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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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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9일, 진해, 윤정민 

 

  뽁뽁거리는 입술소리 덕분에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원장과 대면했다. 김은정 선생님은 자신의 수업이 끝나면 나를 원장실에 데려다주었다. 안에 들어가면 중간쯤에 천막같이 생긴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이상한 수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바나나처럼 기다랗게 휘어져 부풀어 오른 성기가 내 얼굴 앞에서 덜렁거렸고, 그는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잡고 그것을 물렸다. 그러곤 자신의 입으로 뽁뽁 소리를 내며 모범을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많은 아이가 똑같이 당했을 것이다. 인지능력이 낮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아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누구에게 알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원장 남동생의 입술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수도 없이 헛구역질이 났다. 목구멍을 뚫을 것 같은 성기, 미끈하고 비릿한 액체를 삼키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삼키지 않고 구역질할 때면, 퍽 유! 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머리를 내리치던 주먹이 보였다. 물컹한 액체의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두 손을 머리 위에 깍지 낀 채, 뽁뽁 입술소리를 연발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기다란 물건을 빨며 뽁뽁거리는 입술소리를 들었다. 마무리로 달콤한 파란색 액체를 마시면 원장은 고개를 쓰다듬으며 착하다고 칭찬을 했다. 따뜻한 포옹과 볼 뽀뽀도 잊지 않았다. 

  바로 그 악마가 실종된 것이다. 정체를 알아차린 아버지가 죽여 버린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악마의 남동생은 어째서 내 고통스러운 기억을 환기할 만큼 그 악마와 똑같은 입술소리를 내는 것인가. 가족이라 그럴 수 있을까. 마치 환생한 것만 같다. 악마라면 나를 보고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아무리 내가 기억을 잃었다 해도 성인이 되어 나타났는데 마음의 동요라는 게 있지 않을까.... 머리도 복잡하고 혼자 있으려니 불안하고 겁이 났다. 

  티셔츠 소매에 팔을 끼워 넣는 순간, 번쩍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원장은 여장 남자 아니었나.... 그런데 그 남동생이라는 사람은 분명히 누나가 실종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럼 원장은 진짜 여자라는 말 아닌가. 어떻게 된 것일까....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땀이 안 나는 체질이었지만 계속 땀이 흘렀고 헛구역질이 났다.


  아버지는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다 내가 들어가자 잠시 눈을 맞췄다. 다행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했다. 담당 의사가 할 말이 있다며 간호사가 나를 불러냈다. 새치를 옆머리에 띠처럼 두른 속눈썹이 긴 남자였다. 

  “아버님이 예전에도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까?” 

  “발작은 아닌데 주문 같은 것은 주기적으로 외고 계셨습니다.”

  “주문이라면?” 

  “자신만의 의식입니다. 홀로 독특한 자세를 잡고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현상인데,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뭐 이런 말을 허공에 대고 계속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의사는 이해가 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이 외상후증후군, 예전에 심한 충격을 받으신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큰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걱정이 되긴 했는데 미루다 일이 나 버렸습니다.” 

  “악화할 것 같진 않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선생님, 근데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까?”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다른 이유라.... 글쎄요. 제 생각으로는 외상후증후군 말고는.... 자신만의 의식이라는 것이 일종의 징크스 같은 것일 수도 있겠죠. 그것을 통해 심리적으로 안정을 얻고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거든요. 또, 일상에서 경험하기 힘든 기적이나 마법과도 같은 일을 겪게 되었을 때도, 아버님 같은 현상이 충분히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징크스, 기적이나 마법’ 의사는 친절하고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는 애매한 전문가는 아니었다. 진솔함이 느껴졌다. 

  “선생님, 안 바쁘시면 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더 드려도 될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가 있는 듯 두 눈은 반짝였다. 

  “사실 제가 예전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렸거든요. 끊어져서 아주 조금씩 떠오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과거가 대부분 백지상태인데 이상하게도 최근 들어 조금씩 어떤 장면들이 떠오르는데,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요? 그 기억이 정말 실재하는 것인지. 스스로 바라거나 지우려는 의도로 왜곡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기도 해서요.” 

  “먼저, 연기처럼 사라졌던 기억이 구름처럼 두둥실 눈앞에 떠다닐 수 있는지, 그게 과연 가능한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능합니다. 시간 속에 축적된 기억들은 어떤 사고가 났다고 뇌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숨바꼭질 같은 것이지요. 꼭꼭 숨은 기억을 술래는 우연히 꽃무늬 치마 문양을 보거나 멀리서 짖는 개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스치는 샴푸 향을 맡고 찾아내기도 합니다. 단, 그 기억이 스스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계속 반복되고 있을 때, 촉발되는 무엇인가가 그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지요. 시간이라는 속성이 연속된 선이 아니고 곳곳에 박혀 있는 점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평면이 아니라 사차원의 점 말이죠.”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 찾아낸 그 기억이 과연 실제 하는지, 왜곡된 것인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건 전자일 수도 후자일 수도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기억을 끄집어낼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끄집어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퉁이에 삐져나온 꽃무늬 치마 문양을 보고 영희 찾았다 했는데, 영미가 나오는 것이지요. 이것이 기억이라는 것의 속성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근데 좀 어렵습니다....” 

  “인간은 현재에 살고 있지만, 이 기억이라는 속성 때문에 과거에 영향을 아주 많이 받지요. 그렇게 보면 기억이라는 것도 과거부터 현재, 미래의 순으로 온전하게 앞으로 가는 개념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만약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 사건의 시간 가닥이 새로 만들어져 과거의 기억들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 말씀은 과거의 나쁜 기억, 좋은 기억 자체가 언제든 현재의 어떤 사건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현재의 어떤 사건도 미래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변형될 수 있고....” 

  “그렇습니다. 미래에 변형될 사건이 다시 현재와 과거에 영향을 주게 되지요. 그래서 기억이라는 것이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과거의 오래된 기억에 의존한 진술보다는 명확한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구역질이 나는 몸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들이 실재하지 않고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닐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누가 거짓말쟁이인지는 감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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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겨울, 서울, 존 김 

 

  중국의 조선 수주량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던 불길도 서서히 잦아들겠지.... 한국 공항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캐리어의 바퀴 소리를 듣는 시간은 언제나 설렌다. 껑충거리는 제시의 손을 잡고 인천공항을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던 마세라티에 올랐다. 단 한 번의 결단으로 큰 수익을 거머쥐었지만 누구에게도 떠벌리진 않았다. 맛있게 먹은 걸 남에게 품평해 봐야 득 될 것은 없으니까. 돈의 흐름이란 단순하고 치명적이지 않은가. 사는 것 한 번, 파는 것 한 번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세상인 것이다. 사고파는 시점이 뒤바뀌었다면, 당연히 난 파멸했을 것이다. 결단의 무게감은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사고팔 기회는 온다.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다. 멋모르고 날뛰는 놈들은 자만심의 대가를 톡톡히 치를 테지만 대부분은 선택권을 방치할 것이다. 표준화된 시스템에 사고가 마비되었으니까. 자신의 적합성을 오해해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보다는 시스템에 복종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느낄 것이다. 자신을 모르니 주워들은 공포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아를 성찰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진정 잘하는 분야에서 게임을 할 수만 있다면 그건 홈그라운드에서 우호적인 관중과 심판의 기세를 등에 업고 벌이는 경기나 매한가지다. 그런 세계의 확률과 통계는 표준과 평균이라는 개념을 비틀어버리기 마련이다. 자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은 장전된 총을 앞에 두고도 방아쇠를 당긴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겼고, 두려움을 죽여 버렸다.  


  장시간의 비행이 피곤했던지 딸이 새근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니 유령처럼 그놈이 나타났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왜 그런 놈에게 딸을 맡겼을까. 그놈의 푸른 아이섀도 눈망울 때문인가. 수수해 보이는 빨간 스웨터와 청바지 때문이었던가. 깊어 보이는 신앙심, 성실해 보이는 태도, 곧잘 하는 한국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나는 왜 그놈이 여장 남자라는 사실을 한 번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창밖으로 그놈의 눈웃음이 아른거렸다. 반드시 찾아내어 오장육부를 끊어 버릴 것이다. 

  늦게나마 그놈의 지나친 성실성이라도 의심하지 않았다면, 고스란히 내 딸은 그놈의 재물로 전락했을 것이다. 나는 치료실로 사용하는 딸의 방과 내부 화장실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외부 카메라와 달리 2대의 내부 카메라는 천장의 화재탐지기 속에 숨겼다. 프라이버시나 법적인 문제는 뒷전이었다. 내겐 딸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했고, 그 덕에 놈의 선한 두 눈에 잉태된 악마적 속성도 보게 되었다.   

  악마는 철저한 변장과 연기만큼, 교활한 놈이었다. 오래도록 딸의 방과 화장실에서 녹화된 영상에선 그놈의 악마적 속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그놈은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보이지 않는 눈을 피해갔다. 치료사들은 모두 딸을 위해 충실히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이한 점은 다른 치료사들과 달리, 그놈은 가끔 치료실에서 아이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갔다 10여 분 정도 지난 후에 돌아오곤 했다. 갑갑해서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주문을 외듯이 나가는 모습이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녹화된 영상을 면밀히 관찰했고, 3개월 정도 지난 후 꼬리를 잡았다. 

  딸의 방 내부 화장실 거울에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악마와 딸이 나타난 것이다. 반쯤 열린 내부 화장실 문과 반쯤 열린 방문 틈새를 통해 방 밖에 있는 그들의 모습이 화장실 거울에 비쳤다. 조각상처럼 과장된 악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놈은 두 팔을 깍지 끼어 머리 위로 올리고 있었고, 바지를 내린 채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있었다. 그 뒤로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세운 것 같은 형상의 내 딸이 그 악마에 가려져 있었다. 악마의 엉덩이를 부여잡고 있는  하얗고 긴 손가락만이 선명히 보였다. 피아니스트를 시키려고 소중하게 다루던 그 손가락이 악마의 엉덩이를 잡고 있었다. 두 눈을 감으니 극과 극의 전류가 눈망울 위로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법 같은 것은 꼼꼼히 따지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은 분노가 앞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다음 날, 상담을 핑계로 그놈과 일정에 없던 저녁 약속을 급하게 잡았다.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연기가 부족했던 것일까. 목소리에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던 것일까. 차라리 집에 왔을 때 몽둥이찜질로 포박하거나 녹화된 영상으로 법적 처리를 했더라면 효율적이었을지 모른다. 예상과 달리 악마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나의 악마사냥은 실패했다. 이후로는 사라진 악마를 찾을 수조차 없었다. 이름도 가명이었고, 경력, 전화번호, 집 주소도 전부 가짜였다. 왜 정확히 확인해 보지 않았을까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법으로 그놈을 단죄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지만, 딸의 비참한 사실이 세상에 밝혀지는 것이 싫었다. 사실 딸이 받은 상처보다 내가 받게 될지 모를 상처가 더 신경 쓰였다. 고민 끝에 나는 오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안면인식 전문가인 켄은 선뜻 제안에 응했다. 그가 이런 일에 연이 닿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켄에게 그놈의 얼굴이 녹화된 CCTV 자료를 넘겼고,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정확히 일주일 후, 켄은 한국으로 입국한 그놈을 찾아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잡은 놈은 악마가 아니라, 악마의 친누나였다. 깊이 생각에 잠겼던 탓일까 차는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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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0일, 진해, 윤정민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태우 아버지가 달려왔다. 말기암 처지에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인가. 참 끼리끼리 논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든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우리는 병원을 나와 중원로터리 쪽으로 걸어 나갔다. 썩은 나무토막처럼 가는 발목이 눈에 밟혔다.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 발목도 저렇게 약할 수 있을까. 지역 최고의 요양병원이라는 곳에서 서글픈 발목을 훤히 드러내놓고 다니는 환자들의 초라한 옷가지에는 정녕 눈길이 가지 않는 것인가.... 


  “요즘은 답답해서 건물을 나와 자주 걷는다. 형님 배려로 말년에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편하게 지내고 있지만, 방에만 있으려니 가슴이 갑갑한 게, 영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는 잠깐 걷다 숨이 가쁜지 편의점 앞 파란색 간이 의자에 앉았고, 나도 따라 앉았다. 군복을 입은 해군 수병 둘이 외박을 받았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나갔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의 아내를 만났던 얘기가 맴돌고 있었지만 여기서 끄집어낼 수는 없었다.      “진해도 많이 바뀌고 있네. 멋진 바닷가 근처에 근사한 리조트나 휴양시설 같은 거 지어 놓으면 도시 이미지가 더 관광도시 같을 텐데. 우리 요양병원 봐봐. 소문 듣고 사람이 몰리잖아. 그렇게 비싸도 방이 없다는데. 시설이 좋은지 위층은 높은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랫동안 밖에 계셔도 괜찮습니까?” 거친 숨소리에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괜찮지 뭐. 세상살이가 우습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옛날부터 내가 공부는 못했어도, 못하는 운동은 없었거든. 한 덩치 했는데도 턱걸이를 하면 요령 하나 안 부리고 25개는 거뜬히 했어. 황소처럼 힘도 세고 튼튼한 사람이었지. 옛날에 비리비리하던 동창들은 말이야. 주먹질도 필요 없었어. 나한테 뺨 한 대만 맞아도 교실 구석으로 처박히던 놈들이 지금 보면 말끔한 얼굴에 잘 차려입고 골프 치고 등산 다니고 하는데.... 내가 철이 없었지.” 

  “저희 아버지도 마찬가지죠. 매일 외국 방송에다 자폐 관련 책이란 책은 죄다 읽는 분인데, 머리가 저렇게 돼 버렸지 않아요.” 

  “정민아!” 갑자기 그가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내가 택시 할 때 알던 동생이 어제 수상한 사람을 봤다고 하더라. 장복산에서 실종된 그 여자 말이야....” 

  “택시 기사분이요?” 

  “그래. 생긴 거하고 화장, 냄새, 말투 그런 거 전부 외국 사람 티가 났다고 하더라고.” 

  “정말 그런 거로 알 수 있습니까?” 

  “그럼. 택시 운전 오래 하다보면 습관적으로 사람을 관찰하고 그러거든. 세상이 험해서 긴장하고 있는 것도 있고. 약간 서비스 차원도 있고 해서 눈치 봐가며 조용히 있을 땐 조용히 있고, 말 많은 사람한테는 맞장구쳐 주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거짓말 안 보태고 여기는 딱 택시에 사람 타면 신상 정보 줄줄 나온다.” 

  그가 그의 아내 소식도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뭐가 수상하다는 거지요?” 

  “그 동생이 형철이거든. 예전에 실종되었던 그 여자를 태운 적이 있어서 기억하는데, 어제 태웠던 어떤 남자 손님이 이상하게 그 냄새.... 향기 나는 양초 태울 때 나는 그 냄새 때문에 기억한다는데.... 걔 별명이 개코야. 또 게스트 모텔도 아니고 ‘호텔 가 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 목소리, 발음도 너무 비슷해서 룸미러로 슬쩍 쳐다보니, 분명히 남자인데.... 귓볼에 검정 점 3개가 박혀 있는 것도 실종된 여자와 똑같았다는데.” 

  “네? 귓볼에 검정 점 3개요?” 

  “그래. 우린 그런 것도 보지.” 

  그의 말은 지금 진해에 있는 남동생이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무슨 사립 탐정도 아니고 운전한다는 사람들이 냄새와 귓볼의 점으로 손님을 기억한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발작이 일어난 게, 그 남동생 만나고 나서잖아. 왜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 상태가 심각해졌을까. 형철이 말하고 대조해 보면 정말 이상해. 아무래도.... 너도 조심해야 된다.” 

  “네....” 어떤 경로건 의심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레인보우에서 오랫동안 여장을 하고 원장 행세를 하던 놈이 있었다면, 어떤 동생이 자기 누나 행세를 해 온 낯선 남자를 못 알아볼 것인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제이가 아니라면, 애초부터 누나인 원장 행세를 한다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복산에서 실종되었다는 레인보우 원장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는 아직 믿기지 않습니다. 그 기사분의 말이 거짓말 같진 않지만, 누나와 남동생은 닮을 수가 있잖아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버님이 얘기를 안 해서. 형님이 좀 안정되면 얘기 한번 해 보마. 아무튼 항상 몸조심하고 다녀라.” 

  실종 사건이 이제는 여장 남자 프레임으로 바뀌고 있었다. 택시 기사를 통해 나온 이야기라면, 그 파급력을 감안할 때 진 형사가 모르고 있을 리 없을 것이다. 요양병원까지는 기본요금으로도 충분한 거리였지만 나는 그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옆자리에 앉은 그의 슬픈 발목이 바짓단 끝으로 더 선명히 드러났다. 연신 가래 기침을 해대며 헐떡이는 모습이 방금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 같이 힘들어 보였다. 

  “정민아, 내가 태우 그놈 어렸을 때부터 엄마 욕을 참 많이 했다. 지 살겠다고 아픈 아들도 내팽개친 용서 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욕을 해댔어. 절대 그런 사람과 다시는 마주쳐서도 안 된다고 당부도 했다. 근데 죽을 때가 다 돼서 그런지, 내가 이 말을 안 하면 이놈이 또 진짜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엄마 용서하라 했거든. 사실 예전에는 태우 엄마가 그냥 자기 인생 살게 떠나버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어. 근데 태우 이놈이 원망도 안 하는지 고개만 가만히 끄덕이더라. 철이 빨리 든건지 냉정한 건지. 그동안 한 번도 엄마 얘기를 안 꺼내고.” 

  역시 그는 주위를 맴도는 아내를 알고 있는 듯했다. 

  “사는 게 정말 힘들다고 생각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좋은 일도 많았던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애들 인형 놀이 같기도 하고. 팔다리 다 뜯겨 나가도 다시 붙이면 그만인 것을.... 어쩌자고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울고 불며 그 실랑이를 벌였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마누라랑 지지고 볶고 싸운 것 생각하면 지금도 쪽팔려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인생이 빙빙 돌더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것 같아....” 

  그의 말이 유언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택시가 병원 입구 앞에 멈추자 그는 성큼성큼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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