려있는 건물이 보였다. 통창으로 만들어져 내부가 훤히 보이는 개방적 구조였지만 곳곳에 검정 네모상자 같은 방범 장치가 눈에 띄었다. 현관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침울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연녹색 숄을 두른 채, 생기 없는 입술로 인사했다. 나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거실은 넓은 면적에도 아늑하고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일본의 육자 다다미 공간에 구겨져 있던 뻐근한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트림처럼 꺽꺽거리며 올라왔다. 벽난로와 피아노, 고급스러운 소파와 양탄자까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내 인생과는 대비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아빠는 건강한 분이라서 한 번도 그렇게 쓰러지신 적은 없으세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사람도 아니고요.”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했는지, 꼭 범인을 잡았으면 좋겠어요. 연주회 전에 아버지랑 들렀던 카페에서 수상한 남자가 있었거든요. 경찰 조사 때도 분명히 얘기했는데, 아직 말이 없네요.” 

  “어떤 남자요?” 

  “제가 커피숍에 막 들어갔을 때, 존 김의 커피를 잘 못 가져갔다 되돌려 놓은 사람인데, 뭔가 느낌이 그랬어요. 검정 모자를 푹 눌러 쓴 마른 체형의 남자로 기억하는데....” 나는 거실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벽면 가득 학교 음악실에서나 볼 수 있는 고전 음악가들의 사진과 그녀의 연주회 사진,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경찰이 여러 곳의 CCTV 분석 결과를 설명했는데, 연주회장에는 수상한 검정 모자의 남자는 없었다고 했어요. 아빠가 화장실에 들어갔던 그 시간에 화장실을 오간 사람도 전혀 없었고요.” 제시가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갑자기 한 음악가의 사진이 시선에 들어왔고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났다. 

  나는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바흐입니다.” 제시가 말했다. 

  바흐의 가발 같은 머리칼을 보니 문득 그 남자가 떠올랐다. 

  “연주회 전 카페에서 본 검정 모자의 남자는 옆머리에 두피가 짓눌린 자국 같은 것이 길게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도 탈착 가발을 장기간 사용해서 남은 흔적같이 보였는데. 제가 미용사로 오래 일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잘 알아요.” 

  “가발요?”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변했다. 

  “네.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제가 처음 사람을 볼 땐 딱 그 사람의 머리가 눈에 들어오거든요. 그 검정 모자의 남자가 연주회장에 들어갔을 때는 가발을 쓰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럼.... 여장했다는 말씀인가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그 가능성이 더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남자의 여장에 대해 오래도록 얘기했고, 나는 제시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다.  진해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의 당사자인 레인보우 원장이 여장 남자이고, 아동 성도착자라는 것이었다. 생각의 교통정리가 필요했다.       

  제시를 만난 후 곧바로 진해로 내려왔다. 필수 아이템인 크고 둥근 선글라스를 쓰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택시가 산 중턱에 위치한 카페에 도착하자 기사가 거스름돈을 건네며 아는 척을 했다. 

  “저기 성용이....” 

  기사의 옆모습을 보니, 남편의 예전 직장 친구였다.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어색하게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장례식장에 가지 않은 것도 이런 상황처럼 주변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내게 침을 튀기며 떨리는 주먹을 들어 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빨갛게 충혈된 두 눈, 이마에 튀어나온 파란 핏줄, 술 취한 입으로 쏟아내던 비참함이 전신에 느껴졌다. 씻고 오란 단 한 마디와 침대에 밀어붙이며 엉겨 붙던 거센 욕정이 잊히지 않았다. 주변에선 둘도 없는 호인이, 술만 마시면 집에서는 개가 되었다. 어디서 그런 폭력성이 나오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잠든 곳에서도 태우와 재회하고 싶지 않았다. 

  무화과 머핀, 캐러멜 시럽이 들어간 커피를 주문하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제시 집에 있던 바흐 초상화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햇살에 부서지는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슬며시 움트기 시작했다. 15평 남짓한 작은 미용실에서 부대끼던 시간이, 나누었던 말들이, 웃음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남편 친구들과 그들의 아내 그리고 자식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일부러 나를 찾아왔다. 남편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내가 머리를 잘하기 때문인지,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바쁜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돈이 모이지 않았다. 그는 버는 족족 사고를 쳤고, 태우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보다 못했다. 인생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버틸 수가 없었고 살기도 싫었다. 술 취한 머저리 남편과 똥강아지보다 못한 아들을 보고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던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키가 컸고 어깨가 넓었다. 짙은 일자 눈썹에 크고 둥근 눈, 가늘고 섬세한 턱선, 싸움을 많이 하고 다녀서인지 입가나 눈밑에는 늘 반창고 같은 것을 붙이고 다녔고, 손목이나 팔꿈치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곤 했다. 그와 거리를 거닐 때면 낑낑거리며 꼬리를 내리는 치와와 같은 또래들의 눈빛에 우쭐해지곤 했다. 그가 매번 했던 말, “나는 의리 있는 남자야.” 돈도 안 되는 그 말이, 그때는 최고로 멋있게 보였다. 공부는 못했지만 몰려다니는 친구들도 내가 예쁘다고 칭찬 일색이었다. 기타도 잘 쳤고 노래나 춤도 남들보다 잘 춰서 자부심이 하늘에 닿았다. 외할머니 품에서 자라 든든한 버팀목이 없던 내게, 성용은 든든한 아빠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엉성하고 부족해도 알뜰살뜰 행복했던 둘만의 소꿉놀이가 성용이 아프기 시작하고 태우가 태어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태우와 같이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을 정도로 괴로운 생활이 이어졌다. 호인처럼 밖으로만 나돌며, 안에서는 망나니처럼 구는 남편이 아픈 태우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집은 돼지우리 자체였다. 태우는 돼지 소리를 내며 온 방 안에 똥칠을 하며 다녔고, 내가 하는 어떤 말도 알아듣지 못했다.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키워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누구하고도 상담할 수 없었다. 생지옥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뼈 빠지게 일해도 빚만 늘어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날 태우를 베란다에서 밀어버린 이후로 죄책감이라는 멍에에 갇혀 속절없이 떠나버릴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아픈 남편과 마음이 아픈 아들을 둔 채로.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카페로 들어오는 정민의 하얀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항상 깨끗한 운동화를 신고 다니네.” 

  정민은 자기 신발을 내려다본 후 멋쩍게 말했다. “아. 달리기를 좋아해서요. 그냥....” 

  정민이 앉자 비밀 데이트에 대한 아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마유미는 좋았다고 하던데, 태우는 뭐라니?” 

  “태우도 마유미가 예쁘다고 난리입니다.” 정민이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 답례로 정민이한테도 여자 친구 소개시켜 줄까?”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정민이 손사래를 쳤다. “어머님. 혹시 태우를 직접 만나지 않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아버님 장례식에서도 태우가 어머니를 많이 기다리는 것 같아서요. 데이트 건도 비밀로는 하고 있지만 언젠가 알게 될 텐데....”

  나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냥 미안해서 그래. 마음 좀 정리될 때까지 만이라도 비밀로 해 줄래?” 

  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어머님은 일본에서 마유미 씨랑  영화관에서 일하시는 거 맞죠?” 정민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래. 마유미가 한국어도 잘하고 싹싹해서 친하게 지내.”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본 생활은 괜찮으신가요? 저도 한번 가 보고 싶어서요. 아직 외국에 한 번도 안 나가 봤는데, 잘난 척하는 것 같지만 제가 일본어 좀 할 수 있거든요.” 정민은 머그잔을 입에 살짝 갖다 댔다. 

  “그러니? 정민이도 아빠 닮아서 대단하네. 일본도 안 가봤으면서 어떻게 일본어는 또 배웠니? 나는 20년이나 살았는데, 아직도 서툰 티가 많이 나. 일본 생활은.... 외국이라고 별 다른 건 없는 것 같아. 돈과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좋아 보이고 그 반대면 힘든 건 매한가지고.” 

  “네.... 일본어는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서 배웠습니다. 태우한테도 배우라고 할게요. 일본 여자 사귀기 위해서 기본이라고 하면, 틀림없이 배울 거예요.” 

  싱글벙글하는 정민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해 다시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

  잠시 후, 정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꺼냈다. “사실 어머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뭐?” 

  “그 재미 교포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너무 희한해서요.” 

  “아. 존 김. 그게.... 우연히 일본 가는 배 안에서 친해졌지 뭐.” 

  “배 안에서요?” 

  “그래. 일본 가는 배가 돌고래에 부딪혀서 부산으로 회항한 적이 있거든.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식사도 같이 하고 차도 한잔 하면서 친해졌어.” 

  “돌고래가 맺어준 인연이네요?” 

  “돌고래? 그렇게 되는 거네. 불쑥 딸이 피아니스트라면서 서울서 연주회를 한다며 초대하더라고. 사람이 인상도 괜찮아 보이고 얘기해 보니 괜찮더라. 그래서 가게 된 거야. 어떡하다가 그런 사고가 났는지,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무서워.”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정민이 신기한 듯 고개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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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3일, 진해, 윤정민 

 

  문밖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기다리게 하는 게 미안해 서둘러 운동화를 찾았다. 비 오는 날은 666인데, 몇 번을 찾아도 순서대로 있어야 할 자리에 666이 없었다. 할 수 없이 555의 끈을 동여맸다. 회색 후드티를 입은 태우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씩 한번 웃더니, 무릎을 가슴까지 올리며 제자리뛰기를 시작했다. 뒤에 달린 모자가 펄렁거리는데 광고 속 축구선수같이 멋있어 보였다. 

  “태우야, 일찍 왔네.” 

  “방금 왔어.” 

  “다음 주에 마유미 만나러 일본 가지?” 

  “어!” 행복한 얼굴이다. 

  “자식 좋겠다. 나는 언제 데이트 한 번 해 보냐.” 

  “너도 일본 여자 소개시켜 줄게.” 태우는 신이 나서 말했다. 운동화 징크스 때문인지 오늘따라 뛰는 데 힘이 들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달려 나갔다. 함께 달리던 리듬이 무너져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해안도로 반환점이 다가오자 속력을 늦추며 그가 크게 외쳤다. 

  “어디 아파?” 

  “아니,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네. 내가 찾는 운동화가 없어서 그런가.” 나는 손으로 운동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운동화?”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되돌아오며 말했다. 

  “내가 매일 똑같은 운동화를 신는데, 사실 그 운동화가 나한텐 전부 다른 거 거든. 운동화마다 끈에 고유 숫자를 적어놓고 날씨 따라 기분 따라 골라 신는 거야. 오늘처럼 가랑비가 내리는 날은 666을 신는다든지. 근데 오늘은 666을 아무리 찾아봐도... 아버지가 치웠는지 없더라고.”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이어서 말했다. “그때 장복산에서 잃어버렸던 운동화는 화창한 날에 신는 999고.” 

  내 말을 듣고 있던 태우의 표정이 굳어졌고 이상한 느낌에 그의 팔을 살짝 만지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 666이란 숫자, 저번에 본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내 666 운동화를 봤다고?” 

  “그래. 저번에 경찰이 나한테 666을 보여 줬어.” 

  “너한테? 경찰이 그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잃어버린 신발은 틀림없이 999고, 아버지가 참고로 경찰에 제출한 신발도 나머지 999 한 짝인데. 이것 봐.” 

  나는 쭈그리고 앉아 신발 첫 번째 끈을 뒤집었다. 

  “보이지? 이 숫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숫자에 관해 얘기한 적도 없고, 이렇게 끈을 뒤집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숫자가 적혀 있는지도 모를 거야. 경찰이 네게 이렇게 끈을 뒤집어서 666이라고 보여줬다는 말이지?” 

  “그래. 분명히 봤어. 신기해서 기억하고 있는 거야.”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해 우리는 속력을 내다 남원로터리 근처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따뜻한 캔 커피를 2개 사서 처마가 길게 늘어진 삼계탕 가게 입구에 쪼그려 앉았다. 

  “평소 속도로 달렸으면 비도 많이 안 맞았을 텐데, 미안하다.”

  “아니야. 그럴 때도 있지.” 

  “네 말대로 경찰이 보관하고 있는 신발이 666이라면, 내가 진짜 잃어버렸던 신발 999와 다른 게 되잖아. 진 형사는 실종 사건 초기부터 내 운동화 얘기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었는데, 최근에 그 운동화가 중요한 핵심증거라는 둥 그러던데. 아버지가 절대 경찰에 신발을 잘못 제출했을 리는 없거든. 만약 아버지가 경찰에 999를 666으로 잘못 제출했다면 집에는 분실하고 남은 999 신발 한 짝과 경찰에 잘못 제출하고 남은 666 한 짝도 있어야 말이 되는데 오늘 보니까 전부 없어. 666 한 짝도, 999 한 짝도.” 

  운동화의 질퍽한 느낌이 싫어 발을 털며 일어서니 무릎에서 뼈  소리가 났다. 태우 말이 사실이라면 진 형사가 666 한 짝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내가 산속에서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은 666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밖에 없었다. 그는 왜 그런 짓을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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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4일~4월 10일, 후쿠오카, 최유진 

 

  하얀 마스크의 무표정한 인파를 헤치고 하카타역을 빠져나왔다. 일본에서도 출근길은 시계추 같은 일상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우에시마 카페에서 흑당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서 광장을 가로질러 빠르게 걸어갔다. 평소 눈길조차 가지 않던 플라워 호텔의 현수막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4시. 다이아몬드 홀. 후원 일본 자폐아 학부모 모임(달팽이 모임). 자폐증 세미나를 연다는 내용이었고, 한국에서 오는 방문객들을 환영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에 비하면 한글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었다. 도쿄나 오사카보다 관광인프라가 적은 이 도시에도 한국 관광객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고, 그것이 한글 마케팅을 촉발한 이유일 것이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아직은 뜨거운 커피를 조금 마셨다. 현수막의 자폐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자폐아의 엄마였고 그것 때문에 돌고 돌다 이 낯선 도시에 오게 된 것 아닌가. 존 김의 딸 제시도 자폐아였다. 자폐라는 병은 무섭게 날 따라다니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 위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국제 자폐아 학부모 모임이라니. 그저 팔자 좋은 사람들의 신선놀음 같은 건 아닐까,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녹색 신호등이 들어오고 귀에 익은 보행신호 음악이 들려왔다. 중간쯤 지났을까,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수치스러운 감정이 토네이도처럼 몰려왔다. 아이를 두고 도망쳤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고 발걸음도 너무 무거웠다. 아이를 죽이려 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도로 한 중앙에서 커피를 놓을 뻔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위해 노력을 한다. 팔자가 찢어지게 좋든, 뒤웅박이든 간에 아이를 때리고 방치하고 야단칠지언정 결국은 상처 난 자기 새끼는 자기가 보듬어 안는다. 그것이 세월의 흐름에도 변치 않는 세상의 순리다. 무표정한 사람들에 휩쓸려가는 한 걸음 한 걸음에 하염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릴 때 다른 아이들의 도시락, 엄마가 손수 싸 준 정성스런 도시락이 떠올랐다. 반찬이라곤 김치만 가득한 할머니의 도시락이 부끄러워 점심때면 매점에서 빵을 사 먹던 기억이 났다. 그런 내가 내 아이에게 따뜻한 도시락 한 번 싸주지 못했다. 그 흔한 컵라면도 비싸다고 먹이질 못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들이 영화관으로 들어온 것은 밤 11시를 지났을 때였다. 마지막 영화가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고, 그들은 세 번째 손님이었다. 팔짱을 낀 모습에서 평범한 커플로 보였지만, 어색한 영어 대화가 자꾸만 귀에 거슬렸다. 오래 사귀지 않은 듯 표정에서는 긴장된 근육의 힘이 느껴졌다. 표를 끊는 남자의 일본어는 자연스러웠다. 옆에 서 있던 여자의 목적은 영화에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흐느적거리는 몸짓과 화장, 졸린 듯 몽롱한 그 눈빛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굳이 이런 영화관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지만 세상에는 특별한 취향의 사람이 존재했다. 나는 그런 타인의 취향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영화관은 그런 이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결국 사건은 영화 시작 후, 5분도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여느 때처럼 마감을 위해 카운트 정리를 시작했다. 한 손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는 순간 갑자기 남자 한 명이 2층에서 내려와 1층 화장실로 급히 달려갔다. 경험상 상영 5분 후에 화장실에 갈 확률은 매우 낮았다. 굳이 있다면 둘 중 하나였다. 미리 가는 것을 잊었거나, 갑자기 배가 아플 때. 후자일 것으로 확신했다. 남자가 몸을 꼬며 다급히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더 희한한 일은 잠시 후 발생했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온 직후 영화관을 뛰쳐나가 버린 것이었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조용히 상영관 안으로 여직원이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황급히 날 호출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 여자가 의자 앞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몽롱한 눈빛의 그 여자였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맥박은 뛰고 있었고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술 냄새가 났고 잠든 것처럼 보였다. 소지품도 보이지 않고 일행이었던 남자도 사라져 신고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응급조치가 급했다. 다른 손님들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신속하게 행동했다. 몸을 일으키자 무엇인가가 옆으로 떨어졌다. 가발이었다. 나는 그것을 다시 그녀 머리에 능숙하게 씌운 후, 그녀를 업고 상영관을 나왔고 병원에 전화를 걸어 근처 응급실로 신속하게 데려갔다.  

  다행히 응급실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몽롱했던 눈빛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병원 측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약물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애매한 설명만을 반복했다. 그녀에게 경찰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얘기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자신은 플라워 호텔에 묵고 있으며 한국에서 세미나 참석차 왔고, 세미나가 끝난 후 호텔 근처 큐피드 바에서 우연히 남자를 만나 술을 한잔 했으며, 의심이 많아 화장실에 다녀온 이후로 술잔을 바꿔치기했다고 말했다. 이후 남자의 제안에 따라 영화관에 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을 잃고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경찰 신고는 손사래까지 치며 한사코 만류했다. 여권 등 중요 소지품은 전부 호텔에 있고 분실한 것은 지갑 속 소액의 현금과 신분증 정도기에 외국에서 번거로운 일을 벌이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며 한국 사람이니 언제든지 필요하면 연락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와 계속 한국어로 말을 했음에도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는 듯했다. 틀림없이 반가운 모습은 아니었다. 내가 본 것은 그녀 속의 남자였지만, 그녀는 끝까지 여자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일본에서 그런 사람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기에, 취향이려니 생각했다. 그래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밤늦게 발생했던 일로 아침 출근길은 더 피곤했지만, 오늘은 아들이 일본에 오는 날이라 인수인계를 마치는 내내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마유미를 지켜봤기 때문에 그녀라면 아들에게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마음이 아픈 아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마유미 같은 사람이 아닐까. 태우가 사랑하는 반려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도 진심으로 태우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번의 만남으로만 끝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기가 안 났지만, 마유미를 핑계로 태우는 일본에서 만나는 것이 좋을 것만 같았다. 

  지저분하진 않아도 꼼꼼히 집안 물건들을 매만지고 먼지도 없는 곳들을 물걸레로 한 번 더 닦아냈다. 냉장고를 열어 오코노미야키 요리를 위해 준비해 놓은 양배추를 썰고 돼지고기를 볶았다.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를 좋아할지 걱정이 앞섰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현지 음식이라 대안이라곤 없었다. 한 끼 정도는 꼭 손수 차려 먹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완성된 오코노미야키는 아침에 데워 먹을 수 있도록 접시에 예쁘게 올려 팽팽하게 랩으로 덮었다. 설거지 중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영화관이었다. 상영관에서 여장 남자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텅 빈 빨간 장지갑과 신분증이었다. 나는 영화관으로 가서 그 사람의 분실물을 가방 속에 넣었다. 신분증 속 그는 또렷한 눈으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제이 김. 재미 교포였다.


  텐진역 쇼핑센터 1층에 위치한 도토루 커피. 아들과 만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입술이 마르고 초조했다. 죄책감인지, 설렘인지, 반가움인지도 모를 감정의 시소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눈치 빠른 마유미가 계속 말을 걸어주며 진정시켰지만, 긴장해서인지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했다. 문이 열리고 태우가 모델처럼 긴 팔을 흔들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가 기억하는 태우는 그곳에 없었다.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만들던 천방지축의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큰 키에, 짙은 일자 눈썹, 날렵한 턱선과 하얀 피부. 내 아들이란 생각에 가슴이 벅차고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나는 아들과 20년 만에 일본에서 재회했다. 

  마유미는 태우를 오래 사귄 남자 친구처럼 대했고, 태우도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가 싫지 않은 듯, 연신 입가에 웃음이 만발했다. 나는 태우의 설렘이 나와의 재회로 어색해질까 두려워 옛날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커피도 마시고 쇼핑을 했다. 저녁에는 함께 회전초밥을 먹었다. 일본이 처음이라 그런지 태우는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어린아이처럼 신기해 했다. 187센티의 건장한 체격에 멋진 스타일은 거리에서 단연 돋보였고, 마유미는 태우를 향해 쏟아지는 여자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문득 남편의 팔짱을 끼고 시내를 배회하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라 쓴웃음이 나왔다.  


  “태우야, 데이트하러 왔는데 엄마가 불쑥 나타나서 미안해.” 아들의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태우는 집 안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우리 아들 진짜 멋지더라. 아까 네가 카페로 딱 들어올 때 놀랬어. 주변 여자들이 다 쳐다보던데. 마유미가 질투하겠더라.” 

  태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우리 아들 생각 많이 했고 소식도 가끔 들었는데 만날 용기가 안 나더라. 자신도 없고. 아빠 돌아가셨을 때도 가려고 했는데 아는 사람들도 많이 오고 또 거기서 너를 만나기가....” 

  “엄마 진짜 괜찮아요. 이해해요.” 

  “우리 태우,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하게 되었니. 엄마 너무 미워하지 마라. 나는 그거면 된다.”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갈아입을 옷은?” 

  “저기.” 태우는 현관 앞에 둔 캐리어를 가지러 갔다. 

  “여기, 수건하고 있으니까 씻고 엄마하고 맥주 한잔할까?” 

  태우는 캐리어에서 꺼낸 옷가지와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태우야, 마유미 좋냐? 나중에 마유미랑 엄마랑 같이 일본에서 살까?” 캔 맥주를 태우 앞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저는 생선 가게가 있어서요.” 태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엄마하고 마유미가 진해가서 살면 되겠네.” 

  태우가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태우가 많이 좋아진 게 정민이 아빠 덕분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그 친구 잘 해줘야겠다.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아빠가 교도소 있을 때부터 계속 치료해 주고 돌봐 주고 그랬다고 들었다. 돈도 안 받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지. 정말 하늘이 도왔다.” 

  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이도 좋은 사람 있으면 꼭 소개해 줘야겠다.” 

  “네! 정민이도 일본 여자 소개시켜 주면 좋겠어요.” 태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외쳤고,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왜요?” 

  “그냥 너희들이 너무 귀여워서. 엄마는 태우와 정민이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정말 고마운 사람들 아니냐.” 

  갑자기 태우가 식탁 모서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빨간 장지갑 위에 놓인 신분증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했다. 

  “왜? 아는 사람이니?? 잘 못 본 거는 아니고?” 

  “네. 제이 김. 실종된 레인보우 원장 남동생 같아요.” 

  “레인보우?” 

  “네. 정민이가 다녔던 일산의 치료 학원인데요.” 

  “그래.... 들어본 것 같아.” 

  맥주의 취기가 도는 듯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진해에서 실종되었다는 레인보우 원장의 남동생이었다. 태우는 내게 실종 사건에 대해 밤늦도록 얘기했다. 정민과 제시의 말을 종합해 볼 때, 그 사건이 제시의 연주회장에서 발생했던 일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젯밤 영화관에서 봤던 가발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왠지 그에게 먼저 연락이 오기 전까지 분실물을 보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피곤했던지 다음 날 늦게 일어난 태우와 전날 준비해 놓은 오코노미야키를 맛있게 먹고 후쿠오카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들과 함께 하는 외출이었지만, 백마 탄 왕자를 만난 소녀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잘 다녀왔냐는 인사조차 없이 빙글빙글 돌며 괴성만 지르던 꼬마.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엄마라고 말하지 못했던 꼬마. 스스로 화장실도 못 가던 그 꼬마가 기적처럼 멋진 청년으로 변해 버렸다. 두꺼비의 저주가 풀려버린 동화 나라의 왕자님처럼 아들이 멋있게 보였다. 중간중간 그날 봄 태우를 밀쳤던 기억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라도 그날 베란다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억하는 건 아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어색한 그 얼굴이 계속 아른거렸다. 태우는 피규어에 관심이 많았고, 돈코츠 라멘을 좋아했다. 나는 로프트에서 태우에게 가죽 백 팩을 하나 선물했고 태우는 행복한 시간을 내게 선물했다. 일본에서 지냈던 지난 20년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태우는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저번에 병원에 실려 갔었던 한국 손님한테 연락은 왔나?” 켄은 영화관 문을 열며 크게 말했다. 

  “아니, 이후로 연락이 없네요.” 

  “사람이 그렇게 간사한 거야. 전부 내 마음 같진 않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 켄은 잔기침을 몇 번 하면서 다시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의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매표소 한 귀퉁이 사무실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실종된 레인보우 원장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재미 교포. 자폐 치료 전문가. 진해에서 실종.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사진 속 원장의 모습과 영화관에서 쓰러져 있던 여장 남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진 속 원장의 헤어스타일은 제이 김의 가발과 비슷했고 두상과 귀 모양을 보니 나름대로 확신이 들었다. 존 김 사망 사건에 대해서도 검색했다. 재미 교포 존 김. 딸의 연주회장에서 의문의 죽음. 급성 심장마비로 추정.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쓰러져 있던 짧은 머리의 여장 남자 제이 김. 그녀가 만약 실종된 레인보우 원장 행세를 하며 살았다면.... 실종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검색창을 내리고 컴퓨터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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