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머즈 Oct 08. 2024

25

  25 


2018년 4월 13일, 진해, 윤정민 

 

  부족했던 잠을 몰아 자서인지 젖은 옷을 입은 것마냥 몸은 처지고 머리는 멍했다. 갑자기 태우 아버지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병원에서 만나자고 해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J 베이커리의 테라스에서 만났다. 

  그는 그새 더 초췌해져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수시로 가래 끓는 기침을 해댔다. 계절을 착각할 정도로 두껍게 걸친 외투 속에 앙상한 목이 드러나 보였다.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내쉬며 그가 말했다. “노파심에 얘기한다만 우리 만남은 아버지한테 말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말 거라.” 

  어딘가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에 그는 말을 멈추며 잠시 눈을 감았고 나는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오래 못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명줄이 기네.” 그는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말했다. “매주 일산 갈 때 소풍 가는 것 같았지. 솔직히 귀찮기도 했었는데 나도 아들놈 위해 뭔가 한다고 생각하니까 뿌듯하더라고. 그 녀석 내가 때리기도 많이 때렸거든. 한잔하고 후회해 봐야 소용도 없었어. 다음 날 또 때렸으니까....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무슨 잘못을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아빠한테 맞기만 한 거지. 친구도 없이 집에 혼자 갇혀 지내다, 나들이하니까 세상 신기한지 일산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짜증 한 번 안 부리고 그랬어. 졸다가 눈떠보면 멀뚱히 창밖만 보고 있더라고. 아픈 애 같은 눈빛도 아니었지. 박 형 아니었으면 네 아버지는 알지도 못했을 거고. 내가 죽었으면 태우 인생도 뻔히 보이지 않냐. 노숙자로 전락하거나 평생을 시설에서 갇혀 지내야 했을지 몰라. 일산에서 말을 시작해 진해에서 아예 완치가 돼버렸으니, 내가 네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겠냐....” 그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렸다. 

  그의 독백 같은 이야기 끝머리에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태우가 일산에서부터 말을 시작했었나요?”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랬지. 남들처럼 학교 다니고 뭘 배우고 그렇게까지는 못 따라갔지만, 곧잘 말을 했어. 더듬거렸어도 이거 달라, 저거 하자 그런 요구도 잘하고. 너하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웃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그러더라고. 근데 성당 담벼락 사건 때, 네 아버지가 교도소로 면회 와서 내게 신신당부하더라. 사건이 복잡해지지 않으려면 태우가 말을 못 하는 것으로 해야 한다고.” 

  그는 궁금했던 사실을 정확히 짚어 줬다. 성당 보육원 여자의 기억 속에 태우가 말을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 태우는 그 오랜 시간 어떻게 입도 뻥긋 안 하는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참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민아, 내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건 다른 게 아니라 네 아버지가 실종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꼭 알아줬으면 해서다. 네가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니는 거는 이해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형님이 그 실종된 원장을 만났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누굴 해치거나 그럴 위인이 아니잖아. 그럴 이유도 없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을 꼭 해 주고 싶어서....” 

  맞는 말이었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꼬리를 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네 엄마 사고도 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어린 마음에 상처받을까 봐 숨긴 거니까 미워하지 말고. 살다 보면 이해 안 가는 부분도 있고 어찌할 수 없는 부분도 생기는 거니까.”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가는 마당에 평생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을 품은 사람처럼 그는 힘없이 얘기를 이어갔다. “진 형사가 이 사람 저 사람 들쑤시고 다니며 아버지와 내 관계를 묻고 다닌다고 하더라. 일면식도 없던 사람, 아들은 치료해 주고 그 애비는 병원비 내준다고. 수상한 커넥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 하나 있어. 어느 날, 아버지 학원에 젊은 남자가 찾아왔다. 바빠서 정신이 없던 네 아버지에게 그 젊은 남자가 시비를 걸었던 모양이야. 나는 호수공원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학원 아르바이트생이 놀라서 달려왔더라고. 학원으로 들어갔더니 젊은 남자가 아버지를 넘어뜨리고 때리고 있었어. 말리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나한테도 주먹질을 하는 거야. 정말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반사적으로 딱 한 번 얼굴을 쳤어. 근데 하필 이 사람이 넘어지며 뒷머리를 부딪쳤던 거야. 아버지는 자기 때문에 사건에 말려든 내게 미안했을 거야. 결국 내가 감옥까지 가게 됐으니 당연했겠지. 그 젊은 사람한테도 미안하지. 앞길이 구만리 같은 사람을.”

  “그 남자는 왜 난동을....” 

  “오해가 있었어. 예전에 네가 다니던 레인보우센터에 여자 치료사가 있었는데, 김은정이라고.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 네 전담 선생님이었지. 그 여자와 아버지 관계를 오해했던 거야. 좋게 말로 해야지, 젊은 사람이 술 마시고 다짜고짜 찾아와서 그렇게 난동을 피우면 쓰나. 그러니 사달이 난 거지. 나도 경황이 없어 그랬지만.” 

  “그럼, 아저씨는 그것 때문에....” 

  “그때 나는 몸도 안 좋고 언제 죽을지도 몰라 겁도 안 나더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어. 다만, 태우가 걱정될 뿐이었지.” 

  답답한 것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아버지가 충분히 부채 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진 형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 사람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용의선상에 올랐다고 계속 그렇게 뒤를 캐고 교묘히 사람을 압박하고 그러면 안 되거든. 당연히 그 사건도 알고 있을 거야. 정민이 너는 아버지를 믿어야 해. 그 말이 하고 싶었어. 아버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정민이밖에 없으니까.”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내 마음 위로 포근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태우와의 시간을 보냈을 아버지 모습에 가슴이 시려왔다.

  그는 간곡한 부탁을 마친 듯 표정이 평온해졌다. 김은정. 떠올려 보려 해도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네 어머닌 좋은 사람이었다. 정민이 인생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야.” 그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한 번은 일산 자유로 근처 시골 한정식 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우리 태우한테도 그렇게 잘해 주더라고. 엄마 정을 그리워해서인지 태우도 잘 따르고. 진짜 엄마와 아들 같더라니까.” 

  그의 말에도 나는 엄마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다. 


  26 


2005년 봄, 일산, 윤성진 

 

  아침 일찍 민이와 호수공원을 돌았다. 아들은 재미있는 것을 발견이라도 한 듯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유치한 연인들의 나 잡아 봐라 놀이처럼 민이가 앞서 달려가고 내가 뒤쫓아 가는 게임이었다. 희한하게 아이는 달리기를 정말 좋아했고 잘 뛰었다. 뛰고 있을 때 만큼은 총기가 가득해 보였다. 

  달리기를 마치고 욕조에 함께 몸을 담갔다. 장난감으로 놀진 못했지만 욕조 안의 물과 아빠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민아, 물놀이 좋아요?” 대답은 없다. 

  “민아, 저번에 난쟁이 얘기는 뭐야? 난쟁이의 말은 어떻게 들을 수 있어요?” 지난 생일파티 때의 일이 떠올라 물었다. 그러자 민이는 반사적으로 오른 검지와 엄지를 오른쪽 눈 위아래에 대었다. 웃기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정민의 행동에 나도 똑같은 동작을 취하며 대뜸 말했다.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갑자기 민이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민이의 초점이 정확히 내 눈의 초점과 맞춰졌다.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나는 욕조 안에서 그 주문을 수백 번 넘게 외쳤고 그때마다 물에 정신이 팔려있던 민이는 반사적으로 똑같은 동작을 취하며 시선을 정확히 내게 맞췄다. 웃음이 터져 나와 오랜만에 한바탕 크게 웃었다. 흐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많이 달렸던 탓인지 아이는 목욕을 끝내자마자 금방 곯아떨어졌다. 나는 자폐 치료 관련 자료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피곤함이 몰려와 블랙커피 한 잔을 타서 책상으로 돌아왔다. 흥미로운 연구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자폐 아동이 바라보는 세상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실험이었다. 자폐아들에게는 특정한 소리가 특정 주파수를 포집하는 도청기처럼 멀리서도 생생히 들릴 수가 있고, 특정한 사물만 눈에 부각될 수도 있으며, 눈앞의 사람들도 숲속에 있는 나무처럼 배경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몸이 굳어버릴 정도로 놀라운 기사였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아들은 자신만의 안경을 쓰고, 자신만의 보청기를 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소음같이 스쳐 갈 수 있고,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가 천둥 번개처럼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 청소기나 드라이기의 바람 소리가 유리를 긁거나 사인펜을 긁을 때 나는 소리처럼 찌릿한 괴로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에 예민하고, 즐거움을 느끼는지, 치밀한 관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후로 나는 관찰 노트를 만들어 파파라치처럼 아이를 살피고 기록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집중하는 순간, 우는 순간, 짜증 내는 순간, 무서워하는 순간을 촘촘히 기록해 나갔다. 손이 많이 갔지만 수행하는 마음으로 견뎌 나갔다.    


  그렇게 관찰 노트를 기록해 가던 어느 날, 우연처럼 난쟁이의 비밀이 풀려 버렸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본 후 맥도날드에 갔다. 가볍게 요기나 할 요령으로 감자튀김과 소프트아이스크림, 콜라만 주문했다. 붐비는 사람들 틈에 정신이 없어 빨리 먹고 집에 가고 싶었지만 민이는 감자튀김을 천천히 먹었다. 나는 감자튀김 하나를 손에 들고 아들을 향해 장난처럼 외쳤다. 

  “민아!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그러자 민이는 반사적으로 오른 검지와 엄지를 오른 눈 위아래에 대기 시작했다. 나도 똑같은 동작을 취하며 과도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려 한 글자씩 천천히 외쳤다. 

  “감! 자! 튀! 김!” 

  그러자 놀랍게도 민이의 입이 움직였다. 

  “감! 자! 튀! 김!” 

  오.... 세상에.... 민이가 감자튀김을 감자튀김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놀란 눈으로 민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주술사처럼 난쟁이의 비밀을 속으로 되뇌었다.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말에 불과했지만 우리에겐 기적이었다. 그 기적은 확률과 통계를 믿는 세상을 조롱하듯 우연처럼 일어났다. 옆 테이블의 여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흘겨봤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또 외쳤다.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나는 비로소 민이가 난쟁이란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들의 눈에 사람들 모습이 작은 난쟁이로 보인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난쟁이로 보이는 사람들의 말도 알아 듣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난쟁이들이 오물쪼물하며 입을 크게 움직여도, 그 입 모양을 알아보는 것은 힘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정민이가 자신의 눈에 난쟁이처럼 보이는 작은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특별한 몸동작을 통해 난쟁이들의 말에 주목하게 만들 수 있다면, 일종의 최면처럼 그 동작을 주술로 만들 수 있다면. 돋보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집중하는 시선의 힘이 난쟁이의 눈에, 난쟁이의 입에 모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에스키모인들의 비상한 시력처럼 나는 민이의 시선이 난쟁이 사람들의 작은 입에 맞춰질 수 있도록 자기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곤 한순간이었다. 난쟁이가 나타난 이후로 정민이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고 언어발달이 급격히 빨라졌다. 센터에서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 어디에서도 생각지 못한 방법이었고 이론이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이 주문의 비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주변 사람들을 난쟁이화 시켜 나갔다. 길 위의 사람들도 수많은 난쟁이로 보았고, 지하철에서도 회사에서도 빵집에서도 카페에서도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난쟁이 사람들을 보았다. 난쟁이 세계에 온 거인이라는 자기최면은 계속되었다. 가끔은 이러다 내가 정말 미쳐 버리는 건 아닐까 덜컥 겁도 났지만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거인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다. 


  햇살 좋은 어느 날, 센터에서 정민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갓길에 차를 세운 뒤, 커피를 산 다음 재빨리 차로 돌아왔다. 차는 열쇠가 꽃인 채 시동이 걸려 있었는데 잠그지도 않았던 문이 저절로 잠겨 있었다. 오래된 차라 가끔 일으키는 고장이었다. 조수석에 멀뚱히 앉아 있는 아들을 향해 문을 열라고 소리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커피를 보닛 위에 올리고 혼자서 손짓, 발짓 온갖 발버둥을 치고 있으니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휴대폰도 차 안에 두고 나와 보험사나 서비스센터에 전화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난처해 하다 불쑥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난쟁이의 주문이었다. 조수석 앞 유리로 살며시 다가가 난쟁이의 주문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텔레파시를 맞은 사람처럼 아이가 내 눈을 정확히 보았다. 나는 왼손으로 창문을 내리는 버튼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이는 시선도 옮기지 않고 차창을 천천히 내렸다. 나는 이 마법 같은 일로 집에 돌아오는 내내 눈물을 삼켰다.


  5월 29일 오후, 사표가 수리되었다. 치료 시기를 놓치면 후회할 것 같은 생각에 내린 결단이었다. 지난 시간은 금방 잊혔고, 오랜 시간 규칙적으로 단련된 회사 근육들도 빠르게 풀려나갔다. 


  27 


2018년 4월 14일, 진해, 윤정민 

 

  오랜만에 진 형사에게 연락이 왔다. 오후 2시. 로터리에 있는 전통찻집 「나무향기」. 우리는 오랜 시간 이별했던 어색한 연인처럼  재회했다. 실종된 여자는 아버지와 얼마나 깊은 관계였을까. 친구, 연인, 사업 파트너, 단순한 지인, 떠오르는 단어들을 쭉 나열해 보았다. 갑자기 모든 설정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살해당한 것일까.... 태우 아버지의 간곡한 호소에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연관되지 않기만을, 아니 솔직히 범인이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진 형사의 부풀어 오른 한 쪽 눈두덩을 언뜻 봤을 땐, 잠을 푹 잤든지 설쳤든지 아니면 누구에게 맞았든지 셋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핼쑥한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까지 보니 차 안에서 잠복중 졸다가 모서리에 부딪혔을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가 안대도 안 한 우스꽝스런 눈으로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수사하면서 발달장애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어요. 그 병이 일반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치료 확률도 가능성도 가늠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병에다가 가족들에게 완전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어둠의 세계에 가둬버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 사건은 뭐랄까.... 모종의 원한이 개입된 사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겉도는 넋두리였다. 구절구절 말을 끊어가며 나의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선 진실함이 느껴지지 않았고, 느낌 정도를 지껄이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 아닌가. 이해하기는커녕 마음은 오히려 정반대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발달장애를 앓고 있던 태우가 그의 동생을 죽였다고 정신병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세상과 영원히 격리해야 한다고, 울며불며 탄원서까지 냈던 사람이 갑자기 진정성을 가지고 자폐를 이해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인간이 절대 쉽게 바뀔 수는 없었다. 그의 위선에 부푼 눈두덩을 보며 느꼈던 작은 동정심마저 사라졌다.      

  “그건 그렇고, 이제 필요한 조사는 다 마쳤는데, 딱 한 가지! 정민 씨한테 확인할 게 있어서 보자고 했어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정민 씨가.... 알아보니까 예전에 자폐가 심했던 것 같은데, 실종자가 운영한 학원에 다니며 많이 좋아졌다죠? 맞습니까?” 

  “죄송하지만 사고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 그렇죠.... 그런데 말이죠. 레인보우인가에 다닐 때, 담임선생님 혹시 기억 안 나나요? 김은정이라고.”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는 헛기침을 크게 하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말로는 김은정 씨가 잘해 줬다고 하던데. 기억 못 하나 봅니다. 그럼 김은정 씨 남자친구가 아버님 학원에서 사망한 거는 알고 있나요?” 

  나는 처음 듣는 말인 것처럼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 눈동자 속을 휘젓는 그의 눈이 번쩍였다. 

  “그 사건 때문에 말이죠. 김성용 씨가 상해치사죄로 교도소에서 5년을 복역했다 이거예요. 정당방위니, 여타 집행유예니 그런 거 전혀 없이 폐암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람이 형집행정지도 받지 않고요. 이건 어떻게 생각해요? 그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가관인 것은 김은정 씨의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아버님한테 왜 찾아갔느냐 이겁니다. 그것도 낮술까지 잔뜩 마시고 말이죠. 오해가 있었다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김성용 씨가 싸움을 말리다 실수로 사고가 난 거라는데, 형사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때 판결이 그렇게 끝났다 해도. 그래서 말인데....” 

  그는 대추차로 목을 적셨다. 그 다음 말은 뻔했다. 아버지가 김은정과 사귀는 관계 아니었나. 그런 모습을 본 적 있으면 말해 달라. 그런 쪽으로 연관 지어 추궁할 것이다. 설령 오해가 아니라 연인 관계였다 하더라도, 그게 이번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는 것인가. 그가 아버지에게 가진 악감정 때문에 과거의 사건들을 죄다 들추어 탈탈 털고 싶은 것이 아닌가. 죄가 되는 것이든, 추한 것이든 어떤 것이라도 찾아내 망신과 모욕감을 주고 싶은 것 아닌가. 태우가 자신의 동생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태우를 보호해 준 아버지가 배후의 원수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혹시 아버지가 김은정 씨하고 만나는 것 본 적 있습니까? 일산에서건 진해에서건 언제라도, 한 번이라도, 기억나는 것 있습니까?” 예상했던 질문이 날아왔다. 기억나지 않았고 본 적도 없었고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가 대추차 한 모금을 마신 후 널뛰기하듯 질문을 마구잡이로 날렸다. “제가 김은정 씨 만나 보니까, 아직 결혼도 안 했고 눈에는 수심이 가득한 게 그동안 평탄하게 지낸 것 같지는 않아 보이더라고요. 레인보우에서도 남자친구 사건 이후 퇴사했고. 그 건에 대해 잘 생각해 보고 혹시라도 기억나는 거 있으면 얘기해 주시고....” 

  그가 차를 마신 후 화제를 바꿨다. 

  “지금 실종자 남동생이란 사람이 진해에 내려와 있어요. 사람이 미국물을 먹어서 그런가 세련되고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게 저 같은 촌놈하고는 달라 보이데요. 아무튼 확인해 보니, 실종된 레인보우 원장의 원래 전공은 미술치료라고 해요. 뭐. 음악, 미술, 운동 등 그쪽 분야가 다양하긴 하겠죠. 미국에서는 가정방문 교사로 경험을 많이 쌓았다고 그러고. 한인교회 같은 데서 아는 사람이 소개해 줘서 한인을 상대로 가르치기도 했고, 그중 한국에 들어온 사람들이 입소문을 내서 미국에 있을 때도 한국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해요. 혹시 정민 씨도 방문 치료 받은 적 있어요?” 

  “없습니다. 주로 집에서 엄마가 가르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엄마가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아들이 이렇게 말 잘하게 된 거 보셨으면 좋았을 걸.” 

  비꼬는 말투처럼 들렸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돈이 많다면 굳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외부 시선에 민감한 부자라면 특히나 그럴 것이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주치의처럼 개인 치료사를 고용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실례지만 그 동생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번엔 내가 질문했다. 

  “뭐, 딱히 고정된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요. 누나하고 한국에 같이 들어와서 일산에 살았지만 거의 교류도 안 하고 지냈다는데.... 가끔 누나 하는 일을 도와주기는 했대요. 부모님은 유태인과 동업으로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서 큰 보석상을 할 정도였으니까 재력은 있었겠죠. 근데 왜요? 만나본 적 있어요?” 

  “아닙니다. 그냥....” 

  “누나가 진해에 왜 온 것 같으냐고 물어보니까 전혀 짐작을 못 하던데, 그 이유야 한 가지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뭐 벚꽃을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가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말을 흐리는 것 같았다. 

  “실종자 수색은 했습니까? 너무 조용한 것 같습니다.” 

  “조심스런 부분이 있어 아직 비공개 단계에요. 이제 군항제도 끝났으니까 본격적으로 해 봐야지요. 근데 문제는 실종자 동선 자체가 안 잡히는 데 있어요. 이 동생이란 사람도 그래요.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누나 실종된 지도 모르고 한가로이 홍대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었을까. 레인보우에서는 원장이 갑자기 사라져서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전화를 받더니 미안하다며 찻집을 먼저 나갔다. 그의 전화벨은 만날 때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울렸고, 그럴 때면 그는 예외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았다. 





이전 08화 2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