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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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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0일, 진해, 윤정민 

 

  햇살에 부서지는 잔잔한 물결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서니 외벽이 유리로 반짝이는 건물이 보였다. 바다색에 대비된 새하얀 외관이다. 마치 지중해의 어느 도시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고급 리조트 같은 이 병원에 희한하게도 주일과 태우의 아버지가 함께 머물고 있다. 기억을 찾기 위해, 아니 아버지를 파헤치는 진 형사를 막기 위해 경쟁이라도 하듯 나는 그의 행적을 뒤쫓고 있었다. 일산에 다녀온 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온종일 멍했다. 수도 없이 바닥을 긁어댄 탓에 신발 꼴도 말이 아니었다. 진 형사의 추적에 아버지마저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가슴에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든 진 형사보다 먼저 알아내야 했다. 

  건물은 필로티 형태로 1층은 불필요한 듯 보이는 공간이 많았다. 로비는 한방병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한약 냄새가 진동했다. 보안업체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날 유심히 살펴보다 폭발 직전의 화약고 같은 마음을 들여다본 듯 슬쩍 눈길을 돌렸다. 나는 안내 데스크로 곧바로 걸어가 신분증을 제출하고 태우 아버지를 찾았다. 안내원 여자는 경찰처럼 유심히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요양병원이라 하기에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녀는 전화로 확인을 한 다음, 숫자 ‘401’이 적힌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숫자 버튼이 바로 눌러지지 않은 엘리베이터는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검정 네모 판에 카드를 찍고서야 4층으로 갈 수 있었다. 내려서도 반겨 주는 것은 천장에 달린 CCTV 뿐이었다. 수상한 짓일랑 꿈도 꾸지 말라 엄포를 놓는 듯했다. 401~405호를 가리키는 표시등을 따라 좌측으로 길게 이어진 손잡이용 나무 봉을 두드리며 쭉 걸어갔다. 401호 문이 약간 열려 있어 얼굴을 내밀자 움푹 볼이 들어간 검정 낯빛의 남자가 활짝 웃었다. 반짝이는 눈빛에 선한 인상임에도 아프기 때문인지 황갈색의 탁한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다. 하얀 얼굴의 태우와는 부자 관계로 짐작조차 못 할 것 같았다. 그는 텔레비전 옆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내부는 레지던스 호텔처럼 깔끔했다. 이런 고급 시설의 비용을 아버지가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찜찜했다. 

  “저기, 한번 봐야지 했는데 세월이 많이 가버렸네요.” 코를 훌쩍이며 그가 말했다. 

  “죄송한데.... 아버님이 말씀 놓으시는 게 편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가 머뭇거리더니 말을 놓았다. “얼마 전에 태우 만났다면서? 예전에 둘이 참 친했는데.” 그의 머뭇거리는 말투에서 내가 찾아와도 말조심해 달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내 당부로 바꿔야 했다. 

  “아버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아버지 만나더라도 제가 여기 온 것은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됩니까?” 

  “그래....”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버님도 아시겠지만 요즘 실종 사건 때문에 형사가 아버지와 저를 집요하게 조사하고 있습니다. 혹시 실종된 사람과 아버지가 어떤 관계였는지 아시면 꼭 좀 알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그는 무거운 입을 떼고 가래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어떤 당부를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아버지가 위험합니다.” 

  그가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일산 박 형한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박 형이 네 아버지를 소개해 준 이후 매주 토요일이면 빠짐없이 우리가 일산에 갔었거든. 딱 한 번 레인보우센터 원장이라는 여자를 같이 만난 적이 있고, 그 이상 아는 것은 없어. 윤 형이 내게 말을 전혀 안 했어.” 거짓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녀를 남몰래 만나 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형사라는 사람. 여기 J 빵집 사장님하고 얘기하다 보니까 아는 사람이던데.” 

  “어떻게요?” 

  “예전에 태우 엄마가 집 나가기 전에 미용실에서 오랫동안 일했었거든, 그때 진 형사 모친이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면서 서로 친하게 지낸 거로 알아. 나도 그분이 어렴풋이 기억나. 그 집안 얘기도 자주 들었는데....” 

  “그 형사 힘들게 자랐다고 하던데요?” 

  “그 집도 참 얄궂은 일이 많았어. 부친은 진 형사 동생이 돌배기도 안 될 때 군대에서 수중 훈련인가 하다가 죽었다고 한 것 같고. 모친 혼자 화장품 일하며 남자애 둘을 키우려니 오죽 힘들었을까 싶어. 그 네모난 가방. 자넨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예전에 요구르트 아줌마들이 들고 다녔던 가방보다 조금 큰 거 들고 다니던 게 생각나. 그 양반은 하도 웃어서 눈가에 탈처럼 주름 같은 것도 많았는데, 그런 얼굴로 어떻게 화장품을 팔고 다녔는지 몰라. 그때도 의아했었지. 그래도 아들이 형사도 되고 하늘에서 여한이 없겠네.” 

  “진 형사 모친은....” 

  그는 조용히 창밖을 보다 또 가래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형사 나이 차가 꽤 나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어릴 때 사고로 갑자기 죽었어. 초등학생 정도 되었을 때였나. 성당 놀이터 담벼락 위에서 애들이랑 놀다가 떨어졌지. 별로 높은 곳은 아닌데 담장 유리 조각에 바지 단이 걸려서 그만.... 그 이후에 그 양반도 반쯤 정신이 나가 버렸어.” 

  ‘놀이터 담벼락에서....’ 희한한 인연이었고 섬광처럼 주일의 말이 떠올랐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때 담벼락 위에는 태우와 진 형사 동생이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는 태우 얘기는 쏙 빼놓고 마치 남의 얘기하듯 말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인가.... 

  “저기.... 태우도 그때 같이 놀지 않았나요?” 

  역시 예상치 못한 듯 그가 멈칫했다. 그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랬지..... 사실 내가 사정이 생겨서 태우를 몇 년간 성당 보육원에 맡긴 적이 있는데 그때 같이 놀다가 그랬다고 들었어. 감옥에 있을 때지. 서로 잘 아는 집이라 태우 엄마라도 집에 있었다면 일이 그렇게까지 커지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감옥에 있지. 아이 엄마는 집 나갔지. 아이는 자폐아지. 그러니 사건이 어떻게 흘러갔겠냐? 윤 형이 도와줘서 무사히 해결되긴 했는데....” 

  “그러면 진 형사도 태우를 알고 있겠네요?” 

  “그건 오래전 일이라 확실치 않아. 태우도 많이 컸고, 보육원에서 나온 이후로는 계속 나랑 살았으니. 그리고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태우가 말도 못 하고 자폐증이 심했으니까.... 지금 보면 몰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진 형사는 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만약 태우의 고의가 사실이라면 그는 태우를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혹시 아버님, 실례지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오해는 마세요.... 그냥 태우한테 치료비도 안 받고 아버지가 어떻게 학원을 운영했는지 이해가 안 가서요. 형사도 많이 궁금해 하고요.” 

  “그럴 만도 하겠지.... 그것도 아버지가 얘기 안 한 모양이네. 그럼 지금 내 얘기는 못 들은 척 흘려버려라. 성공한 재미 교포 한 명이 아버질 많이 도와줬어. 이름이 제시인가 했는데, 그 교포 딸을 완치해 줬거든. 일산에 있을 때 너도 자주 어울려 놀고 그랬지 아마.” 

  완치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을까. 암 수술도 아니고 난치병으로 분류되는 정신질환을 완치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재미 교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깡마른 모습이었지만 넓은 어깨 골격 때문인지 강인해 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듯 보였다. “아버지가 사고 얘기는 안 하던가?” 내가 친 사고를 말하는 것인가.... 그는 우두커니 내게 등을 보인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사고를 쳤지. 그것 때문에 자네 아버지가 태우를 보살펴 준 거야. 돌봐 줄 사람이 없었어. 보통 아이도 아니고 자폐증이 심한 아이를 키워 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 피가 섞인 사람들도 꺼리는 마당에.... 그 형사 동생이 죽었던 성당 안에 작은 보육원이 하나 있어. 부모 없는 아이를 돌봐 주는 곳인데, 다행히도 거기서 태우를 맡아줬지. 자네 아버지도 친자식처럼 계속 치료해 주고. 출소하고 나니까 말 한마디 못 하던 태우가 거짓말처럼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아버지라는 말을 했어. 확실히.” 

  우두커니 뒤돌아선 그의 뒷모습이 큰 방패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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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여름, 일산, 윤성진 

 

  정민의 발달이 생각보다 더뎌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스트레스 복원력도 강했고 처질수록 스피드를 올리는 모성이라는 정신력이 있었다. 센터의 치료는 주 5회로 늘렸고, 30분 단위로 촘촘한 계획표를 만들어 허투루 낭비하는 시간도 없앴다. 자신을 위해 쓰는 시간도 없어서인지 아내의 얼굴에는 뾰두라지가 자주 났고, 트러블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황사 때나 쓰던 하얀 마스크까지 애용했다. 야구모자도 필수 아이템이었다. 맵시를 위한 것은 아니고 폭발한 실험실에서 금방 나온 듯 산발한 머리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헐렁한 면 티셔츠만 입고 다니는 것은 물론, 기초 화장품에도 돈을 쓰지 않았다. 


  출근 지하철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내부는 요란한 에어컨 소리에도 후덥지근했고, 산소가 부족한 듯 머리는 몽롱했다. 세 정거장 정도 지나자 운 좋게 앞자리가 비었고 앉자마자 상체를 구부린 채 턱을 괴었더니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언덕 위로 몸이 높이 떠올랐다. 아래의 많은 사람들이 믿기지 않는 듯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점점 작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고 있었다. 보라고. 내가 날 수 있다고.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아 아팠던 마음이 하늘 위에서 하얀 구름처럼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선가 귓가에 익은 소리가 들려온다. 충무로. 충무로역입니다. 눈을 뜰 수 없었다. 생생한 그 느낌을 꼭 붙들고 싶었다.     

  정민이는 만화를 좋아했고 우리는 그것을 강화제로 활용했다. 잘 하면 리모컨으로 플레이를, 못 하면 스톱을 반복하며 아이의 학습 동기를 끌어냈다. 동작 모방은 쉽지 않았다.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만세 동작부터 팔짱 끼기, 손가락으로 엄마 가리키기, 최고의 엄지 척, 손가락으로 브이 하기 등 아주 기본적인 동작 모방만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을 시켰지만, 그 단순한 동작조차 정민이는 따라 하지 못했다. 머리, 어깨, 무릎은 물론이고 눈, 코, 입, 귀도 구분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도 없었고 아빠와 엄마도 구분하지 못했다. 장소와 시간개념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 없는 아들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아내와 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고함을 치다 못해 울부짖는 경우도 많았다. 울화통이 치밀어 물건을 집어 던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아들은 엄마 아빠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줄다리기하듯 희망을 당겼다 절망에 끌려갔다. 무엇보다 제일 마음이 아픈 점은 아들이 시선을 전혀 맞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눈 맞춤이 안 되고 있었다. 어쩌다 과자를 주기라도 하면 번개같이 스치는 눈길이 전부였다. 양손으로 머리를 꽉 붙잡고 못 움직이게 해도, 무서운 가면을 쓰고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마주해도, 아들의 눈은 사팔뜨기처럼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시선 피하기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민이는 필사적으로 눈길을 외면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 시선 맞추기를 성공시킬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회사 앞에서 도너츠 1상자를 사서 팀원 두 명과 나눠 먹었다. 오늘은 임원들이 자리를 비운 무두절인 만큼 퇴근을 서둘렀다. 사기 진작에는 칼 퇴근만 한 것이 없으니까. 모두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나의 인기 비결인 군더더기 없는 퇴근 동작으로 서둘러 혜경이 레인보우센터를 오가며 봐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내 생일파티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은 지하철 3호선 정발산역에서 멀지 않은 도로변 상가 2층에 있었다. 큰 규모는 아니었어도 내부엔 검정 연통과 연결된 화덕이 갖춰져 있고 정결하게 하얀 유니폼과 모자를 쓴 직원들이 있었다. 조명은 은은했고 음악은 경쾌했다. 무엇보다 손님들이 많지 않아 안심되었다.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가게였다. 

  마치 가장 좋은 자리를 예약했던 것처럼, 창가로 나를 안내해 줬던 여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왔고, 아내와 아들이 그녀를 뒤이어 따라왔다. 혜경의 손에는 작은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네 가지 치즈를 섞은 피자와 해물 파스타, 양송이 크림수프와 기본 샐러드를 주문했다. 혜경은 테이블 중간에 케이크를 올리고 초를 꽂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혜경이 초에 불을 켰다. 안타깝게 민이는 아무리 연습해도 초 불기, 풍선 불기, 피리 불기 등 숨을 내쉬는 동작을 흉내 내지 못했다. “후”라는 동작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끝나고 어찌 된 영문인지 어색한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초가 꺼져 있었다. 나도 아내도 초를 불지 않았기에 아내는 믿기지 않은 듯 날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아들의 촛불 끄기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뭉클거렸다. 창밖으로 이상한 물체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공기가 가득 들어간 키다리 풍선 인형이었다. 어딘가에서 가게를 오픈한 듯 보였다. 마케팅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인지 2개의 풍선 인형은 보통 봐 오던 것보다 훨씬 크고 길었고 마주한 채 이쪽저쪽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두 팔을 벌린 채 털썩 인도로 넘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기울 때면 길가는 행인들이 놀라서 피할 정도로 컸다. 창밖의 거인들이 난쟁이 가족들의 외식을 구경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기특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식사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식사를 끝내고 호수공원을 가로질러 집을 향해 걸었다. 아이의 오른손은 내가, 왼손은 아내가 잡았다. 양쪽에서 민이 손을 힘껏 들어 그네처럼 흔들기 놀이도 했다. 시원한 여름밤의 청량감이 느껴졌다. 등목하고 초저녁에 마실 나가던 어린 시절의 그 기분이 느껴졌다. 초를 불어서 끈다는 것은 한두 살 아이도 쉽게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일지 모르지만 민이에게는 아무리 가르쳐도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커다란 장벽이었다. 도로를 가로질러 호수공원 반대편으로 건너와 집에 도착했을 때, 어디선가 모기 우는 소리처럼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혜경도 비슷한 소리를 들은 듯 보였다.

  “민아, 왜? 오늘 기분 좋았어요? 맛있었어요?” 나도 아들의 답변은 기대하지 않고 엄지를 세우며 거들었다. “민아, 오늘 아빠 생일 기분 최고다! 민이가 초 불어 줘서 아빠 기분 최고다. 그렇지?” 

  그때였다. 민이의 중얼거림이 또렷이 들렸다.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21 


2018년 4월 11일, 진해, 윤정민 

 

  엄마 생각에 잠을 설쳤다. 식욕도 없고 운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수리에 대못이 박힌 것처럼 온갖 걱정이 떠나가질 않았다. 진 형사처럼 나도 아버지에 대한 의심이 커져만 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난쟁이의 주문을 외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만 좀 하라고 고함을 치려다 결국 책상 위 헤드폰을 집어 들었다. 병원을 가야 하나. 안 가도 괜찮을까. 오락가락 답도 없는 고민만 반복했다.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아침부터 짜증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자기만의 의식을 끝내고 주섬주섬 옷을 입던 아버지가 외출할 모양새더니 대뜸 내게 동행하길 권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연례행사처럼 드문 일이었기에 그를 따라나섰다. 목적지는 그의 동창이 오픈한 탁구장이었다. 중학교 때, 가끔 아버지와 탁구를 치곤했다. 그는 셰이크핸드, 나는 펜홀더였다. 그의 비장의 무기인 역회전 커트에 내 공은 번번이 네트에 걸리곤 했다. 한 면이 이질 레버로 되어 있던 그의 라켓이, 탁구장 벽면에 붙어 있던 동작 큰 유럽 선수들의 사진이 떠올랐다. 

  예전과 달리 구 시내엔 탁구장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작은 문방구 앞에서 한적한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큰 스피커에서 요란한 음악 소리가 났고 멀리서 풍선 인형들이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탁구장에 들어가니 백발의 노인들뿐이었지만 왕년에 탁구 좀 쳤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네모반듯한 탁구장은 새것이 풍기는 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펜홀더 채 하나를 잡아 습관처럼 머리에 대고 비볐다. 만족스럽게 고무는 뻑뻑했다. 아버지는 머리가 훤히 벗어진 사장을 오랜 고향 친구라고 소개했다. 아버지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탁구장 가장자리를 돌며 내부를 살폈다. 벽면 한쪽에 세워진 트로피를 보니 사장님도 한 탁구 하는 사람이었다.  

  얘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서 인스턴트 커피를 1잔 타 밖으로 나왔다. 축하 화환 대여섯 개가 입구 옆에 나란히 서 있었고, 풍선 인형들이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공기를 가득 넣지 않은 탓인지, 터져 버린 것인지, 인형 하나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져 일어날 줄 몰랐다. 쓰러진 인형을 곧바로 세웠다. 그 순간, 이상한 말이 귓가를 스쳤다.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힘껏 휘두르는 스매싱에 뒤통수를 가격 당한 느낌이 들었다. 잔상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레스토랑. 동그란 피자의 하얀 크림과 초콜릿 케이크 위의 초. 달그락거리는 소리. 창밖에서 키다리 풍선 인형 2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인형들의 말이 끝나자 기억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다시 떠올리려 머리를 쥐어짜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얘기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우리는 옛날 규칙대로 두 게임을 쳤다. 움직임을 최소화하려는 동작을 제외하곤, 회전을 가하는 그의 손목은 유연했고 동체 시력은 날카로웠다. 나는 두 세트를 모두 내주며 완패했다. 땀으로 등에 들러붙은 셔츠를 떼며 나오니 한결 개운했다. 문방구를 돌 때쯤, 난쟁이 이야기를 슬쩍 꺼내자 그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탁구 이야기로 동문서답했다. 나는 그의 주문 속 난쟁이와 내 기억 속 난쟁이의 관계를 알고 싶었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더니 하늘에서 약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탁구장 앞에서 흐느적거리던 키다리 풍선 인형들이 떠올랐고 느닷없이 엄마의 얼굴이 나타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뛰기 시작했다. 케이크를 바라보던 엄마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 멀어지는 접시 소리, 포크 소리,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 주변 난쟁이들의 중얼거림이 희미하게 다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끊어진 장면들이 빗속으로 스쳐 지나는 거리의 풍경 사이사이로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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