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머즈 Oct 08. 2024

43

  43 


2018년 4월 22일, 진해-서울, 윤정민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그에게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병상으로 다가가자 그는 번호 하나가 적힌 쭈글쭈글한 쪽지 하나를 건넸다. 존 김의 딸, 제시 연락처였다. 왜 이제야 자신을 후원해 온 사람의 딸과 연결하고 싶은 걸까. 난데없이 지척에 있던 태우를 소개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폭발할 것 같았지만, 알코올 중독자처럼 덜덜거리는 손을 보니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그는 내게 당장 서울로 가서 존 김의 딸을 만나라고 약속 시각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나는 교포의 딸 제시를 만나기 위해 창원역으로 향했다.  

  진 형사는 과거의 원한 때문에 무리하게 아버지를 용의자로 몰아붙였던 것이 미안했을 것이다. 수사 관련 내용을 내게 은근히 브리핑하듯 알려 주고, 변명하듯 잘못되었던 수사 방향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것임을 해명했다. 하지만 그는 사건의 핵심, 실종된 원장이 여장 남자였다는 사실을 모른 채 헛발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 남동생이란 놈이 실종된 원장일 가능성을 원천 배제하니 사건은 변두리로 맴돌고 있는 것이다. 애초부터 모텔에서 실종된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창밖으로 비가 세차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장복산에서 만났던 여자가 그 원장 놈일까. 여장에 능한 놈이라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운동화 한 짝을 굳이 집 앞에 가져다 놓을 이유는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다. 나를, 아버지를, 잘 알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바로 내가 장복산에서 만났던 그 여자라는 얘기가 된다.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단 한 사람. 트럭 운전사, 그 여자부터 알아내야 한다. 그 여자가 트럭을 타고 운동화를 집 앞에 갖다 놓았다. 그 여자는 왜 그 시간에 장복산에 있었을까. 나를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에 꼬리를 물다 보니 갑자기 머릿속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여자는 게스트 모텔에 묵고 있던 레인보우 원장 때문에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만약 그 여자가 원장을 납치하고 모든 증거를 삭제했다는 가정이 성립하려면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는 P2실 사람도 제거했어야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원장 행세를 했던 원장의 남동생이 없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놈은 버젓이 진해에 내려와 있다. 사건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오랫동안 재미 교포 존 김이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하긴 했다. 그의 딸이 일산에서 치료를 받았다면 낯이 익을까. 피아노를 친다고 했는데.... 자폐증에 피아노라면 천재가 아닐까. 온갖 잡념들이 객차 안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시간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겼던지 서울역에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고,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저마다의 일정대로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에 휩쓸려 나도 에스컬레이터에 올랐고, 정신없이 대합실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고 약속 장소인 삼청동으로 향했다. 광화문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올라가던 택시는 우측으로 난 좁고 긴 도로로 방향을 틀었다. 좁은 도로변 양쪽의 오래된 주택들 사이로 세련된 미술관이나 소품이나 옷을 파는 곳, 카페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건너편에 약속 장소가 보였다. 내부에 진열된 그림들이 보이는 통유리의 3층 미술관 카페였다. 벽면에 반듯하게 붙어 있는 그림들을 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창가 쪽에서 그녀가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처럼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정민입니다.” 어색한 만남이었다. 

  “반가워요. 제시 김입니다.” 그녀는 명함을 내밀었다. 

  두툼하고 반짝이는 베이지색 재질에 피아니스트라는 글자가 만져졌고 주소 부분에 NY라는 알파벳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네? 아.... 아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예전 기억을 못 합니다.” 

  “아빠한테 들어서 알고 있어요. 예전에 스키 타다가 다른 사람하고 머리를 부딪친 적이 있었는데, 정말 그때, 바로 몇 시간 전의 일도 기억 안 났었거든요. 무서웠어요.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정민 씨 마음이 이해돼요. 우리 일산에서 같이 달리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거짓말이라도 깜빡 속을 것만 같았다.  

  “윤 선생님이 제가 서울 온 걸 알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랬군요. 서울은 자주 오시나요?” 

  “최근엔 거의 못 왔어요. 이번에는 연주회 일정이 있어서.” 

  “그랬군요. 숙소는 괜찮으신가요?” 

  “장충동에 집이 있어요. 예전부터 서울 올 때는 거기서 지내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아파서 그랬는지 아빠랑 거의 함께 다녔는데, 오히려 괜찮아지고 나서는 아빠를 거의 못 보고 있어요.” 

  그녀의 한국어는 자연스러웠다. 

  “한국어를 잘하시네요.” 

  “아빠는 제가 미국에서 치료 받을 때도, 영어 말고 한국어 할 수 있는 선생님에게 먼저 치료 받게 했었지요. 말이 느렸지만, 어떻게든 한국어를 먼저 가르치려는 집착이 강했어요. 정말 이해가 안 되긴 했지만, 어쨌든 덕분에 제가 이렇게 한국어를 잘하잖아요?” 그녀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빠가 한국에 사업차 들를 때면, 가족이 전부 한국에서 몇 달씩 함께 지내다 미국에 돌아가곤 했었는데, 그때가 너무 행복했어요. 호수공원에서 윤 선생님과 수업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정민 씨하고 노는 것도 좋았지요.” 

  살굿빛 가득한 눈에 고개를 살짝 틀어 말하는 모습이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나는 아래층에 내려가 커피를 주문하고 올라왔다.  

  “아빠가 윤 선생님 자랑하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그때 정민 씨가 많이 좋아진 상태였고 저는 아직 말을 잘하던 상태는 아니었거든요. 아빠는 미국에서도 정민 씨처럼 좋아지는 케이스는 드물다고 종종 말씀했어요. 보통 조기 치료하면 회복이 잘 되지만 정민 씨 같은 경우는 뒤늦게 회복된 경우라. 저한테는 뭐랄까. 롤 모델 이었지요.” 그녀는 회상하는 눈빛으로 찻잔을 보며 말했다. 

  “그럼, 제시도 저희 아버지 치료가 도움이 되었단 얘기인가요?” 

  “당연하죠. 선생님은 응용행동분석법을 기본으로 했지만, 독자적으로 이것저것 응용했다고 들었어요. 운동요법을 특별히 강화했고요. 일산에 가면 종일 밖에서 뛰어놀았던 것 같아요. 당연히 전 좋았지만요.” 

  “운동이 좋다는 얘기는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뇌를 운동장 바닥에 깔린 전구에 비유하곤 했어요. 뉴런이라는 뇌의 신경세포들은 운동장 바닥에 수십억 개의 백열전구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죠. 중요한 점은 그 백열전구가 아주 단순해서 불이 들어오거나 꺼지거나 둘 중 하나지, 희미한 것은 없다면서 전구에 불이 빠르게, 많이 켜질수록 운동장이 밝게 되고 그게 뇌의 회전이 잘 된다고 보면 되는데, 전구마다 연결된 선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지요. 우리 몸의 오감이 전부 전구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오감을 발달시키는 것이 뇌를 발달시키는 데 중요하고, 그것의 핵심은 운동이다. 뭐 그런 얘기를 자주 하곤 했지요. 특히 어릴 때일수록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 

  “운동이 머리도 발달시킨다는 얘기네요.” 

  “그런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피아노를 치지만, 어쩌면 운동선수로 진로가 바뀌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그 뭐지.... 맞다 저글링. 그건 제가 제일 잘했을걸요.” 그녀는 크게 웃었다. 뭔가 속 깊이 담아둔 말의 여운이 비쳤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고, 나는 한 모금 입가에 머금으며 천천히 목을 축였다.      

  “윤 선생님께 전화를 받았는데, 불쑥 예전에 미국에서 한국 여자한테 수업을 받은 적이 있냐고 물어봤어요. 몸이 불편한지 목소리도 작고 더듬거리시더라고요. 제가 있다고 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그건 왜?” 

  “혹시 나쁜 일이 있었던지, 그것만 얘기해 달라고 했어요.” 

  “나쁜 일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머리칼을 손으로 넘기며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어색한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정민이도 비슷한 일을 겪어서 그런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빨리 둘이 만나서 얘기해 보라고. 아빠하고 연락도 안 되고, 자신이 몸이 불편해서 움직이기도 힘들어서 그런다고.” 

  아버지는 존 김과 연락이 안 돼서, 나와 그녀를 만나게 한 것이었다. 

  “사실 정민 씨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단 말을 듣곤 정말 놀랐죠. 혹시 기억이 나세요?” 

  나는 그 나쁜 일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를 챘다. 그 일은 분명히 내 기억에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그놈을 기억한 것을 눈치챘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고 그놈이 제시에게 악마 짓을 했다면 빠져 있던 하나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이었다. 

  “기억납니다. 여장했던 남자입니다.”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장복산 사건을 상세히 설명했고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스토리에 집중했다. 세 시간이 넘어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그녀를 삼청동의 좁은 도로 끝까지 배웅했다. 택시에 오르는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지만, 차창에 비치는 내 표정은 더 침울했다. 나는 걸어서 경복궁까지 나왔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과 섞여서 돌담길을 걸었다. 마지막 퍼즐은 존 김밖에 없었다. 그가 원장을 죽이려 했을 것이다. 내가 장복산에서 만났던 여자는, 그가 사주한 킬러였을 것이다. 광화문 광장을 지나쳐 반디앤루니스 서점에 들렀다. 서울에 머물던 예전 생각에 책 몇 권을 펼쳐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만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불안했다. 나는 서점을 나와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44 


2018년 4월 23일~25일, 서울, 존 김 

 

  인천공항의 입국 게이트가 열리자 연예인이라도 된 듯 많은 사람의 눈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가 흩어졌다. 피켓을 들어 올린 여자를 지나칠 때 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제시가 달려와 아기처럼 안겼다. 

  “연주 준비는 잘 돼가니?” 

  “당연히 잘 하고 있죠. 아빠 얼굴 많이 야위었어요. 몸보신하러 가요. 제가 아빠 좋아하는 설렁탕 잘하는 집으로 모실게요.” 

  딸이 팔짱을 끼고 소녀처럼 껑충거렸고 찰랑거리는 머리칼에서 코코넛 향이 났다. 몸보신이란 말을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그르렁거리는 재규어는 목동 오목교역 현대백화점 앞에 멈췄다. 

  “아빠, 여기 진짜 맛있는 집 있어요.” 

  “그래. 고맙구나, 우리 딸.” 

  한우 전문 설렁탕집은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입구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여주인의 기품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룸의 좌석은 다리를 아래로 넣을 수 있었고, 연기는 아래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깔끔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주전자와 컵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고 수저는 하얀 꽃무늬 보 위에 놓인 작은 사기 받침대 위에 사선으로 놓여 있었다. 제시는 설렁탕 하나, 도가니탕 하나, 수육 소짜리를 주문하고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아빠, 어제 윤 선생님 아들이 저를 만나러 왔었어요.” 

  나는 잔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그렇다며. 안 그래도 윤 선생님께 연락이 왔더라. 급한 일이 있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정민이 통해서 제시 만나게 했다고. 연주회 때 다 같이 보기로 했어. 윤 선생님과 정민이도 서울 올라온대. 네가 많이 보고 싶다더구나.” 

  룸에 사람은 없었지만 성진에게 들었던 말을 딸에게 쉽사리 꺼내기가 어려웠다. 제시는 내 마음을 뚫어보는 것처럼 머뭇거리는 나를 대신해 그 얘기를 꺼냈다. 딸이 스스럼없이 말해 버리고 나니 대단한 비밀로 여겨왔던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제시는 진해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에 대해 들었고, 자신은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번 시작한 일, 끝맺음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나는 마음으로만 얘기했다. 성진은 다급히 말했었다. 그놈은 내가 쫓고 있다는 걸 눈치챘고 조만간 나를 노릴 것이다. 실종 사건은 날 확인하기 위한 함정이었고 그놈은 분명히 살아 있다. 원장의 남동생이 바로 실종된 원장행세를 하고 다녔던 놈이니 조심하란 메시지였다. 

  “아빠....” 제시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복수 같은 것 안 해도 돼요. 그 사람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제시.... 그런 인간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미국에서 그러고 또 한국에 들어와서도 얼마나 많은 아이들에게 똑같은 짓을 저질렀니. 내가 신고라도 했더라면, 이렇게 일이 커지지도 않았을 텐데....” 

  “자책 마세요. 그 사람은 아빠를 안다고 윤 선생님이 그랬어요. 아빠가 위험해질 수 있대요.” 

  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진은 그 사실을 알고도 왜 오랫동안 그 악마를 감싸고 있었던 것일까. 무슨 약점이 잡혀 도망치듯 고향에 칩거하며 그놈과 계속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제자들에게, 심지어 자기 아들에게까지 그런 짓을 한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그런 놈과 오랜 시간 무슨 꿍꿍이를 벌였던 것일까. 왜 이제야 그렇게 난리를 친단 말인가.  

  “아빠! 좀 드셔보세요.” 

  제시는 나만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정민은 기억상실로 상처가 덜할지 몰라도, 내 딸은 그 모든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을 당하고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딸아이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빠. 그리고 윤 선생님 집 앞에 운동화 두셨다고 하던데....” 

  “운동화.... 그래. 두고 갔지. 왜?” 

  “그 사람이 아빠 뒤따라와서 다시 가져간 것 같대요.” 

  “뭐? 운동화를?” 그놈이 내 뒤까지 밟았단 말인가..... 


  연주회장 앞 도로는 차들로 가득했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제시가 연주하는 날이면 괜스레 마음이 떨려 징크스처럼 카페에서 더블 샷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직원이 주문 번호를 불렀고, 픽업 테이블로 향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진의 모습이 보여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다가왔다. “일찍 오셨네요.” 

  “네. 딸 연주회 때면 매번 제가 더 설레네요. 뭐 드시겠습니까?” 

  “아니에요. 제가 직접 주문할게요.” 

  그녀가 주문 카운트로 이동했고, 나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픽업 테이블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검정 모자를 눌러쓴 마른 체형의 남자가 커피를 픽업 테이블에 돌려놓더니 문 근처 자리로 이동했다. 걸음이 빨랐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그가 돌려놓은 커피를 들고 그녀와 창가 자리로 이동했다. 카페 창 너머로 감청색 정장을 입은 남자 모습이 비친다. 헝클어진 머리칼 한 올 없이 포마드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충분히 멋있다는 자부심이 든다. 유진이 내 손목에서 빛나는 루비색 커프스 링을 슬쩍 보고 있다. 오늘은 커피 맛이 평소와 다르게 약간 더 시큼하다. 유진은 서울 나들이가 오랜만이라 기대된다며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연주회장으로 향했다. 홀 중앙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딸이 방문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결혼식장에 들어선 신부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긴 목에 둥글고 부드러운 어깨선을 보니 발레를 했던 아내 생각이 났다. 자폐증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내는 자신을 똑 닮아 저렇게 예쁜 아이를 다른 곳에 맡겨 버리자고 말했었다. 그저 앞날이 깜깜하다는 이유였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보모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딸과의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아내와 헤어지더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단호히 떠나 버렸다. 그리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딸이 보고 싶다고, 잘못했다고 애원하길 기대했던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누구든 결과를 예단할 수 없기에 얼마든지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제시에게 다가가 유진을 소개했고, 둘은 엄마와 딸처럼 자연스럽게 포옹했다. 제시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커졌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서 반가운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윤성진 부자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제시의 모습에 감동한 듯 성진의 눈빛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의 아들 정민은 스마트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내게 인사했다. 어디에도 자폐증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유진과 정민도 놀라는 얼굴로 아는 척을 했고, 성진도 유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정민은 아직도 장복산에서 마주쳤던 여자가 나라는 사실을 모른 듯했다. 연주회가 끝나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 같았다.    

  홀은 관객으로 가득했고 무대 위에 선 제시의 미소에는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제시가 흐느끼듯 눈을 감고 연주를 시작했고 나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도입부의 물결치는 선율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전율인가 싶더니 갑자기 배 아랫부분에서 기분 나쁜 통증이 느껴졌다. 옆자리의 유진에게 양해를 구한 뒤 몸을 굽혀 홀 밖으로 급히 나왔다. 좌측으로 급히 돌아 화장실로 이어지는 긴 통로부터는 보는 눈이 없어 엉거주춤 걸어갔다. 통로 끝에 다다르자 양쪽으로 남녀 화장실이 나누어져 있었다. 신사 표시 마크를 확인하고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볼일은 끝냈지만 찝찝한 통증이 남아 있어 한 번에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중요한 날에 하필....’ 거울 앞에서 천천히 손을 씻었다. 

  그때, 화장실 안쪽에서 끼익.... 천천히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있었던 것인가. 그런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문소리는 들렸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본능적인 불안감에 살짝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봤다. 검정 운동화가 사자처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침이 넘어갔다. 고개를 살짝 더 들었다. 검정 모자. 순식간에 무엇인가 안면을 감쌌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45 


2018년 4월 26일~2019년 4월 1일, 진해, 윤정민 

 

  존 김은 그날 이후 일어나지 못했다. 성공한 재미 교포가 딸의 한국 연주회에서 급사한 사실은 뉴스를 타고 빠르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태우 엄마와 만나게 된 것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연주회 내내 어리둥절했다. 존 김이 그놈에게 살해 당했다는 의심이 들었지만 수사는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놈은 추적이 가능한 인과관계를 남겨두지 않았다. 연주회장 화장실 통로에는 CCTV가 없었고, 라운지 쪽 CCTV에서 화장실을 오가는 사람들을 모니터링했지만, 연주회 시작 후 존 김이 화장실로 급히 달려간 모습과 중간에 태우 엄마가 전화기를 들고 라운지를 서성거리는 모습만 포착되었을 뿐 연주회 중간에 화장실에 출입한 사람은 없었다. 사건에는 특별한 원한 관계도 없고 강도 흔적도 없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었다. 관객 전수 조사는커녕 무작위 수사도 어려운 듯했다. 우리는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경찰은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존 김의 사인을 원인 미상의 급성 심장마비로 몰아가고 있었다. 제시는 충격 때문인지 존 김의 죽음 후,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안 그래도 쇠약했던 아버지는 충격이 더 큰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후원자이자 친구에게 속내를 터놓고 싶었겠지만 세상사가 늘 그렇듯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동대문의 작은 호텔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이른 아침 기차로 내려왔다. 곤드레밥 정식을 먹고 아버지가 입원중인 병원으로 들어가니 태우 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맞았다. 면도를 막 끝낸 듯 예전과 다르게 턱선은 매끈했고 발목이 드러나는 환자복 대신 스트라이프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하얀 셔츠와 새 구두까지 맞춰서 멋있는 신사처럼 보이긴 했지만 쇠약한 중년 노인을 가리진 못했다. 눈이 내린 머리와 움푹 들어간 눈 밑으로 어두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형님, 교포 소식 들었습니다. 힘내시고 빨리 일어나서 소주 한잔합시다!” 마라톤 완주 직후 가슴에 품어 온 선언문을 단숨에 낭독하고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이 싱거운 말을 하려고 멋지게 차려입고 온 것이었을까....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불행이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언제나 비슷한 친구를 데리고 갔다. 그렇게 아버지의 오랜 후원자도, 친구도 모두 허무하게 떠나가 버렸다.


  태우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요양병원 지하 1층에 있었고, 분위기는 부산한 다른 장례식장과 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지하의 어둡고 스산한 기운이 온몸에 감겨와 등줄기가 오싹했다. 위층과는 다른 세계였다. 태우 아버지의 빈소와 옆에 딸린 방을 제외하고 다른 곳은 모두 불이 꺼져 있어 공포 영화에서 본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전은 택시 기사 동료들이 단체로 다녀갔고, 오후에는 중앙시장 생선 가게 주변 상인들이 다녀갔다. 일산에서 빵집을 하는 박영호 씨 내외와 J 베이커리 사장은 할 말이 많은 듯 상기된 얼굴로 안쪽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상주인 태우를 도와 빈소를 지켰다. 박영호 씨의 얼굴에는 친한 동생을 떠나보낸 착잡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도 고통 없이 갔다고 하니까 다행입니다. 성용이가 배운 거, 가진 거 없었어도 의리가 있는 놈이었지요. 택시 할 때도 승객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그랬어요.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그런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택시 운전사인지 고충 해결사인지 헷갈릴 정도였지요. 어떤 날은 할머니가 탔는데 다리를 절고 있더래요. 이유를 물었더니 오토바이 뺑소니를 당했다고 해서 성용이가 며칠을 수소문해 경찰보다 먼저 잡아냈잖아요. 모범 표창을 받았으면 수십 번을 받고도 남았을 텐데, 그놈의 폭행전과 때문인지 이상하게 한 번도 못 받더라고. 스무 살 때 한 짓을 가지고 끝까지 낙인을 찍고, 세상이 말이야 그러면 안 되는데. 거참.” 박영호 씨는 J 베이커리 사장에게 안타까운 듯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태우 엄마는 왜 코빼기도 안 보이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J 베이커리 사장이 말했다. 

  “여기 오고 싶어도 못 올 겁니다. 그놈은 맨날 남의 일 신경 쓰면서 돌아다니지, 태우는 자폐증으로 아무것도 못하는데 주변에 도와줄 사람 하나 없지. 그 사람도 밥벌이하느라고 미용실에서 힘들게 일하고 얼마나 하루하루가 힘들었을지 이해는 됩니다. 성용이가 옛날에는 이 바닥에서 키 크고 연예인 뺨치게 잘 생겼거든요. 젊었을 때 사진 한번 보세요. 지금 태우 보면 알겠지만, 엄마도 진짜 미인이었어요. 기타 들고 노래하는 모습이 꼭 천사 같았다니까. 이 바닥 남자 중에 그 사람한테 눈 안 돌아간 사람 없었잖아요.... 둘이 고등학교 때 눈이 맞아서. 딱 선남선녀였지. 내가 둘의 연애사는 잘 알아요. 그 미모면 저기 일본에서도 잘 살면서 아들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일본?” 

  J 베이커리 사장이 의아한 듯 박영호 씨에게 고개를 돌렸고 나도 그를 쳐다봤다. 

  “아.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그는 부담스러운 듯 말꼬리를 감췄다. 밤이 늦어지자 모두 돌아갔고 태우도 문상객이 더 찾아오지 않자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방에는 나와 아버지 둘만 남았다. 조용히 구석에서 눈을 감고 있던 아버지가 슬며시 밖으로 나갔고 나도 무심결에 그를 따라 나갔다. 바닷바람이 세게 불었고 찰싹이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멀찌감치 바닷가 앞 벤치에서 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태우의 옆모습이 보였다. 아버지가 옆으로 다가가 태우를 끌어안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상한 장면이었다. 나는 병원 밖에서 그들을 멍하니 지켜보다 돌아오는 그들과 합류해 장례식장으로 들어왔다. 낯익은 사람이 빈소 중앙에 서서, 성용의 웃는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진 형사였다. 그는 태우와 예를 갖춘 후, 등을 벽에 기대고 풀썩 주저앉았다.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 형사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빈 공간을 갈랐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태우와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사랑하는 가족이 갑자기 떠났을 때, 그 기분은 잘 알지요.” 진 형사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고 태우는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 존 김이라는 사람. 알아보니까 서울에서는 그냥 건강 이상으로 급사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정말입니까?” 기가 막혔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뭐가 잡히는 부분이 있어야 수사를 하지. 한국 사람도 아니고. 안 그러겠어요? 한 가지 의심되는 것이 있긴 하지만” 진 형사가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의심이라면?” 나는 진 형사에게 물었다. 

  “한국에서 인연이라고 해 봐야 여기 성진 씨 하고 비즈니스 관련해서 몇 명이 전부인데. 아시다시피 계좌나 통화 조사해 보면 성진 씨가 또 등장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죠?” 

  “그래서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조만간 서울에서 수사 협조 요청을 할 것 같습니다. 장복산 사건과 연계해서 수사를 확대할 것 같아요.” 

  그가 입조심 하라며 당부하던 수사 얘기를 장례식장에서 떠벌리고 있었다. 마치 수사본부에서 사건 브리핑하러 급히 방문한 것 같았다. 또 아버지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것인가.... 태우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아버지와 나는 그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진 형사도 그 이상 사건 얘기는 하지 않았고 다시 보자는 여운을 남긴 채 사라졌다. 태우가 기다리던 사람은 발인 때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장례식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열병처럼 잊혀졌다.  


  눈을 떴다. 간단히 씻은 후 밖으로 나오니 태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달린 지도 어언 1년은 지난 것 같았다. 천천히 로터리를 돌아 해군사관학교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달콤한 솜사탕 향이 코끝을 스쳤다. 

  “태우야, 예쁜 여자 친구 소개해 줄까?” 장난치듯 얘기했다. 

  “정말?” 태우는 스타카토 말투로 기대하는 듯 대답했다. 

  “대신 너도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나는 능청스럽게 본심을 드러내며 운을 띄웠다. 

  “뭔데?” 

  여자 이야기를 꺼낸 이후, 태우는 목만 옆으로 돌린 채 뛰고 있었다. 머리와 몸통이 따로 노는 로봇 같아 웃음이 나왔다. 

  “운전 좀 가르쳐 주라.” 

  “문제없어! 오케이!” 

  태우는 신이 난 듯 갑자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속천 바닷가 해변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는 생각보다 잘 뛰었고, 오랫동안 달리기를 했던 나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참던 숨을 내뱉으며 태우가 물었다. “여자. 누군데?” 

  “짜식.... 궁금했냐? 바다를 건너온 사람.” 

  단번에 말해 줄 수 없다는 듯 뜸을 들였다. 태우는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 질문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여자 친구 얘기에는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해변 도로 끝에서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요양병원 앞을 지날 때, 태우가 또다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바다? 어디?” 뛰는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참.... 현해탄!” 나는 장난치듯 그를 살짝 밀쳤다. 

  “대한해협?” 

  “그래 맞다. 대한해협!” 

  종점이 다가왔다. 해군사관학교 앞 남원로터리를 지나 중원로터리까지 뻗은 직선 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렸다. 달리기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매일 같은 길을 같은 시간에 달려도 다르게 느끼는 기분.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새롭게 변주되는 인생의 설렘이자 향연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로터리 풀밭에 주저앉았다. 4월의 도시 중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았다.

  화창한 일요일 아침 8시부터, 나는 태우의 은색 쎄라토를 탔다. 차도 많지 않고 방사선으로 가지런히 뻗은 시내의 도로는 운전 연습에 적당했다. 북원로터리에서 중원로터리를 지나 남원로터리까지, 3개의 로터리를 차례로 돌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태우 넌 아버지가 베스트 드라이버라서 너도 운전 잘하는 거 아니냐?” 신호대기 중에 긴장을 풀며 물었다. 

  “그래 아버지는 만년 무사고였고, 나도 무사고니까.” 태우가 정면을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신호가 바뀌자 다시 출발했고 똑같은 코스로 몇 바퀴를 반복하다 운동장 뒤편 도로를 따라 올라가 한 초등학교 뒤편에 차를 세웠다. 키 큰 소나무 숲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차창을 활짝 열고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가자 우측에 높이별로 나란히 서 있는 철봉이 보였다. 이젠 제일 높은 것도 장난감처럼 낮아 보였다. 우리는 작은 벤치에 앉았다. 정면으로 키 낮은 단상이 보였고, 긴 국기봉 위로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떨리냐?” 고개를 돌려 태우를 보며 말했다. 

  “조금.” 그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태우야, 너는 그 스타카토 발음만 아니면 진짜 연예인 해도 되겠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앞으로 인기 유지하려면 되도록 그 입 꼭 다물고 있어라.” 나는 웃기 시작하는 그를 놀리며 말했다.


  운전 연습 후 동네 목욕탕에 들렀다 한 건물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간 것은 오후 1시쯤이었다. 3층 이탈리안 레스토랑 내부로 들어서자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에 배가 꼬르륵거렸다. 둥근 모서리의 원목 테이블들이 여유 있게 거리를 두고 있었고, 테이블 중앙엔 하얀 꽃이 소담스럽게 담긴 청색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에어컨이 놓여진 구석 끝자리에 긴 생머리를 오른쪽으로 땋아 내린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복권을 맞추는 두근거림을 안고 맞은편으로 가 그녀와 인사했다. 한눈에 들어오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나름 귀여웠다. 태우는 얼굴이 붉어지며 그녀와 시선조차 맞추지 못했다. 해물크림파스타, 하와이언샐러드와 콤비네이션피자를 주문했다. 서먹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나는 게임 하나를 제안했다. 미리 준비했던 것은 아니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저기, 두 분 한국어 발음이 막상막하일 것 같은데요. 자 그럼 저 따라 한번 해 보세요.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태우부터 시작!” 

  태우는 머뭇거리며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멀뚱거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오호, 좋습니다. 다음은 마유미 씨.” 

  그녀는 수줍은 듯 귀까지 빨개지더니 입가에 손을 대고 천천히 발음하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와, 두 분 다 굉장합니다.” 

  마유미의 한국어 발음은 자연스럽게 들렸다. 썰렁한 게임에도 금방 분위기가 밝아졌고, 우리는 차례대로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마유미 씨, 어제 도착하셨어요?” 

  “네! 어제 배 타고 부산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녀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시간은 얼마나 걸렸어요?” 이번에는 태우가 궁금한 듯 묻기 시작했다. 

  “후쿠오카 부산은 배로 3시간, 부산 진해는 버스로 좀 많이 걸렸어요. 막혀서 그런지.”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태우의 갸름한 턱선을 보고 있었다. 

  “마유미 씨는 태우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 오늘은 제가 주선자로 염치없게 자리를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평소 하루동안 할 말을 전부 쏟아낼 것처럼 나는 수다스럽게 말잔치를 이어갔다. 피자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슬쩍 보니, 그녀가 빨대를 씹고 있었다. 

  “태우 씨는 무슨 일 하시나요?” 

  태우는 바닥 긁는 소리를 내며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생선 가게 합니다.” 

  그의 스타카토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조금씩 작아졌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태우가 손재주가 좋아서 생선 가게가 잘 됩니다. 시장 사람들 사이에 인기도 좋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태우도 마유미 씨한테 궁금한 거 있으면....” 

  나는 어색한 사회를 계속 진행했다. 

  “무슨 일 하시나요?” 태우는 핀으로 고정한 그녀의 이맛머리를 보고 있었다. 

  “영화관에서 일합니다.” 

  “영화 만드는 회사요?” 내가 되물었다. 

  “아니요, 영화를 보는 영화관입니다.” 

  그녀의 말에 영화를 좋아하는 태우가 얼빠진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이번 만남에 그의 어머니가 끼어 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야 했다. 마유미 또한 동일한 부탁을 받았을 것이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연분홍 꽃잎들이 꽃비를 뿌리고 있었다. 마유미가 손바닥을 위로 살짝 들어 올리며 앙증맞은 포즈를 취했다. 

  “일본도 이제 벚꽃이 한창인데 이곳도 벚꽃이 참 예쁘네요.” 

  “네 그렇죠? 음.... 그럼 제가 좀 아는 척을 할게요. 이곳 진해는 4월의 도시, 벚꽃의 도시죠. 제주산 왕벚나무가 38만 그루나 있어요. 무려 38만 그루니 이곳에 사는 19만 명 양손에 벚나무가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네요. 그래서 일본처럼 벚꽃이 많이 핀 공원을 찾아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도시락 까먹으며 가만히 구경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그냥 돌아다니면 됩니다. 천지가 다 벚꽃이니까요. 예쁜 눈을 감고 잠들어 있다가 벚꽃 잎 하나에 눈을 뜬 공주 같은 느낌. 딱 그런 이미지의 도시죠.....” 나는 살며시 벚나무를 만지며 말했다. 태우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멈칫거렸다. 

  “태우야, 그러지 말고 궁금한 거 있으면 마유미 씨한테 좀 물어봐. 멀리서 오셨는데.” 나는 태우를 슬쩍 밀쳤다. 그는 과장되게 비틀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한국말 정말 잘하네요!” 

  “아니에요. 계속 공부하다 보니 조금 하게 되었어요. 사실 한국 영화를 좋아해서....” 

  그녀의 수줍은 미소에서, 하얀 덧니와 작은 보조개에서 푸른 바다의 산호초가 연상되었다. 그녀를 가운데 두고 우리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양옆으로 갈라져 걸어갔다. 그녀의 호감이 흩날리는 벚꽃 잎을 타고 태우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기분 좋은 첫 만남 후 그녀는 오후 늦게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이전 14화 4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