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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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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겨울, 일산, 윤성진 

 

  투자자들이 물소 떼처럼 쇄도하고 있었다. 외국 기관이 포문을 여니 국내 기관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무실은 온종일 전화벨이 울려댔다. 사자라도 한 마리 나타나서 으르렁 포효 한 번만 해 줬으면, 이 무리를 흩어 놓았으면.... 그런 상상에 빠질 정도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주가가 흐름을 타기 시작하자, 광기를 실은 열차는 마구잡이로 증편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ABA 공부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새로운 비전이 신기루처럼 아른거렸고, 그럴수록 회사 생활에 흥미는 떨어져 갔다. 

  사무실로 내려가자 국제전화가 오고 있었다. 존 김이 U 증권 김현수를 통하지 않고 직접 전화를 건 것이었다. 

  “시간 되시면 저녁 대접하고 싶습니다. 저희 가족이 이번에 한국에 몇 달 동안 체류할 예정이라 소개도 드리고 식사도 같이 하고 싶습니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개인 투자자의 식사 권유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애널리스트나 펀드매니저도 피하는 마당에.... 하지만 자발적으로 가고 싶었다. 그는 세력도 아니었고 개인에 불과했지만, 매력적이고 성공한 재미 교포였다. 게다가 거부였다. 그의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한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생겼다. 

  “네. 일정 주시면 맞춰서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후회가 몰려왔다. 공짜 없는 세상이니 독배를 마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의 웬만한 중요 정보는 내 손도 거쳐 간다는 것을 그도 잘 알 것이다. 게다가 그는 수상하게 한 번도 수면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서울에 첫눈이 내린 날, 퇴근 후 지하철 3호선 동국대역 3번 출구로 나오자 가로수 옆에서 휘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곧게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의 비서였다. 그는 감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경호원처럼 한쪽으로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막 사우나를 마친 사람처럼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삼지창 문양의 외제 차 내부는 중후했지만, 화사한 시트 때문인지 권위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은은한 원두커피 향에 잔잔한 재즈가 흘렀고 앞좌석 등받이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책이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차는 방향을 틀어 가로등이 희미한 오르막길을 헤치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길 양편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연립주택들의 창문에서는 작은 실루엣만 보일 뿐 적막감만 흘렀다. 언덕 위에 다다르자, 주변이 환해지기 시작하며 풍경이 일순간 바뀌었다. 흩날리는 눈발들이 가로등 불빛에 더 선명하게 보였고 트로이의 목마나 어울릴법한 철제 성문이 나타났다. 멀리 반짝이는 남산타워의 화려한 조명에 괜스레 마음이 설레었다. 차가 멈추자 뒷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차주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존 김은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하더니 포옹까지 했다. 남자끼리 포옹이라니.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좋은 향이 났다. 내게서 피로로 찌든 냄새가 나지 않을까 움찔거렸다. 

  “아닙니다. 어차피 집으로 가는 방향이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잠시 다른 세계, 나와 어울리지 않는 세상으로 잘못 들어와 버린 것 같은 이질감이 들었다. 저택은 부잣집다웠다. 천고는 높았고 로맨틱한 샹들리에 조명이 달려 있었으며 새하얀 벽면에는 학교 음악실에나 걸려 있을법한 바흐, 베토벤 같은 음악가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래로는 한없이 행복해 보이는 가족사진들이 보였다. 한쪽 구석에는 야마하라고 적혀 있는 미색 그랜드 피아노가 먼지 하나 없이 매끈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슬라이딩도어 너머로 넓게 펼쳐진 정원은 조경에 특별한 점은 없었지만, 루미나리에처럼 모서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늘어선 잔잔한 조명이 돋보였다. 잠시 후, 요리사로 보이는 남자 1명과 서빙하는 젊은 남녀 2명이 밝은 미소로 인사하며 등장했다. 출장 뷔페 같은 것인가.... 50대로 보이는 남자는 통통한 체격에 하얀 모자를 쓰고 있어 관록 있는 셰프 분위기를 풍겼고, 서빙하는 20대 2명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할법한 깔끔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젊은 여자가 음식을 테이블에 살짝 내려놓고 돌아설 때면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부인으로 착각했던 여동생은 단아한 인상이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기울이며 인사하는 방식이 특이했는데, 묘하게도 그 비대칭적 모습에서 세련됨이 묻어났다. 사람을 초대하는 파티에 익숙한 듯, 시종일관 자연스럽게 몸에 밴 그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내 일상과는 동떨어진 신비한 무엇이 있었다. 낯선 풍경이었지만, 생각만큼 식사 시간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은은하게 쏟아지는 빛의 정원 위로 내리는 하얀 눈이 운치를 더해줬다. 스테이크 두께는 적당했고, 굽기와 맛 역시 훌륭했다. 접시 앞에는 통후추와 소스도 여러 종류가 놓여 있어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디저트로 나온 과자와 케이크는 예쁜 모양만큼 맛있었고, 와인도 이것저것 마음껏 마셨다. 존 김과 여동생은 어색하게 와인 맛을 품평하지도, 브랜드의 역사를 얘기하지도 않았다. 친구처럼 대화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편안했고, 좌충우돌 그의 미국 생활은 흥미진진하고 재미가 있었다.    

  블루마운틴 커피 향을 음미할 때,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들려왔다. 글렌 굴드의 앨범이었다. 거실 사면을 둘러싼 기다란 목의 직사각형 스피커의 음질에서는 현장감이 느껴졌다. 좋은 스피커만큼, 그는 음악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알파벳 B로 시작하는 음악가들을 특히 좋아한다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신기하게도 벽면은 바흐, 베토벤, 브람스 등 B군 일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딸이 음악을 하고 있고, 다음에 딸의 피아노 실력을 보여 주겠다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왜 딸은 오지 않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언어 얘기도 나왔는데 재미 교포인 그는 내 영어 실력을 치켜세웠다. 기분이 우쭐해져 중국어와 일본어도 잘 한다고 떠벌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그와 여동생은 상대에게 호응을 보일 때마다 눈썹을 위로 올리며 눈동자를 크게 뜨곤 했다. 보기 드문 과장된 반응이라 어색했지만 억지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끝까지 딸과 아내 얘기는 하지 않았다. 

  벽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가 9시 35분을 가리키며 집으로 돌아갈 시간임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시계 위 고동색 나무 십자가를 보며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아들은 몇 살인가요?” 일어서려는 순간 그가 불쑥 정민이의 나이 얘기를 꺼냈다. 피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여덟 살입니다.” 

  “한국에서는 학교 갈 나이겠네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네....” 정신을 차리며 답했다. “따님도 한국에 같이 들어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저번에 산책을 좋아한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주제를 그의 딸로 재빨리 치환했다. 

  “네. 같이 들어오긴 했는데 다음에 또 시간이 되면....” 

  그의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고뇌가 느껴졌다. 그렇게 여유 있어 보이던 여동생도 처음으로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표정에 드리운 무거운 그림자는 상처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표식이었다.  

  존 김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감색 롱코트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지하철역으로 왔다. 다른 세계에 발을 잘못 디뎠다가 다시 내던져진 것 같은 허무감이 들었다. 그들의 이미지가 고도로 계산된 것일 수도 있지만, 편견이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친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의 익숙한 풍경은 변함없이 저마다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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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9일, 일산, 윤정민 

 

  일산행 버스를 탔다. 내가 어떤 곳에서 자랐는지,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주엽역에 도착해 곳곳을 기웃거려 보아도 낯선 곳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하며 육교를 건너 호수공원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큰 분수대 뒤편으로 아담한 2층 건물이 보였다. 오른편엔 자전거 대여소가 있고, 1층은 작은 매점이 있었다. 건물 주변은 워터파크, 스노우파크 같은 거대한 놀이공원과 화려한 쇼핑센터 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학원이 있었던 2층은 공원 관리사무소로 바뀌어 있었다. 사무실 내부는 분수대를 향한 넓은 창으로 햇살을 가득 담고 있었다. 학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건물을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약속 장소인 장미정원에 도착했다. 아치형 장미 덩굴 입구로 들어서자, 두 번째 나무 벤치에 둥글납작한 화가 모자를 쓴 노신사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빵집 주인이라기보다 마법사를 연상케 하는 외모였다. 굳어버린 기억의 틀을 단번에 녹여 줄 할아버지 마법사인가.... 다가가니 범상치 않게도 이번엔 흑백의 둥근 바둑돌 무늬의 바지가 눈에 띄었다. 장미 향 가득한 공원에서 넌지시 호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여유 있고 따뜻해 보였다. 주변에 늘어선 많은 카페를 마다하고 이곳을 선택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노신사는 고개를 돌리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알아본다는 표정이었다. 

  “그새 정말 많이 컸네. 오래 못 봤어도 보니까 딱 알겠어. 저기 봐봐. 여기도 진해처럼 벚꽃이 많지. 나 기억 안 나지?” 

  노신사는 일산과 진해의 연결고리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기억 속에는 멋쟁이 그가 없었다. 내가 기억 못 하는 사람이 날 기억하는 그 느낌이 차츰 익숙해졌다. 장미정원 내부는 비밀 공간처럼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가끔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저기 이름이. 뭐였더라....” 

  “윤정민입니다.” 

  “맞다. 정민이구나. 정민이. 그래. 요전에 진용호라고 형사가 한 명 다녀갔어.” 

  역시.... 진 형사는 한발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진해 실종 사건 수사에 참고한다며 이것저것 캐묻고 갔지. 태우가 어떻게 일산에서 치료받게 되었냐. 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냐. 그딴 걸 묻더구나. 생각나는 대로 얘기는 했어. 알지 모르겠는데 그 실종됐다는 여자는 레인보우센터 원장이라고. 그 센터가 요기 호수공원 정문에서 육교 건너면 중앙광장 오른편에 있어.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곳이지. 치료 받는 학생들 대부분 서울에서 오고. 정민이도 예전에 거기 다녔지.” 그는 손으로 이쪽저쪽 가리키며 말했다. 

  “네. 근데 전 진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실종된 원장이 네 아버지하고 친분이 있었어. 아주 친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거야. 그건 내가 잘 알아. 그래서 아버지가 그 쪽 계통으로 독립한 거로 알고 있고.” 

  내가 진 형사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것은 그와 내가 상식선에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종된 원장과 친분이 있었다는 말은 곧 아버지가 유력한 용의자란 말이나 다름없었다. 친분 있는 아버지 만나러 진해에 갔던 원장이 실종되었다. 그런 스토리면 유력한 용의자가 누구인지 초등학생이라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부턴 실종된 원장과 그날 함께 모텔에 묵었던 동행인은 누구인지, 그것을 아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차라리 그 동행인이 범인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 형사는 이 기로에서 다음엔 어떤 길로 향할까. 순간 새벽 산에서 만났던 여자가 가물거렸다 사라졌다.  

  “사장님은 J 베이커리에서 오래 근무하셨죠?” 

  “그럼. 해군 제대하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했으니까. 거기가 진해서는 빵집 사관학교 같은 곳이었어. 제빵사도 많았고 장사도 잘 돼서 월급도 세고. 가게 안에는 빵 기술 배우는 사람들 숙소도 따로 있었던 데다 뭐 운동 시설 같은 거도 잘 갖춰져 있어서 일 끝나고 운동도 같이하고 그랬지. 우리 애 엄마 고향이 김포라 일산 생길 때 겸사겸사 이쪽으로 오게 된 거지만.” 

  “아버지와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건지요?” 

  “너희 집이 예전에 우리 가게 근처라 자주 왔지. 엄마 손잡고 쫄랑거리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왔던 것 같은데. 방문 횟수로만 보면 VIP였지.” 그가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엄마랑 손잡고”라는 말이 깡통 속의 동전처럼 머릿속으로 딸그랑거렸다. 

  “단골로 이런저런 얘기 하다 보니, 동향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지. 정민이 네 상황을 듣다 보니까 진해에 사는 성용이 아들이 떠오르더라고. 뭐 그렇게 된거야.” 

  “그랬었군요.” 

  “그렇지. 둘이 또래에다 비슷한 상황이니 친해질 수밖에. 아버지와 이런 얘기 한 번도 안 했어? 내가 그 사정은 이해하지만, 아들에게 이런 얘기는 해 주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초승달 모양으로 굳게 닫았다.    

  데이트하는 남녀 한 쌍이 장미정원으로 들어왔다. 노신사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사고 이후로 진해에 내려갔으니까, 시간이 참 빨리도 지났네. 당연히 말 안 했을 테지만, 내가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 줄까? 네 아버지 진짜 유명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뚱딴지 같은 말이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평범한 회사원이 자폐 치료 전문가로 변신한 것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하고 연락 안 한 지 오래돼서 뭐라 말은 못 하겠지만 충격이 커서 그랬을 거야. 내 입으로 이런 거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얘기 안 할 수도 없잖아.”

  태우를 통해 이미 충격을 받은 터였지만, 그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너하고 태우 어떤 상황이었던 거는 알고 있지? 자폐....” 

  “네. 태우 통해 들었습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성진이가 회사 그만두고 학원을 차렸는데 그때 레인보우 원장이 여러모로 도와 준 것 같더라고. 자기 애들도 좀 넘겨주고. 그러다가 네가 언제부터 상태가 좋아졌어. 몰라볼 정도였지. 지금 딱 봐도 그런 병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잖아. 네가 아홉 살 때인가 발달검사에서 언어수준이 12개월에 지능지수가 50이 안 나와서 의사한테 지적장애 소리를 들었어. 네 아빠가 얼마나 한탄을 했었는지 몰라. 그러니 기적이 아니고 뭐겠어. 당연히 소문이 나서 엄청 유명해졌지. 잘은 몰라도 전국에 자폐 자식 둔 부모 중에서 ‘윤성진’, 그 이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을 거야. 그 정도로 유명했어. 운이 좋아서 태우도 같이 치료를 받게 되었지만. 완치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데. 대단한 사람이지. 인간 드라마가 따로 없었어.” 

  그런 아버지가 지금껏 왜 모든 것을 숨겨 왔던 것일까.... 진지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화가 모자를 벗었다 썼다를 반복할 때마다 숱이 적은 백발의 머리칼이 드러났다. 

  “그런데 좋은 시간이 길지 않았어.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가 나버린 거야. 우리 저쪽으로 조금 걷자.” 

  노신사는 호수 옆 폭 좁은 산책로를 가리키며 천천히 일어났고 나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공원 스피커에서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가 흐르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운동하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보였고, 바람을 타고 나무 땔감 타는 냄새가 났다.    


  “사장님은 저희 아버지와 가끔 만나고 하셨습니까?” 

  “성진이가 원체 바빠서 여유가 없었어. 주말에 성용이가 일산 오면, 가끔 셋이서 한잔 하고 그랬지. 그렇게 고생만 하고 빛을 보나 싶었더니만....” 그가 한숨을 쉬었다. 

  “혹시 그 사고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숙였다. “네가 호수공원 근처에서 치료실 애들하고 같이 놀고 있다가 신고 있던 운동화 한 짝을 도로로 던졌던 거로 들었어.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제가 운동화를 차도로 던졌다고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난 그랬던 거로 기억하는데. 거기 도로가 신호등도 멀리 있어서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곳이라 위험했거든.” 

  “혹시, 제가 왜 그랬는지 아세요?” 

  “내 기억으로는 네가 달리기를 참 잘했나 봐. 애들한테 차가 오기 전에 도로에 떨어진 신발을 주워올 수 있다. 뭐 그런 내기를 하고는 신발을 도로로 던졌다 주워 오기를 몇 번 하고 있었는데. 네 엄마가 그 모습을 본 거야.” 

  그 이후의 얘기는 태우를 통해 알고 있었다. 도로 중앙으로 뛰어 들어가 신발을 주워 돌아오려는 순간, 기겁하며 나를 향해 달려오던 엄마가 나를 밀친 후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던 자동차에 부딪혔다. 엄만 한참 떨어진 보도블록 위로 튕겨져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나는 도로 위를 나뒹굴며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다는 것이었다.  

  걸음조차 뗄 수 없을 정도로 신발이 무겁게 느껴졌다. 민아.... 도로에서 엄마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했다. 왜 태우는 신발이 우연히 날아갔다고 말을 했을까. 죄책감을 덜어 주려는 것일까. 누구의 기억이 진실일까. 나는 노신사의 말에 반문하지 않았다. 언제나 행운을 가져온다고 징크스처럼 믿었던 저주의 신발은 아직도 족쇄처럼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다리가 떨리고 눈앞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이제부터 기억하는 세상을 어떻게 견뎌 나가야 할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엄마를 죽인 살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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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봄, 일산, 윤성진 

 

  일본에서 온 투자자와의 미팅이 두 시간여 지나 끝났다. 질문이래야 비슷했고 의도하는 메시지 또한 명확했다. 호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니 직접 조선소 현장을 확인하고 판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신중한 이들의 경우, 투자에 앞서 제조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어떤 이들은 휴게실에 비치된 책을 빼 보거나 화장실을 두리번거리며 이것저것 살펴보기도 했다. 

  그들의 눈에서 시종일관 많은 관심과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자료를 가방에 넣으며 느닷없이 일본어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서양인임에도 일본말을 쓰는 이유는 내가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였을 거다. 유감스럽게도 2차 대전 시 독일의 애니그마 암호를 풀어내야 하는 노력 따위는 내게 필요치 않았다. 귀에 거슬리는 서툰 일본어 발음이었지만 다음 주에 블록딜, 대량매집을 진행할 계획이라는 것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장 방문은 시간 끌기 연막전술에 불과했다. 곧 쓸어 담기가 시작될 것이었다.

  미팅 후 옥상에서 봄바람을 쐬며 벌꿀 사탕 하나를 오물거렸다. 시간이 지나도 투자자들의 발길은 줄어들지 않았다. 다음 미팅까지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비슷한 질문에 비슷한 답변만 입이 닳도록 하고 있어도 새로운 업무로 이것저것 신경 쓰는 것보단 그저 관성의 힘으로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도 들었다. 

  사무실에 내려오니 안내 데스크에서 홍콩 투자자가 일찍 도착했다고 알려줬다. 지금까지 만나 온 해외 투자자는 세 부류다. 일찍 도착해 카페에서 기다리다 정시에 나타나는 부류, 길이 막혀 늦었다는 부류, 그리고 예정보다 훨씬 일찍 나타나는 부류. 그중에서 나는 마지막 부류가 가장 싫었다.          


  밤 10시가 조금 넘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반찬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늦은 저녁을 조용히 먹었다. 아내와 아들이 치열하게 지낸 하루를 전시라도 하듯 집안은 전쟁터 그 자체였다. 피곤한 몸에 정신까지 산만해져 짜증이 났지만 거실에 나뒹굴고 있는 과자 부스러기와 옷가지에서 연민이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도둑걸음으로 바닥에 떨어진 먼지와 과자 부스러기들을 물티슈로 훔쳐 냈다. 책상에 앉아 맥주 한 모금을 하며 책을 펼치니, 오래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불쑥 나타났다.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 골반에 꽉 끼는 청바지 뒤에서 숨바꼭질하듯 드러났다 사라지는 빨간 팬티. 고개를 여러 차례 세게 흔들어 대도 사라지지 않았다. 도톰한 입술. 몇 갈래 삐져나온 귀밑머리와 십자 귀걸이. 촉촉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초승달 같은 웃음이 계속 아른거렸다. 활자에 집중하려 노력할수록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다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그녀를 보냈다.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기약도 없고 절망에 가까운 작업인데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굳은 의지를 다지는 사이 다시 그녀가 나타났다. 이번엔 떨쳐낼 수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달콤한 미소와 야릇한 눈빛으로 내게 안겼다. 어찌하여 신은 육체의 욕망과 반복되는 공허를 주셨는지. 슬그머니 책상 위의 티슈를 뽑아 들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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