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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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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6일, 진해, 윤정민 

 

  진 형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용건은 당연히 아버지였다. 계좌와 통화 내역을 추적했는지, 존 김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나는 두 사람이 잘 보이는 식탁 의자에 앉아 무슨 말이 오가는지 은근슬쩍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미국 쪽과 컨설팅을 진행하셨습니까?” 

  “일산에 있을 때부터 입니다.” 

  “미국에서 요구하는 것은 아이 치료 외에는 없었습니까?” 그는 숨기고 있는 것이라도 있는지 캐물었다. 

  “치료 외에는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단호했다. 

  “전화로 무슨 치료를 합니까? 말 몇 마디로 큰 거액을 벌 만큼 치료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네요.” 그는 뭐가 불만인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형사님.... 제 아들도 똑같은 병이 있었습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치료해서 겨우 정상 궤도로 올려놓았는데, 그게 흔한 경우가 아닙니다. 이렇게 무례하게 불쑥 불쑥 찾아와서 자꾸 왜 그러십니까?” 

  “아드님의 병이 자폐였나요? 그걸 완치시켰다는 얘기 같은데....” 그는 믿기지 않는 듯 아버지를 노려봤다. 

  “오랫동안 자폐를 앓고 있다 치유된 겁니다. 그런 이유로 재미 교포도 자폐를 앓던 딸 상담을 원했던 거고요.” 

  진 형사가 작정한 듯 날 선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선생님 설마 잊지는 않았죠? 제 동생이 자폐아 손에 죽었던 사건! 그때는 뭐라고 증언하셨습니까? 자폐아는 정상적인 인지능력이 없다!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고! 사람의 말도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의 말로 표현하지도 못한다!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기 때문에, 누군가를 해할 이유도, 의지도 없다!” 진 형사는 말문이 막히는 듯 잠깐 멈췄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고 진 형사가 다시 그를 째려보며 큰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자! 폐! 는! 난! 치! 병! 이다. 분명히 그렇게 얘기했죠? 제가 얼마나 억울하면 당신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겠습니까? 당신의 그런 엉터리 증언 때문에 억울하게 간 제 동생은 어떻게 할 겁니까? 당신이 그렇게 증언했었던 그 자식도 그 당시에 인지능력이 충분했고, 말도 알아들을 수 있고, 할 줄도 알았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지금 당신 아들처럼 완치되었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뭐라고요? 인제 와서 아들 치료를 잘한 덕에 미국 고객이 엄청난 돈을 지불했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앞뒤가 안 맞잖아요!” 억눌렸던 진심이 표면으로 폭발해 나왔다. 아버지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 사건, 실종자가 선생님과 깊은 연관이 있는 분입니다. 맞죠?” 그가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진해에 오려면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죠?” 

  “글쎄요. 저는 만난 적도 없고, 왜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속사포 같은 말투와 거짓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형사를 능청스럽게 속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원장을 계속 만났을 것이다. 원장은 학원 운영에 도움을 줬고 친분도 있었다. 그게 사실이었다. 

  “뭐, 만난 적이 없다고요?” 진 형사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한 번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단호히 말했다. 

  “실종된 여자는 그 모텔 단골이라던데, 그럼 뭣 때문에 수시로 왔는지 짐작은 안 가세요? 미국 교포도 진해를 방문한 적이 없습니까?” 

  “진해에 내려온 이후에는 없습니다.” 

  “거짓말하면 큰일 나는 거 알고 계시죠? 잘 생각하세요.... 그럼 왜 선생님은 뜬금없이 진해까지 내려와 김태우 돌봐 주는 것도 모자라 그 아버지 병원비까지 지원해 주고 계십니까? 선생님이 그쪽 분야에서 전국구로 유명했잖아요. 중국어도 능통해 중국에서도 관심을 자주 보인 것으로 알고 있고요. 상해와 무석, 소주, 항주, 닝보 쪽에서 학부모 30명이 단체로 선생님 만나러 왔던 적도 있다면서요? 관광도 아니고 그저 선생님 얼굴 한 번 보려고.... 식사도 같이하셨다면서요. 우와. 대박이죠. 안 그래요? 중국 인구가 몇 명입니까? 그렇게 다재다능하시고 선의지를 가지신 분이, 아니 그냥 돈을 쓸어 담을 수도 있는 분이 말이죠. 애타게 찾고 있는 수많은 학생을 왜 전부 외면하셨습니까? 이 상황이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숨기지 말고 똑바로 얘기하세요!” 진 형사의 목에 굵고 푸른 핏대가 섰다.   

  “개인적으로 태우 아버지에게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그걸 갚고 싶은 마음으로 태우의 치료도 전념했을 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가 모든 자폐아를 치료할 수 있는 만능 치료사가 아닙니다. 조금 유명해졌다고 아픈 아이들을 끌어모으고, 학원을 확장하고, 스타처럼 언론에서 주목을 받고, 그런 떠들썩한 삶은 제가 원치 않습니다. 제 부족한 능력으로 한 아이만이라도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 인생에는 큰 의미가 되는 겁니다. 단지 운이 좋아 돈도 많이 벌게 되었던 것이지, 형사님이 얘기하는 것처럼 제가 고향에 내려온 것이 은둔의 인생, 실패한 인생이라서 칩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려온 거고 지금도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오. 이런 세상에.... 욕 나오려고 하네. 가만 보니까 아주 입바른 소리를 잘하시네요. 정말 다시 봐야겠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제 성질에 가식 덩어리들은 일단 한 방씩 먹이고 보는데.... 어휴.... 태우 아버지에게 입었다는 그 은혜는 뭡니까?” 진 형사는 머리를 세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말씀드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 형사의 의도를 잘 알고 있는 아버지는 방어벽을 쳐 버렸다.  

  나는 아버지를 쏘아붙이는 진 형사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무례해도 이심전심이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커피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아무 말이 없자 진 형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김은정 씨는 연락하고 지내십니까?” 

  아버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번에 안 한다고 했잖아요. 안 합니다!” 

  “그러세요? 꼬리가 길면 밟히게 되어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그는 계속해서 자백을 유도했지만 아버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인연이리라.... 아버지와 진 형사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 같았다.    


  32 


2005년 겨울, 일산, 윤성진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은 갈수록 번창하고 있었다. 인기라는 속성은 편향적이었고 가속화되는 경향이 있어 한 번 유명세를 타자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싸락눈에 겨울비까지 심술부리듯 내리는 오후, 호수공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 커피숍에서 원장을 만났다. 나는 포카치아와 크림 에스프레소, 원장은 티라미수와 라떼를 주문했다. 그녀의 아이라인과 브라운 아이섀도에서 짙은 요염함이 느껴졌다. 

  “요즘 학원 어때요?” 그녀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저 혼자 벅차서, 선생님 한 명 모실까 합니다.” 

  “그래요?” 그녀는 라떼 잔을 들어 천천히 음미한 후 퉁명스러운 투로 말을 이었다. “김은정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의 두 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는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의뭉한 눈초리였다. 

  “그거야.... 민이 전담할 때부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워낙 열정적이고 성실하셔서.” 

  “그렇죠. 근데 그런 선생님이 말이죠, 요즘 딴 데 정신을 팔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눈빛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욕망이란 것을 안고 살아가죠.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배경이 다른 것 같아도, 사람의 욕망은 비슷하죠. 단순합니다. 욕망의 교차로라고 아세요?” 

  “욕망의 교차로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이제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그녀가 나타나 이상한 말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욕망이 교차하는 곳이죠. 그곳은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데, 신호등과 감시카메라가 있어도 소용없지요. 욕망은 충돌하게 마련이거든요.” 

  “저기.... 원장님 지금 무슨 얘기....” 

  “잠깐만 들어보세요. 그중에서도 자존감의 교차로가 악명이 높죠. 자존감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인데 현실에서는 성적 갈망이나 돈이나 지위에 대한 갈망, 인간관계의 갈망 등으로 표면화되지요.” 

  “네.... 그런데 원장님, 도대체 뭡니까 지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욕망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를 애 둘러 하는 이유를 따지고 싶었다. 

  “그냥 교차로에서는 앞만 보고 가지 마시라고요. 전후좌우 잘 살피면서 사고 나지 않도록 조심하시라고요.”

  “아니, 제가 경주마도 아니고 무슨 앞만 보고 달립니까?” 

  “아닙니다.” 그녀는 비웃듯 입가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가지고 노는 기분이 들어, 나는 커피를 단번에 마신 후 나와 버렸다.   

  며칠 후 오전 11시. 호수공원 앞 오피스텔. 천국의 문이 열리자, 나는 지체 없이 그녀와 욕망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전속력으로 연료가 바닥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수시로 고개를 내미는 이래도 될까, 그런 자책만으로는 강한 욕구를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다. 12시 정각, 가로누운 그녀의 눈 위에 키스한 다음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은정아. 며칠 전에 원장이 나한테 이상한 말을 하더라. 우리 사이를 눈치챘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 같아.” 

  그녀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말했다. “여자들은 직감이 뛰어나잖아. 내가 보기에는 별거 없었는데.” 

  “그래? 그건 그렇고, 어제 충격적인 일이 하나 있었어.” 

  “무슨 일?” 

  “애들 수업 40분 끝나면, 원장 방에서 20분 정도 따로 치료받는 거 알지? 유민 엄마한테 급한 일이 생겼다며 연락이 왔어. 센터에 있는 유민이 좀 빨리 데려와 줄 수 있느냐 그러대. 그래서 내가 센터로 달려가 사정을 설명하고 원장 방에 들어간 아이 좀 빨리 데려가겠다고 했어. 그래서 선생님이 원장 방 벨을 누르고, 급히 유민일 데리고 나왔거든. 그렇게 유민일 우리 치료실에 데리고 와서 기다리는데, 애 폴로셔츠 가슴 부분에 큰 얼룩이 묻어 있는 거야. 미끌미끌 한 게 가래 같기도 하고.” 

  “그래서?” 

  “휴지로 닦았는데. 냄새가.... 독특했지. 아니 익숙했지.” 

  “익숙했다고?” 

  “그래. 정액 냄새더라고. 센터 내부에서 그 시간에 그럴 리는 없잖아. 아이 옷에 그런 게 묻어 있다는 게 말이 되냐.”

  “정말?” 은정은 몸을 일으키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일단 유민 엄마가 오기 전에 정민이 티셔츠 남은 거로 갈아입히긴 했어. 옷이 젖었다고 둘러댔지.”

  “그럼.... 그 옷은?”

  “유전자 검사해 보려다 그냥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줬어.”

  “세상에....” 

  “그래서 말인데 이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넌 무조건 모른 척하고 있어야 한다. 시치미 잘 떼야 돼. 이 일 아는 사람은 너하고 나밖에 없어.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또 얘기하자.”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무실로 급히 돌아왔다. 사실 은정에게 몰래 원장의 뒤를 캐보자는 제안을 하려 했지만 너무 위험한 일이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대신 나는 치료실과 센터를 오가는 유민의 바지 주머니에 막대사탕 모양의 스파이 녹음기를 넣었다. 다행히 작전은 성공했고 얼룩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은정은 충격을 받은 듯 센터를 그만두겠다며 흐느꼈고, 나는 신고도 필요 없이 당장이라도 원장을 찾아가 죽여 버리고 싶었다. 오랜 고심 끝에 그 악마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스카이라운지 커피숍에서 다시 마주한 원장은 갑작스러운 만남에 의아한 듯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손이 떨려 머그잔도 잡기 힘들었고, 케이크 접시에 놓인 포크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원장은 비열한 눈빛으로 말했다. “말하기 힘든 일이에요?” 

  “너 누구야?” 때려죽일 것 같은 기세로 나는 말했다.  

  “누구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원장의 당황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눈빛은 상황 파악을 하며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 알고 있으니까. 순순히 말해!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며. 욕망 어쩌고저쩌고 지랄하더니 아이들한테 왜 그랬어?” 

  그녀의 요동치는 마음이 숨길 수 없이 얼굴에 드러났다. 

  “널 찢어 죽이든지, 신고해 버리든지 하려다 마지막 기회를 준다. 거짓말하면 여기서 죽던지, 잡혀가든지 할 거야. 빨리 말해!” 나는 고함을 질렀다. 종업원들이 고개를 삐쭉 내밀어 소란이 나는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용히 좀 얘기해요.” 

  “이 새끼가! 죽고 싶어? 빨리 말해!” 나는 더 크게 고함을 질렀고 원장은 그제야 억울한 듯 말하기 시작했다. 나쁜 일은 유민이 상대로 딱 몇 번뿐이라며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빌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고운 화장 위로 얼떨결에 주먹을 날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인 듯, 원장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종업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남자 직원 한 명이 쭈뼛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악마 옆으로 다가가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자수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손에 잡은 머리칼이 뽑힐 듯 흔들거렸다.  

  이틀이 지났다. 원장은 내가 자신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기습이었다. 토요일 오후, 검정 오리털 점퍼를 입은 젊은 남자가 학원으로 들어와 다짜고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들과 수업 중이라 대응이 어려웠다. 그는 막무가내로 학원 집기를 던지고 부수더니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왜 찾아왔는지는 김은정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해는 아니었지만, 오해라는 말을 반복할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단 아르바이트생과 아이를 밖으로 내보냈다. 문을 닫고 돌아서자 그 순간을 기다렸던 맹수처럼 그가 매섭게 달려와 한 손으로 내 목을 움켜잡고 문 쪽으로 빠르게 밀어붙였다. 목이 졸려 숨쉬기가 힘들었다. 뒤로 밀려 쿵 하고 벽에 부딪히는 순간 갑자기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피하려 해도 목을 쥔 손아귀 힘 때문에, 오른쪽 이마에 그만 맞고 말았다. 군대에서 철모로 머리를 딱하고 맞을 때처럼, 번쩍하고 빛이 보였고 그 즉시 두개골이 깨지는 고통이 몰려왔다. 머리를 움켜쥐고 몸을 숙이자, 이번에는 돌덩이처럼 둔탁한 것이 아래에서 턱을 들어 올렸다. 턱과 이가 깨진 것처럼 아팠고 정신이 없었다. 방향감각도 상실한 채 바닥에 엎어져 쏟아지는 주먹과 발길질을 받았다. 그래도 정신 줄을 놓지 않았다. 찰나처럼 민이 생각이 났고 아내 생각이 났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희미하게나마 정신이 살아 있었고 생존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의 발길질이 멈추고 욕설이 빗발칠 때,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두 발을 부여안고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나는 사랑하는 사이처럼 넘어진 그의 몸 위로 내 몸을 포개, 쓰러진 그의 허리 밑으로 두 다리를 꼬아 감았다. 혀를 얼마나 씹었는지 입에선 피가 철철 흘렀지만,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또 마비되었다. 뱀에 몸을 감긴 듯 그라운드에서 그의 완력은 통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목을 힘껏 조이고, 쉬었다 다시 조였다. 그렇게 몇 번 반복했더니 갑자기 아래에서 퍼덕이던 그가 목석같이 변했다. 

  성용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흔들며 소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됩니다!” 

  그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쓰러진 남자의 심장에 귀도 대고 목에도 손을 올렸다. 그리곤 귀신에 홀린 듯,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상대도 없는 벽에 발길질을 시작하더니 쓰러진 남자의 손도 잡고 그 손을 끌어 자신의 상의에 문질러 대기도 했다.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안기도 하고, 주먹으로 세게 치기도 하고, 멱살도 잡았다 놓았다 하며 이리저리 공간을 휘젓고 다녔다. 그는 마치 살인한 사람처럼 떨며 말했다. “형님. 저는 이런 일 많이 겪어 봤습니다. 절대 겁먹지 마시고 제가 하자는 대로 합시다. 어차피 저는 오래 살지도 못합니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주세요. 말 맞춰야 하니까. 그리고 이 일은 죽을 때까지 우리 둘만 아는 겁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스토리를 만들어 냈고, 나는 그의 스토리대로 경찰에 진술했다. 거짓말처럼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했고, 태우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그는 교도소로 사라졌다. 그렇게 평생 싸움 한 번 안 해 본 남자를 대신해 수도 없이 주먹질을 일삼은 남자가 누명을 뒤집어쓴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나는 레인보우 원장에게 자수를 권고했지만, 원장은 내게 먼저 김은정과 불륜을 밝히라고 요구했고 어떻게 알았는지 김은정의 남자친구 사망 사건에 대해서도 은폐된 진실을 제보하겠다는 여지를 남기며 뻔뻔하게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나는 김은정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살인이 밝혀질까 두려워, 비열한 악마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타협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죄로 악마의 죄를 덮어 버렸다.


  33 


2018년 4월 17일, 진해, 윤정민 

 

  봄기운이 완연한 아침, 기분 전환을 위해 짧게 커트를 했다. 미용실을 나와 얼마나 걸어갔을까.... 뒤에서 나지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크고 둥근 선글라스와 하얀 벙거지로 얼굴을 가린 중년 여성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태우 엄마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오래전에 태우를 떠났던 사람이었다. 일본에 살고 있지만, 가끔 진해에 와서 친구도 만난다고 했다. 내게는 태우 근황을 묻고 싶은 듯했다. 궁금할 법도 할 것이다. 그녀와 산 중턱에 있는 식물원 카페로 이동했다. 외진 곳이었지만, 정성스럽게 관리된 수목원이 파노라마처럼 주변에 펼쳐져 있었고 바다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곳이었다. 

  선글라스를 벗자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눈가에는 얇게 팬 주름이 배어있었다. 그녀는 무화과 스콘과 애플 주스를, 나는 초코 스콘과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고즈넉한 카페에서 엄마뻘의 중년 여자와 단둘이 있으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 잔잔한 바다만 바라보며 멀뚱히 앉아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인지 어색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애플 주스를 마시며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말을 놓으라고 했는데 그녀는 높임말을 고집했다. 

  “아버님이 우리 태우한테 잘해 줬다고 알고 있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태우도 한번 보고 싶은데 차마 찾아가지도 못하겠고,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녀가 왜 망설이는지 대략적인 감은 왔다. 살기 힘들다고 가족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갔을 때의 그 느낌일 것이다. 

  “모든 말이 변명이지만.... 이렇게 훌륭한 친구도 있고....”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티슈로 눈가를 닦았다. 

  “마음 정리되면 태우부터 만나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엄마 원망하고 그럴 나이도 아닙니다. 제 경험으로 말씀드리면, 자폐도 나아진 상태라 예전 기억도 잘 안 날 겁니다. 원래부터 엄마는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상실감이란 것도 크지 않을 거예요. 그런 엄마가 나타나서 놀라는 것은 있겠지만요.”

  “정말 그럴까요? 봐야지, 봐야지 하는데 자꾸만 자신이 없어져서, 몇 번이나 진해에 와서도 주변만 맴돌다 갔습니다.” 

  나는 그녀 남편이 병원에서 시한부로 지내고 있는 사실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눈치 빠른 심령술사처럼, 그녀가 남편 얘기를 스스럼없이 꺼냈다. “남편도 예전부터 건강이 안 좋아서 걱정은 했었는데, 죽고 나면 어떻게 할지 앞일이 고민이 되긴 해요.” 

  그녀 말투에서 남편의 이야기는 건조함이 느껴졌다. 

  “태우가 성당 보육원에 맡겨졌을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까 고민도 했어요. 근데 아버님이 잘 돌봐 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저도 그때 형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녀는 계속 티슈로 눈 주위를 닦고 있었다.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떠나버린 엄마라도 존재하는 태우가 부러웠다. 찾아오지 않더라도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는 엄마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 봐도 좋다. 버리고 떠났어도 좋다. 단지 이 세상에 엄마라는 사람이 존재하기만이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흐느끼는 내내, 내 머릿속은 엄마 생각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나는 대화 주제를 돌렸다. 

  “어머님은 일본 어디에 계세요?” 

  “후쿠오카라고 아세요?” 

  “들어 봤습니다.” 

  “지금은 거기서 지내고 있어요. 참 많이도 다녔는데 후쿠오카는 부산하고도 가깝고 해서 좋아요. 배로도 쉽게 올 수 있고.” 

  이사를 많이 다녔다는 말은, 그만큼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의미로 들렸다. 관광하기 위해 다니지는 않았을 테니까. 

  “전 일본에 안 가봤습니다. 배로도 갈 수 있나 보네요?” 

  “물론이지요. 부산 후쿠오카 직항노선이 있어요. 제가 자주 이용하는데요. 3시간 정도면 됩니다.”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살아 있는 태우가 부러웠다. 

  “정민 씨, 학교는 나왔죠?” 

  “예....” 

  “우리 태우가 학교를 안 나온 것 같아서, 그게 좀 걱정이 돼서요.” 자폐증이 없어졌다고 해도, 초등학교도 가본 적 없는 자식을 걱정 안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태우는 앞으로 좋아하는 분야가 있으면 얼마든지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요즘은 얼마든지 길이 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가게를 하고 있긴 하지만 나중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인제 와서 제가 이래라저래라 말하는 것도 주제넘은 것 같기도 하고. 애 아버지는 못 배워서 그렇지, 착하고 의리는 있는 사람이죠. 여기 택시 운전 오래 하신 분들이나, 주유소 분 중에는 태우 아빠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 인덕 하나만큼은 저도 인정해요. 실속을 못 차려서 그렇지. 부끄럽지만 이웃에 얼굴도 못 들고 다닐 지경으로 동네 시끄럽게 싸우곤 했지요. 어디 힘든 사람이라고 하면 그냥 지나치질 못해서 자기 아들하고 마누라는 다 죽어나는데, 돈 몰래 빌려주지, 사기당하지, 신혼 때부터 보험 하는 사람들 부탁이라면 거절도 못 하지, 아무튼 못 말렸어요. 가진 것 하나 없는 주제에, 무슨 부잣집 선비마냥 남 좋은 일만 다 시키고. 집안 형편도 계속 안 좋아지고, 애는 사람 구실 못하고.... 제가 주책없게 쓸데없는 말을 다 하네요.... 다 옛날얘기지요.” 그녀의 고해성사는 끊어질 듯 계속 이어졌고,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가 죽게 만든 우리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의 이야기가 나지막이 귓가에서 멀어져 갔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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