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머즈 Oct 08. 2024

40

  40 


2018년 봄, 진해, 존 김 

 

  일산을 오가며 본격적으로 레인보우 원장의 뒷조사를 했고, 틈만 나면 원장의 뒤를 밟았다. 원장과 악마 놈은 재미 교포와 자폐 전문가라는 확실한 공통분모가 있었다. 딱 이거라고 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지만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윤성진이 낙향한 이후로도 원장은 주기적으로 그를 만나고 있었다. 윤성진에게 딸의 상담을 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레인보우 원장을 만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물어보지 않았다. 

  켄은 아직까지 악마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여장에 타고난 놈이지만 답답했다. 얼굴을 직접 본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따스한 봄날, 원장이 진해로 향했고 나는 그녀를 쫓았다. 의심을 피하려고 구매한 중고 검정 그랜저는 그럭저럭 탈 만했다. 5시간을 넘게 달려와 창원과 진해를 연결하는 안민터널의 어둠을 벗어나자 꼭 매었던 눈가리개를 단번에 풀어버린 것처럼 화사한 연분홍 세상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구 시내의 중심으로 향하던 원장의 디스커버리가 중원로터리를 돌아 해군사관학교 방향으로 내려가더니 갑자기 우회전하며 모퉁이의 2층 주택 앞에 멈췄다. 나는 디스커버리를 지나쳐 다음 블록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녀의 목적지는 윤성진의 학원이었다. 켄의 전문가들이 보내 준 미행 사진이 눈에 익어서인지 친숙한 동네처럼 느껴졌다. 시나리오대로라면 원장은 이곳에서 두 시간 정도 머물 것이고, 그 후로 장복산에 위치한 게스트 모텔로 가던지, 일산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다 학원 맞은편에 있는 빵집으로 들어갔다. 황금빛 조명에 맛있는 빵들이 반짝이며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었고 분위기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치킨 할라피뇨 바게트와 에스프레소 1잔을 받아들고 2층 테라스로 갔다. 오래된 건물이라 한 발씩 옮길 때마다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테라스에 나가니 포근한 햇살을 받으며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맞은편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학원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도시는 고즈넉했다. 오래된 일본식 목조건물과 낮은 주택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고택의 나무 벽이 결을 따라 곳곳에 뜯어진 흔적이 보였다. 성진의 학원은 상호도 보이지 않고 미닫이 유리로 된 출입문은 낡고 초라했다. 왜 윤성진과 원장은 만나는 걸까.... 어떤 이유가 있던 악마 냄새를 풍기는 사람과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이 먼 길을 직접 운전하고 와서 잠깐 머물다 돌아간다.... 원장의 행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맞은편 젊은 남자의 하얀색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빵도 제법 맛있고 커피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잠깐 돌리는 사이, 원장이 성진의 학원 문을 닫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빨랐다. 머뭇거릴 틈도 없이 원장은 빵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나무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선글라스를 쓴 원장이 테라스를 향해 다가오더니 대각선 방향 테이블에 앉았다. 청바지에 검정 트렌치코트를 입고 얇은 베이지색 꽃무늬 머플러 차림이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이마 뒤로 넘기고 몇 번이고 매만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짙은 선글라스 뒤로 번뜩이는 눈길이 느껴졌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테이블 가장자리에 올려놓은 채 파이를 한 번씩 베어 먹을 때마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커피를 마셨다. 휴대폰 줄에 매달려 테이블 아래로 흔들리는 은색 작은 액세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대학생과 나 그리고 원장이 삼각형을 그리며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빵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만약 저 원장이 그 악마 놈이 맞다면 당연히 날 알아볼 것이고 짙은 선글라스 속에서 비웃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청스럽게 모른 척하며 원장의 모습을 살폈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관찰해도 긴가민가한 놈을 켄의 전문가라고 찾아낼 수 있을지 회의가 들었다. 사립 탐정이나 심부름센터는 더더욱 신뢰할 수 없었다. 원장은 주로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내 생활권인 뉴욕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원장의 남동생 정보도 전혀 얻을 수가 없다. 책에 집중하고 있는 운동화 청년도 어디선가 본 듯 낯이 익었다. 갑자기 그녀가 파이를 반쯤 남긴 채 일어서더니 자리를 떠났다. 나도 슬며시 일어나 그녀를 뒤따라갔다. 디스커버리는 그길로 일산으로 돌아갔고 나도 똑같은 길로 돌아갔다.


  시간이 지나도 원장에 대해 특별히 알아낸 사실이 없었다. 켄의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의 디스커버리가 다시 진해로 향했고, 나는 작은 트럭을 이용해 그녀를 뒤쫓았다. 원장의 이번 행보는 평소와 달랐다. 낮이 아니라 늦은 밤의 이동이었고 중간에 들르는 휴게소도 달랐다. 그녀는 문경휴게소에서 한 번 내렸고 나는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화장실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폭이 큰 걸음걸이 때문인지 갑자기 그녀에게 어둠 속에서 아른거리는 악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몇 번이나 정신을 차리고 단단히 보아도 그녀와 겹쳐 보이는 악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디스커버리는 휴게소를 나와 다시 고속도로를 달렸고 나는 졸음을 참아가며 뒤쫓아 갔다. 그녀는 진해에 도착 후 곧바로 장복산 게스트 모텔로 들어갔다. 

  절호의 기회였다. 게스트 모텔 하천 옆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늘어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은폐가 용이하고 게스트 모텔도 잘 보이는 위치였다. 늦은 시간이라 지하로 들어간 디스커버리도 움직임이 없었다. 오늘은 외출하지 않고 일찍 잠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텔 정문이 잘 보이게 트럭 후면부에 달린 카메라를 조정했다. 트럭에 도배된 아파트 광고 속 여배우는 밤새도록 게스트 모텔을 지켜봤다. 나는 잠깐 눈을 붙였다 깼다. 적막만 감돌 뿐 드나드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정성스럽게 여장을 시작했다.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악마 놈을 잡기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거울을 보니 나름 여자같이 보였다. 화장을 마칠 무렵, 새벽까지 불을 밝히던 P1실의 불이 드디어 꺼졌다. 정확히 15분 후, 나는 김빠진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시고 미리 준비한 장비 가방을 메고 모자와 마스크를 썼다. 조심스럽게 모텔 비상계단을 통해 7층으로 올라갔다. 사전에 P1실에 묵으며 복사해 뒀던 전자카드로 문을 열고 침실을 향해 사뿐히 걸어갔다. 방의 구조는 내 집처럼 잘 알고 있었다.  

  마취 수건을 꺼내 들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인내해 왔던가. 안정을 되찾고 천천히 움직였다. 침실에 다다랐을 때, 머릿속이 하얘지며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문을 닫고 왔던 길을 되돌아 트럭 문을 열었다. 어디로 간 것일까.... 디스커버리는 틀림없이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고, P1실의 불이 밤 늦도록 켜져 있었다. 창가에 서성이던 그녀의 그림자도 봤다. 모텔 밖으로 나가는 모습도 없었다. 눈치를 챈 것일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나는 모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 디스커버리를 확인했다. 제자리에 있었다. 카운터에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었고 신분 노출의 위험도 있었다. 트럭으로 돌아오기 전에 주변을 살펴봤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장복산 입구 오르막길에서 머뭇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거친 남자의 숨소리가 들려 와 본능적으로 큰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숨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무엇인가가 바위 앞으로 툭 떨어졌다. 하얀 운동화였다. 뛰어가던 발소리가 멈췄다. 쭈그리고 숨어 있는 것이 어색했던 나는 바위 뒤에서 나와 눈앞에 보이는 운동화를 주워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겁에 질린 듯 멈칫거리더니,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손에 들린 하얀색 신발을 보니 안쪽에 ‘윤정민’이란 이름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저렇게 컸구나. 귀신 분장을 한 것도 아닌데 놀래기는.... 나는 운동화 한 짝을 들고 트럭에 올라, 윤성진의 집으로 향했다. 그 운동화만큼은 산에 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원장을 확인하는데 실패했지만 계획대로 조선소 근처 공터에 준비해 둔 제너시스로 바꿔 타고 부산 국제여객터미널로 향했다. 후쿠오카에서 친구 켄을 만난 다음, 미국으로 떠나기 위해서였다. 여객터미널은 공항처럼 깔끔했다. 지체 없이 쾌속선에 탑승했고, 2층으로 올라갔다. 승객도 거의 없어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분위기였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니, 좌측 끝자리에 하얀색 벙거지를 눌러쓴 중년 여성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배가 출발했고 파도가 심하지 않아서인지 여객선은 작은 흔들림 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보낼 시간과 동선을 계산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고 스르륵 눈이 감겼다.  

  처음부터 위험한 일을 직접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스스로 화를 자초해 버렸다. 프로에게 맡기면 될 일을, 남을 못 믿는 성격도 고질병이다. 그저 내 손으로 그놈을 고통 속에서 죽이고 싶었다. 가증스러운 두 눈을 뽑아내고, 선한 말을 외면하는 두 귀를 도려내고, 교활한 혀를 잘라내어 평생을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하고 싶었다. 그 악마 놈은 친누나가 사라진 순간부터 레인보우 여자 원장으로 신분을 세탁하여 살고 있는 것일까.... 그놈의 누나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동생을 대신해 죗값을 받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P1실의 원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불이 켜졌고 불이 꺼졌던 방에서.... 어디로 간 것인가.... 원장이 나의 미행을 눈치챘던 것인가.... 원장은 그 악마 놈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 도착하면 켄과 본격적인 악마 사냥을 논의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쿵 하고 배가 심하게 흔들려 눈을 떴다. 돌고래랑 부딪쳤으니 안전한 선내에서 벨트를 매고 대기해 달라는 안내 방송이 반복해서 나오기 시작했다. 놀라서 고개를 돌려 보니, 중년 여자는 잠든 것처럼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벙거지의 챙 위로 꽃 장식만 보일 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잔파도의 흔들림에 정지된 배가 출렁이자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창밖을 보며 앞으로 걸어갔다가 제자리로 되돌아오며 슬쩍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도 고개를 들어 스치듯 내 눈길을 받았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게다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사귀었던 첫사랑의 느낌이 났다.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세요?” 

  “네....” 그녀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좀 무서운 데, 전혀 개의치 않으시네요.” 

  “전 배를 자주 이용해요. 가끔 돌고래랑 부딪히곤 합니다. 웬만하면 바로 출발하는데, 오늘은 좀 심한 것 같은데요.” 

  나는 한 좌석을 사이에 두고 그녀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바다 한가운데 출렁이는 배 안에 갇혀 보기는 처음인데다 그녀의 말에 더 무섭기도 했다. 그녀의 태연한 분위기에 호감이 갔다. 긴 주름 사이로 많은 사연이 자리 잡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일본 사세요?” 배의 출렁임을 잊기 위해 말했다.

  “후쿠오카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주로 혼자 여행 다니시나 보네요?” 

  “네, 지인들 보러 자주 다니고 있습니다.” 

  “전 뉴욕 사는데 한국에 가끔 오가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배 타고 일본 가는 건 처음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렇게 바다 한가운데 갇혀 보기도 하네요.” 속이 울렁거려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전 커피라도 한잔 해야겠어요. 혹시?” 

  “아뇨. 전 괜찮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사양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 선실 카페로 향했다. 카푸치노 1잔을 샀는데 자리로 돌아오다 중심을 못 잡아 손등에 커피를 조금 쏟고 말았다. 그녀가 숄더백에서 화장지를 꺼내 건넸다. 

  “감사합니다. 힘드네요.”  

  그녀가 친근한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화답할 처지가 못 되었다.  뱃멀미가 날 것 같았다. 위로해 주려는지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에릭 사티 (Erik Satie)의 짐노페디(gimnopedies)였다. 바다 한가운데 고장 나 출렁이는 배 안에서 듣기엔 전혀 위로가 안 되는 곡이었지만, 괜찮은 여성과 대화를 나누기엔 분위기 있는 음악이었다. 그녀에게 딸 자랑을 시작했다. “제 딸이 미국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지금은 연주자로 전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조만간 한국에서도 연주회를 계획 중인데 괜찮으시다면 초청하고 싶네요.” 

  “대단한 따님을 두셨네요, 좋으시겠습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꼭 보고 싶네요.” 그녀는 이마로 내려온 머리칼을 살며시 뒤로 넘기며 말했다. 우는 것처럼 눈동자가 촉촉했다. 

  “명함 한 장 드리겠습니다.” 뉴욕의 개인 사무실 명함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명함이 없어서.... 최유진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내 명함을 한참 바라보더니 지갑에 넣었고 명함 한 장을 더 받아 뒷면에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 되돌려 줬다. 쾌속선이 수리를 위해 부산으로 되돌아간다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41 


2018년 4월 21일, 진해, 윤정민 

 

  진 형사의 기분 나쁜 호출이 또 시작되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내심 오늘 돌아간다는 실종 원장의 남동생 조사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다. 수사내용이야 찔끔 흘릴 뿐이겠지만 알아서 들으라는 내용이 때로 중요한 경우도 있어 무슨 말을 할지 기대감도 있었다. 찻집에 도착하니 어색하게 그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인사는 반갑게 건넸다. 수시로 만나다 보니 능글맞은 얼굴조차도 동네 형의 너스레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잘 지냈어요? 별일 없었죠?” 

  “그럼요. 형사님도 사건 수사는 잘 되고 있습니까?” 

  “글쎄요.... 잘 안 되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실종자와 연관된 사람들이 용의 선상에 올라 있긴 한데, 모두 특별한 원한 관계도, 금전 관계도 없어서 조사에 어려움이 있네요. 수사라는 게 말이죠. 범행 동기라는 것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그 동기를 추적하는 것이 사건 해결에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거니까. 그래서 아무 동기도 없는 묻지 마 범죄 같은 경우에는 해결이 어렵죠. 이번 건도  동기 파악이 안 되니 스토리가 딱 그려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그래서 말인데, 사고 전 일산에 있을 때 기억이 전혀 안 난다고 했죠?” 

  “네, 그건 또 왜요?” 

  “아버지의 수업 방법과 레인보우센터의 방법이 뭐 다른 게 있는지, 자폐아의 입장에서 어땠는지 궁금해서요.” 

  “그건 아버지한테 물어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아버지한테는 이미 확인했어요. 치료하는 입장 말고, 치료 받는 입장에서 차이점이 있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헷갈리는 질문이었다. 

  “치료하는 입장에서 서로 간의 입장이 다를 수도 있고 의견 충돌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아버지와 실종된 원장 간에 생긴 원한의 이유라고 보기에는 힘들긴 하지만요. 그런데 치료 받는 사람이 학대를 당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요. 사업상 둘이 긴밀했으니까 아버지는 충분히 그 원장과 트러블이 생겼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정민 씨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제가 레인보우를 다녔거나 다니고 있는 학생들을 만나 조사를 좀 해 보니까, 대부분의 아이는 아직 증상이 심해 의사소통이 잘 안 되더라고요. 치료 받는 입장에서 정민 씨 아버지와 레인보우의 치료가 어떠했는지 비교 진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더란 말이죠. 그런데 단 한 명, 정민 씨는 예외죠. 유일합니다. 자 기억해 보세요. 레인보우에서 당신을 학대한 적이 있습니까?” 

  학대라.... 난 수도 없이 악마의 성기를 물고 빨았다. 라고 목구멍까지 말이 올라왔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유도 질문에 걸려들면 아버지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이니, 천천히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레인보우에 아이를 맡겼던 학부모들 조사에 의하면, 목이 아프고 입안이 헐고 그런 증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고 그러던데.”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 형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실종자의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왜요? 수사내용 말인데. 주요 참고인들의 개인 신상은 밝힐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알아내야 했고, 지금이 아니면 알기도 힘들 것 같았다. 

  “다른 건 아닌데, 예전에 레인보우 원장과 비슷하게 생긴 여동생을 본 것 같아서요.” 나는 엉뚱한 말로 답변을 유도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걸려들었다. 

  “여동생?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예요? 실종된 레인보우 원장은 중학교 때 부모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갔고, 샌프란시스코인가에서 쭉 지낸 걸로 알고 있어요. 밑으로 남동생만 한 명 있죠. 원래는 의대에 가려고 했는데 아는 교회 분의 제안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미국서 부모 모두 돌아가신 다음 동생과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가정환경이 나하고는 천지 차이던데. 유복하고 심지어 화목하기까지. 곱게 자란 사람이죠.” 

  “그렇군요.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남동생은 무슨 일을....?” 

  진 형사의 눈동자가 커졌다. “글쎄요. 뭐 누나 하는 일도 돕고 그랬다고 하던데.... 근데,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어요? 왜 나한테 계속 질문을 하고 그럽니까?” 그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아닙니다.” 

  “음.... 사실 오늘 정민 씨 보자고 한 거는 특별한 건 아니고, 그 운동화 가져간 사람 얘기도 하려고 불렀어요.” 

  “운동화요?” 

  “그래요. 잘 알겠지만, 처음에 수사 방향을 아버지 쪽으로 맞췄던 것은 사실입니다. 누가 봐도 그렇지 않겠어요? 근데 심증만 있었지 물증이 없었죠. 정민 씨 집 근처하고, 장복산으로 향하는 근방 CCTV를 다 뒤져서 확인해 보니까, 아버지는 그 시간에 주변으론 얼씬도 안 했어요. 아예 집 밖으로 출입도 안 했던 거죠. 우리가 그런 사람을 추궁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데 말이죠. 희한한 일이 발생했지 뭡니까. 정민 씨 운동화 가져간 사람을 찾아냈거든요.” 

  “정말요?” 

  “정민 씨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에 CCTV가 딱 한 대 있었는데, 거기에 중요한 장면이 찍혀 있더라고요. 그날 새벽에 정민 씨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하얀 트럭 한 대가 집 앞에 잠깐 멈춰서더니 무언가를 내려놓고 가더라 이거예요. 운동화로 추정되는 물건이죠. 그래서 도로 곳곳의 CCTV를 돌려 그 트럭을 추적했는데, 시내를 벗어나더니만 사라져 버렸어요. 그 트럭은 계속 찾고 있고요....” 

  “네.... 근데 제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요?” 

  “바로 그 점이 포인트입니다. 영상이 희미하긴 하지만 트럭이 운동화를 집 앞에 두고 사라진 후, 어떤 중년 여자가 뒤이어 나타나 그것을 다시 집어 갔어요. 그 뒤로 정민 씨가 맨발로 집 앞에 나타난 것도 찍혀 있고.” 

  “중년 여자가요?” 

  “그래요. 이렇게 보면. 정말 희한하지 않습니까? 그 이른 시간에  운동화 하나가 뭐라고. 트럭이 두고 간 운동화를 뒤따라 온 누군가가 재빨리 집어 가냐 이겁니다. 납득이 안 되지요? 그 말인즉슨, 운동화를 집 앞에 두고 간 트럭 주인은 정민 씨를 아는 사람이 틀림없고 뒤따라와 그 운동화를 주워간 사람도 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런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종자는 게스트 모텔 P1실에 싱글로 자주 방문하는 고객이었다고 하는데, 사건 당일에는 이상하게 P1실과 P2실 2개를 예약했다고 합니다. 손님과 같이 방문했다고 하는데. 그 모텔 P1실과 P2실은 펜트하우스 격으로 꼭대기 7층에 단 2개만 객실이 있다고 해요. 그렇다면 P2실에도 손님이 분명히 있었을 것인데, 이 손님은 실종 신고도 없고 누구인지 아직 파악조차 할 수가 없어요. CCTV도 없고, 투숙자 정보도 가짜가 많아 제대로 확인도 안 되고요. 카운트 보는 아르바이트생도 P2실 예약은 P1실 손님이 한꺼번에 했고, P2실 손님 얼굴을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하고. P1실과 P2실 뿐만 아니라 지하에 주차된 디스커버리는 내비게이션도 없고 카메라도 없고, 심지어 지문과 족적도 없고 머리카락 하나 안 떨어져 있어요. 그걸로 봐서는 동행인 P2실 손님이 P1실 원장을 죽이고 증거를 전부 없앤 것이 아닌가 그런 추측도 하고 있습니다.” 

  “형사님. 범인은 게스트 모텔이 주위의 눈에도 띄지 않고 CCTV도 없는 곳이라 범행 장소로 선택했을 거라고 하셨는데, P2실 손님은 그날 처음으로 그 모텔을 방문한 거 아닐까요? 그렇게 능숙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음. 그건 P2실에 누가 투숙했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분명한 사실은 게스트 모텔에서 정민 씨가 운동화를 잃어버린 장소가 지척이고, 운동화 주인인 정민 씨를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은 P1실에 묵었던 실종된 원장밖에 없다는 거지요.”

  “네.... 점점 헷갈리네요.”   

  “사실 그 운동화 말이죠.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근데 웃기게도 그 운동화 하나가 이 사건의 핵심 단서가 되고 있어요. 그게 뭐기에 그냥 산속에 두면 될 걸 왜 굳이 주워서 정민 씨 집에 갖다 놓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을 왜 다시 주워 갔느냐, 이 점이에요. 보물도 아니고. 암만 생각해도 말이 안 나오죠. 안 그래요? 그래서 그날 장복산 바위 뒤에서 운동화를 주워서 다가왔다는 그 여자에 대해 다시 얘기 좀 들었으면 하는 거거든요.” 

  “이미 제가 수도 없이 말씀 드릴 때는 관심도 안 가지시더니.... 이젠 정말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검정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 중년의 여자. 그때는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몽타주도 만들기 힘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네. 그랬죠. 바로 그 여자가 트럭의 주인이고. 주운 운동화를 정민 씨 집 앞에 두고 간 게 되는 거죠. 그걸 지켜보던 또 다른 여자가 집 앞에 있던 운동화를 다시 주워 갔다. 그런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거죠. 정민 씨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있는 김성용, 재미 교포 존 김, 그리고 레인보우 원장을 제외하면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도 없었던 거로 아는데.... 재미 교포야 오랫동안 직접 만나지도 않았고. 김성용은 병원에 있고, 레인보우 원장은 사라졌고....” 

  “형사님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뭡니까? 또 이상한 질문입니까?” 그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아니.... 실종된 원장의 가족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말씀드렸잖아요? 개인정보는 함부로 묻지 마세요. 실종된 원장과 남동생. 둘 뿐이라니까요. 부모는 모두 미국에서 돌아가시고. 뭣 때문에 자꾸 그래요?” 그가 짜증을 냈다. 정답은 이미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것을 그는 모를 것이다. 


  42 


2018년 4월, 부산-일본, 존 김 

 

  돌고래에 난파된 쾌속선이 부산으로 되돌아온 이후, 대합실에서 오랜 시간 대기해야 했다. 최유진과 함께 비빔밥도 먹고 이런저런 세상 사는 얘기도 나누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대합실 끝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창밖으로 선착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으니, 시모노세키행 대형 크루즈선과 후쿠오카행 쾌속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밖 쾌속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우리가 타고 갈 배군요.” 

  “여기서 보니까 조금 다른 느낌인데요.” 그녀는 밝게 웃었다.

  “일정이 틀어지긴 했어도 유진 씨도 만나고 하니까, 뭐 거창하게 얘기하면 영화 속 한 장면 같습니다.” 잠시나마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버리기 위해 큰 소리로 웃었다. 유진도 엷은 미소를 지었다. 

  “따님이 피아노를 친다고 했는데 저도 예전엔 포크 가수가 꿈이었어요. 통기타 메고 노래 좀 했는데, 형편도 안 되고 끈기도 없고 해서 그만뒀지만요.... 한국에선 오랫동안 미용일을 했었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듣는 거는 좋아하는데 연주에는 재능이 없었어요. 딸이 피아노를 치게 된 건 어릴 때 조금 아파서 이것저것 많이 시켜 봤는데, 피아노에 흥미를 느껴서.... 그 길로 가게 되었지요. 자제분은 있으신가요?” 

  “그러셨군요. 전 아들이 한 명 있는데....” 그녀가 애써 말을 삭히는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일본에서는 오래 사셨나요?” 

  “한 20년은 넘은 것 같은데요. 참 시간 빠르네요.” 

  “저도 미국에서 20년 이상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구제 옷을 도매로 팔았는데 운 좋게도 잘 돼서 사업이 좀 커졌지요. 근데 애가 아프고, 사업도 접을 타이밍이 된 것 같아 그만뒀지만요. 그 뒤로는 개인적으로 투자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합실에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유진과 카페를 나와 입국대로 걸어갔다. 탑승한 쾌속선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나는 유진과 떨어진 좌석을 배치 받았다. 1층에 위치한 내 좌석 옆으로 사람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바로 옆 좌석에는 유후인으로 온천 여행을 가는 여대생 두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두 눈을 감은 채 그놈을 추적하던 시간을 복기했다. 

  옆자리 여대생들의 대화가 들렸다. 비트코인 이야기였다. 가상화폐 투자가 열풍인 시대라 이상할 것은 없었다. 호기심이 생겨 여학생에게 가볍게 말을 건넸다. “친구들끼리 일본에 놀러 가나 봅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인 듯, 갑자기 대화에 올라탄 남자에게 그녀들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경계심을 보였다. 

  “방금 비트코인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저도 주식 투자하는 데 관심이 많거든요.” 

  사람 좋은 인상을 보여도 그녀들의 눈동자에는 엉터리 이론을 풀거나 사기 칠 생각일랑 단념하라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요즘 블록체인 혁명이잖아요. 그 중심에 가상통화가 있는데 누구 하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오를 때도, 내릴 때도 폭이 엄청 커요. 이럴 때, 저희도 작게나마 투자를 해 볼까 고민하는 중이거든요.” 그녀의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변동성이 심해 불안하기는 하겠습니다. 쉽지는 않겠네요.” 

  “그래도 주저하다가 예전처럼 10배, 100배로 뛰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아서요....” 또 다른 여학생이 이어 말했다. 

  솔직히 영양가 없는 자리라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지만 설레는 기분도 들고 투자자로서 뭔가 한마디라도 해 주고 싶었다. 

  “제가 블록체인 분야에 식견은 없어도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투자 경험이 좀 있는데요....” 

  두 여대생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선수들 같았다. 반짝이는 두 눈에 돈을 벌고 싶다는 욕구가 가득 차 보였다. 사기꾼이란 이런 사람들의 순진한 욕망을 부채질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가 질문하나 할까요? 혹시 동전 던지기를 계속 반복하면, 앞면과 뒷면이 몇 대 몇으로 나올 거 같아요?” 

  “반반 아닌가요?” 흥미로운 표정으로 한 명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확률의 원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맞습니다. 희한하게도 던지고 또 던지고, 계속 반복하다 보면 앞면과 뒷면이 나오는 횟수가 반반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죠. 시간 날 때 재미 삼아 아무 동전이나 딱 300번만 던져 보세요. 인생의 오묘함을 느낄 겁니다. 참 신기하죠. 왜 제가 이런 말을 하냐면, 개인에게 투자란 그저 시간의 방석을 깔고 앉은 채, 뭘 하나 사거나 파는 단순한 행위일 뿐이죠. 그런데 말이죠. 그 결과가 만약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반복할수록 성공과 실패 확률이 반반이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복잡한 변수야 있긴 하지만,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서 말이죠. 그렇다면, 성공의 결정이 성공을 부르고, 실패의 결정이 실패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투자를 반복할 땐 딱 절반의 성공, 딱 절반의 실패를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결론이 나오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절반의 성공은 크게, 절반의 실패는 작게 하는 것이 핵심이 되겠죠. 근데 이걸 제대로 하는 것이 쉬울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투자를 잘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투자 결정에 영향을 주는 주변의 소음도 많고, 성공을 크게, 실패를 작게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의 심지를 키우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요.” 

  “동전 던지기와 투자는 비교에 무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럼 투자는 개인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인가요?”

  “물론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결국 비슷해집니다. 그리고 개인투자를 하지 마라 하라 그런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한 번의 결정과 또 다른 한 번의 결정은 완전 별개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거예요. 심리적으로 두 관계가 절연되지 않으면, 결코 돈을 벌기도 지키기도 힘든 것이지요. 그래서 개인투자로 성공하려면 심리적으로 강해지는 것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몹시 어렵죠. 투자에서는 어떤 금융 지식이나 고급 정보보다도 개인적으로 내면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식이나 경험의 문제라기보다는 뭐랄까, 확실히 인격의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인격요? 투자 대가들은 인격이 남다른 사람이 많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특히 정상에 선 투자자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강하거든요. 대단한 지식이나 정보를 전부 알 필요도, 전부 경험할 필요도 없습니다. 투자의 세계에선 정답이 계속 바뀌기 때문입니다. 아주 미세하게 판이 뒤틀려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이 안 되거든요. 사람마다 각자 내면이 다르지 않습니까? 투자라는 세계에도 적합한 내면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적합한 사람은 성공 확률이 동전 던지기의 50% 보다 높아지고,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50% 보다 낮아지는 것이지요. 내면을 다스린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도 사실 정해져 있지요. 그게 노력이나 훈련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피아노 한번 쳐볼까, 자격증 한 번 따볼까, 이런 생각으로 투자에 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논리를 지지하는 고정판이 계속 변해 가는 예술의 영역에서는 어떤 날카로운 분석도 혜안도 그저 참고가 될 뿐입니다. 어찌 보면 이런 곳은 도인 같은 사람이 어울리는 분야죠.” 

  “도인요?” 여대생 한 명이 입을 막으며 키득거렸다.

  “네. 미국에서는 이런 도인의 심리 메커니즘을 슈퍼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하죠. 열반한 인간의 정신을 매매 프로그램에 담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도를 득했다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정수에 있는 본질만 인식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생각하는 즉시 그 생각에 갇히게 되는 약점을 걷어낸 것입니다. 물론 슈퍼컴퓨터의 처음을 세팅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지만요.” 

  젊은 여대생들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어도 이상한 아저씨를 본 듯한 표정이었다. 

  “팁을 딱 하나만 드리자면, 비트코인 투자는 체리블라썸 프로젝트로 접근하세요.” 

  규슈 여행 서적으로 눈길을 돌렸던 여대생들이 다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선수처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또 뭔 소리냐’라는 표정이었다. 

  “체리블러썸요? 벚꽃 말씀이신가요?” 

  “네. 확신할 수 없는 땅에서는 자연의 진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언제 투자하든 4월을 기다리세요. 때가 오면 꽃은 핀다. 그 마음가짐으로 일희일비하지 말고 기다리면 됩니다. 단, 투자는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여윳돈으로 해야 합니다. 조급함의 딱지가 붙은 나무는 클 수가 없거든요. 4월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4월 1일이 되었든 10일이 되었든, 한껏 즐긴 다음 아쉬움 남기지 말고 마음 내킬 때 그냥 떠나면 됩니다. 다음 해를 기다리기에 너무 힘드니까 반드시 떠나세요. 5월 5일의 어느 화창한 날에, 12월 24일의 눈 내리는 날에, 왜 벚꽃이 피지 않느냐고 낙담하지도 아우성치거나 마음 졸이지도 마세요. 왜 그런지 모여서 중얼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냥 흘려버리세요. 4월이 되면 꽃은 핍니다. 세상은 예외 없이 자연의 섭리를 따릅니다. 그것만 명심하세요!”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선수들의 표정은 일순간 일그러졌다. 

  “4월이 돼도 꽃이 안 피면요?” 

  “그건 벚꽃이 죽은 겁니다. 절대 다음 해를 기다리지 말고 슬퍼하지도 말고 그냥 떠나세요. 투자에 실패한 겁니다.” 

  계획했던 시간보다 늦게 일본에 도착했기에 최유진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서둘러 후쿠오카 캐널시티에 위치한 극장으로 들어갔다. 최유진도 영화관에서 일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켄이 그녀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좌석을 사이에 두고 누군가 조용히 앉았고, 우리는 영화 소리에 묻히는 대화를 조용히 나눴다. 극장 가득 레몬 향이 느껴졌다.    




















이전 13화 3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