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머즈 Oct 08. 2024

49

  49 


2019년 4월 11일~4월 30일, 진해, 윤정민 

 

  병원에서는 안정이 더 필요하다 했지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길 고집했다. 우습게도 이유는 외국 방송 때문이었다. 처방받은 약에는 수면유도제가 섞여 있는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외국 방송은커녕 대부분의 시간을 잠들어 있었고, 깨어 있는 시간은 수도 없이 난쟁이의 주문을 외워댔다. 보고 있기에도 고통스러운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좀 더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정신이 나가버리면 어쩌자는 것인지.... 끝나지 않는 두더지잡기 게임 같았다. 때려도, 때려도 원망이 계속 튀어 올라왔다.

  존 김의 사망과 레인보우 원장 실종 사건은 연계되어 광역수사대의 공개수사로 전환되었음에도 진척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제시도 미국으로 돌아갔는지 명함에 적혀 있던 주소로 보낸 이메일에 대한 답신도 없고, 전화기도 꺼져 있었다. 실종된 원장의 남동생 제이는 이후로 특별한 소식이 없었다. 진 형사를 믿을 수 있었다면 친한 형처럼 과거의 일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고, 수사도 급물살을 탔을지 모른다. 안타깝지만 나는 도무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과거에 내가, 제시가 그 악마에게 당했다는 어떤 증거도 보일 수 없었고, 그 악마 놈이 여장을 하고 레인보우 원장 행세를 하며 다녔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놈이 거짓 실종 신고를 했다는 증거는 더더욱 없었다. 거기에 진 형사는 틀림없이 아직 아버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숨겨진 진실들을 모두 털어놓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오히려 의심만 가중하지 않을지 불안했다. 자살골 가능성이 높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광역수사대나 서울의 다른 형사에게 접근하는 것은 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진실이 사라져서 수사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있어서 수사라는 것이 안 되는 것이리라.  

  늦은 오후, 오랜만에 진 형사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보기만 해도 그가 떠오르는 로터리 전통찻집으로 향했다. 그는 내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작은 택배 상자 같은 것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밀며 말했다. 

  “어,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형사님은요?” 

  “저도 뭐. 그 실종 사건은 말이죠. 거의 포기할 뻔했지 뭡니까. 근데 어제 난데없이 이런 게 떡 하고 왔어요. 수취인을 딱 내 이름으로 해서.” 그가 택배 상자를 가리키며 껄껄 웃기 시작했다. 사람을 괴롭힐 때 웃어대는 모양새라 느낌이 안 좋았다. 

  “이게 뭔데요?” 

  “뭐긴 뭐겠어요? 한 번 보세요.” 

  몸을 숙여 상자 날개를 젖히려 하자 그가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보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은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무슨....” 

  “이건 절대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도 난처하거든요.” 빤히 노려보는 눈빛이 꼭 황야의 늑대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나 친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을 꼭 지켜주리라 믿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다짐을 받은 다음에야 내 손을 놓았다. 

  “아니, 이건....” 

  상자를 열어보니 콱 숨이 막혔다. 250 정도 사이즈의 어린이 신발 한 짝이 들어 있었다.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걸 왜 나한테 보냈는지 모르겠네요. 정민 씨가 뭐 아는 거 있으면 말 좀 해 봐요.” 

  끊어짐 없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발사대를 떠난 로켓처럼 튀어 올랐다. 호수공원에서 앞서 뛰어가고 있는 나와 그 뒤를 졸졸 뒤따르는 아이들이 보였다. 나는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고 있었다. 맨발로 호숫가에서 발을 담그고 논 후, 없어진 내 신발 한 짝을 찾고 있었다. 어디선가 태우가 갑자기 나타나 신발을 찾았다고 말했다. 누가 장난을 쳤는지 신발이 대로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신발은 정말 아끼던 것이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도로로 뛰어 들어갔을 때, 엄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빨리 도로에서 나오라고 절규했다. 내 옆으로 차들이 무언가 알 수 없는 말들로 고함을 치며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무서워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잠시 후 엄마가 가만히 있으라며 달려왔고, 나는 엄마만 보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갔다. 다른 어떤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엄마에게 안기려는 순간, 엄마는 나를 밀어 버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네?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 

  “혹시 이 신발 어디서 본 적 있어요? 어린이 신발 같은데.... 새것도 아니고 누가 신던 걸 보냈네. 바빠 죽겠는데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한테 무슨 메시지를 보내려고 그러나. 거참. 난해하게....” 

  옛날이야기를 꺼낼까 고민이 되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릴 적 신던 운동화와 비슷하네요. 누가 어디서 보냈는지는 확인이 안 되는 건가요?” 

  “네. 멀리서 온 것도 아니에요. 진해서 오긴 했는데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혹시 예전에도 흰색 아식스 운동화 신긴 신었어요? 이거 정민 씨가 예전에 신었던 그런 신발 아닌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그는 자세히 확인하라며 내게 상자를 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비슷한 운동화 같긴 한데요.” 

  “음.... 생각 안 난단 말이군요. 알겠습니다.” 

  “실종 사건은 실마리가 아직 안 잡히는 건가요?” 

  “말도 마세요. 진짜 골치 아픕니다. 실종자와 연관된 사람이 전부 상황이 안 좋아요. 이대로 가면 미제 사건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공개로 전환된 이후, 제보가 딱 한 건 들어오긴 했어요. 여기 택시 기사 한 명이 수상한 사람을 봤다고 하네요. 나 참 우스워서. 근데 남동생이 누나하고 닮은 거는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런 거로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아무튼 현재 상황은 그래요.” 

  “서울 존 김 사건도 미제인가요?” 

  “그것도 그래요. 황당한 사건이라고 하네요. 원한 관계도, 금품 관계도, 치정 관계도 없대요. 인간관계가 아주 깨끗한 사람인데 날벼락처럼 딸 연주회 때, 그것도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게 참 인생무상이지요? 이건 뭐.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다발에 깔려 죽은 거랑 다를 바 없지요. 연주회장에서 수상한 사람도 찾을 수 없다고 하는데.” 

  “네....” 

  “형사 생활하면서 가장 스트레스 받는 일이 뭔지 아세요?” 

  “모르겠습니다.” 

  “저번에도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스토리가 없는 사건을 해결하는 겁니다. 모름지기 잘 풀리는 사건은 화이트보드에 딱 그림이 그려지죠. 아무리 그림이 복잡한 구조로 얽혀있어도 틀만 딱 잡히면 퍼즐처럼 하나씩 풀리면서 시간이 걸려도 해결될 가능성이 있지요. 사건 속에 스토리가 녹아있지 않으면, 해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묻지 마 사건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네. 뭐 가끔 있지만요. 대부분의 사건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라도 있죠. 도대체 이런 것 때문에 라는 그런 이유 말이죠.” 

  “그 택시 기사분이 제보했다는 거는 어떻습니까?” 

  진 형사가 갑갑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그거는 가족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저도 조사하다 보니까 오누이 사이가 아니라 쌍둥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나하고 남동생이 많이 닮았더라고요. 근데 닮은 걸 어쩌겠어요. 가족인데. 나 참.” 

  나는 차를 마시고 침을 삼켰다. 말하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아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르며 침착하게 말을 시작했다. “형사님, 여장 남자에 대해서 들어보셨어요?” 

  마시던 차가 목에 걸렸는지 그가 콜록대며 말했다. “뭐요?” 

  “저번에 저희 집 앞에서 운동화 때문에 CCTV에 찍혔다는 중년여자 두 명 기억하시죠?” 

  “당연히 알죠.” 

  “그 사람들 누구인지 아직 안 밝혀졌죠?” 

  “네. 오리무중이죠.” 

  “제 생각에는 여장 남자이기 때문일 겁니다.” 

  “뭔 이유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그건....” 순간 말문이 막혔다. 원장에게 당했던 일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제시도 당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존 김이 그토록 무모한 짓을 하며 숨기려던 비밀을 내가 진 형사에게 털어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지 망설여졌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그만 얼버무리고 말았다.    “에이. 요즘 시대에 그렇게 변장하고 다닌다고 못 알아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실종자 남동생이 누나 흉내 내고 다녔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거 아닙니까? 그럼 사라져 버린 진짜 누나는 어디 있어요? 실종된 누나는? 누나가 없으니까 동생이 누나 행세하며 다녔을 거 아닙니까? 형사를 물로 봅니까? 제가 그런 것도 생각 안 했을 것 같아요?” 

  얘기를 이어가기 쉽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 흘렀다. 일산에서 발생했던 운동화 사고는 어떻게 된 것일까. 내가 떠올린 기억은 또 어떻게 된 것일까. 박영호 아저씨의 기억, 태우의 기억 그리고 제3의 내 기억이 나타났다. 

  “아무튼 이 운동화는 모른다는 말이죠? 그럼 됐습니다. 여러 가지 도움 주셔서 감사드리고 아버지가 빨리 회복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안부 전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형사님도 여러 가지 말씀 감사드립니다.”

  진 형사 말을 미루어 볼 때, 아직 그놈이 의심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증거라도 있어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섣불리 접근해서는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다. 제시하고 연락이 돼야 할 텐데. 그런데 왜, 진 형사에게 그 작은 운동화가 배달된 것일까. 하필이면 이제야. 누군가가 사건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50 


2019년 5월 1일, 진해, 최유진 

 

  오랫동안 제시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일본 최대 연휴인 골든위크가 시작되었고, 나는 쾌속선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 도착한 다음, 진해행 버스를 타기 위해 사상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는 평소와 다르게 사람이 많아 맨 앞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버스가 일정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갑 속에 제이의 분실물이 잘 들어 있는지 다시 확인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제이는 왜 일본까지 와서 여장을 하고 돌아다녔을까. 외국에서 잠깐이라도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을까.... 뭔가 이상했다. 그가 만약 실종된 레인보우 원장행세를 했던 인물이라면, 오랫동안 존재하지도 않던 누나 행세를 하며 이중생활을 해 왔다는 것 아닌가.... 그의 누나라는 사람은 어딘가에 살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일까. 그의 이마 안쪽과 옆머리에 선명히 남아 있는 두피 흔적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가발을 사용했던 속일 수 없는 흔적이었다. 우연일까. 제시의 연주회가 있던 날, 카페에서 마주쳤던 남자의 옆머리에도 그런 흔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제이는 겹쳐지지 않았다.

  눈을 뜨니 어느새 진해 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나온 추억이 스쳐 지나는 풍경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버스에서 내려 근처 마트로 들어가 선물용 과일과 홍삼차를 사 들고 윤 선생님 집 앞에서 노크했다. 문을 열고 정민이가 나왔다. 환하게 웃는 그를 따라 거실로 들어가자 헤진 트레이닝 바지와 목이 늘어난 흰 면티를 입은 초로의 백발노인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머리칼 때문인지 생각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졸린 듯 멍한 눈을 껌뻑이고 있었지만 눈빛이 반짝였다.

  “아버지, 태우 어머니입니다.” 정민이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진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어미 노릇도 제대로 못 했는데. 저 대신....” 백에서 티슈를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잇기 어려웠다. 

  “태우 어머니, 오히려 제가 신세 많이 졌습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그가 정민을 힐긋 보자, 정민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존 김이 그렇게 돼서 마음이 아주 아픕니다. 아버님과 오랜 인연이 있던 분이라 들었는데요.” 

  “네.... 아주머님은 어떻게 그분이랑 알게 되셨습니까?” 

  “전 일본 가는 배 안에서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배가 돌고래에 부딪히는 바람에 좀 친해졌지요.” 

  “존 김은 고맙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일본에 계시다고요?” 

  “네. 후쿠오카에 있습니다. 실은 오늘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누구한테 상의할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무슨 말씀이신지....” 

  그의 멍한 듯 무덤덤한 표정을 바라보며 나는 제이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나갔다. 지갑 속에서 꺼낸 제이의 신분증을 받아드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아는 사람을 바라보듯 한참을 사진 속 인물에 빠져 있었다. 옆에서 정민이 다가와 사진을 들여다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이가 원장과 동일 인물이라면, 진짜 레인보우 원장은 어디에 있을까요?” 나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말을 던졌다. 옆에 있던 정민이 무언가 말하려는데, 그가 손으로 만류하며 끼어들었다.  

  “제이와 원장, 두 사람이 동일한 가발을 쓴 것으로 보인다는 개인 의견은 의미가 없습니다. 좀 더 확실한 물증 같은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실종 사건 당일 제이는 서울 홍대 주변에서 술을 마셨다는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정민이 못 참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버지! 알리바이는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어요. 제 생각엔 제이의 진짜 누나를 찾으면 됩니다. 어딘가에 있든지 죽었든지 진짜 누나의 행방을 찾으면 제이의 정체가 드러나는 거예요.” 정민의 말이 옳았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 이런 방면으로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는 못 합니다. 근데 인터넷에서 본 사진 속 실종된 원장의 헤어와 일본에서 제이가 썼던 가발은 동일합니다. 그것만은 제가 확실히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존 김이 죽기 전, 카페의 수상한 남자 머리에서도 가발을 오래 썼던 흔적을 분명히 봤습니다. 제이는 원장 행세를 하며 사용했던 가발을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가발이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원장 행세를 하고 다니던 헤어라면 확실한 물증이겠네요. 근데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뭘까요? 일본까지 가서....”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근데 여장을 하는 남자들에게 헤어는 아주 중요한 소품입니다. 분신 같은 존재라 쉽게 버릴 수가 없지요. 저는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제이라는 이야기군요.” 윤 선생님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종 사건은 제이의 자작극이고, 존 김의 죽음 또한 제이의 짓이라고 생각됩니다.” 정민은 사건을 다 해결한 듯 말했다. 

  “자작극이라면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제이는 존 김이 자신을 미행하며 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에게 메시지를 준 것이죠.” 

  “메시지라면?” 나는 좀체 정민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존 김! 네가 쫓고 있는 원장은 실종되었다. 계속 쓸데없는 짓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 메시지 아닐까요?” 

  “알쏭달쏭하네요. 그런데 존 김이 죽기 전에 만났던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려 해도 그 속에서 제이가 보이지는 않아요. 카페나 거리의 CCTV 사각지대를 미리 파악하고 움직인 것처럼 얼굴도 확인이 안 되고. 그것만이라도 확인되면 좋으련만. 차라리 담당 형사에게 얘기해 보는 건 어때요?”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다.      “진 형사요?” 정민이 정색하며 말했다. 

  “네. 우리 진술을 들으면 해결될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그 사람 얼마 전까지 아버지를 얼마나 구석으로 밀어붙였는지 모르시죠?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무튼 작은 트집이라도 잡혔다면 아버지는 바로 구속되었을 거예요. 그 사람은 우리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고 선의를 선의로 해석하지도 않을 겁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도 담당 형사를 안 믿으면, 어떻게 해결하자는 말인지....” 

  윤 선생님은 초조해 보였다. 

  “제이 김은 당장 경찰에 알리기가 부담되면 저도 당분간 가만히 있는 게 좋겠네요.” 나는 윤 선생님 마음이 원하는 말을 했고, 그는 공감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세요?” 정민이 말했다. 

  “감이나 추측으로만 일을 진행하다간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정황이 아무리 명백해도 무죄로 판결 나는 사건을 많이 봤어요. 증거를 찾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심부름센터 같은 데 부탁해서 뒷조사를 해 보는 건 어때요? 비용 부담은 있겠지만.” 

  “그것도 역으로 당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신중한 성격에 강박증까지 더해져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요. 제가 보기에도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다시 그가 원하는 말을 했고, 이번에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러모로 아들과 남편의 은인인 그의 의견에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51 


2019년 5월 2일, 진해, 윤정민 

 

  약 기운 때문인지 소파에서 성악가처럼 입을 벌리고 잠든 아버지를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J 베이커리 테라스에서 바라만 보던 그 공간으로 가보고 싶었다. 출입문 좌측 상단에는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라고 쓰인 구식명패가 여전히 붙어 있었다. 내가 이 공간에 대해 상징처럼 기억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천천히 문을 열자 나무 바닥 아래에서 냉기가 올라왔고 곳곳에서 퀴퀴한 책 냄새가 났다. 신발장 앞의 작은 거실에는 탁자도 없이 2인용 가죽 소파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좁은 복도가 안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복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좌측으로 문 3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는데 101호, 102호, 103호다, 마치 오래된 여관에 들어선 것 같았다. 101호 문을 열었다. 방 중앙에 낮은 어린이용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별 특색이 없어 문을 닫으려는데, 온통 거울로 도배된 벽면이 보였다. 다가가 보니 확대 배율이 높은 볼록거울이라 계속 보기 힘들 정도로 어지러웠다. 볼록 거울의 방이었다. 102호 문을 열었다. 암막 커튼으로 방 전체를 가린 듯 빛이 없는 곳이었다. 불을 켰다. 바닥은 쿠션 매트가 깔려 있었고, 구석에는 영사기 같은 것과 카드형 저장장치 같은 것이 가득 들어있는 철제 사각 깡통이 보였다. 천장을 향한 영사기에 카드를 하나 꽂고 스위치를 돌린 다음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천장 가득 은하수가 활짝 펼쳐졌고 글자들이 우주를 비행하는 것처럼 두둥실 떠다녔다. 어둠의 방이었다. 103호 문을 열었다. 두 방을 합친 것보다 두 배는 넓어 보였고 실내 놀이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기구들과 장난감들이 있었다. 천장에는 그네와 기다란 고무 봉이 달려 있었다. 철봉도 있었고 벽면에는 암벽 등반용 설비에 다이빙대같이 생긴 점프대도 있었다. 구석에는 둥그런 트램펄린까지 있었다. 놀이의 방이었다. 방 끝에 있는 내부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 방만한 서재가 나왔다. 긴 탁자 뒤로 책으로 빼곡한 책장 2개가 붙어 있었다. 책들은 전부 자폐 치료 관련 외국 서적이었다. 몇 권 빼서 읽어 보았는데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장 맨 밑 칸에는 먼지가 쌓인 파란색 상자 3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첫 번째 상자를 꺼냈다. 회사 상자였다. 5년 전근, 10년 전근, 15년 전근, 회사에서 받은 듯 보이는 금박 표창 같은 것들이 여러 개 있었고,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사원증과 빛바랜 회사 수첩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회사 소개서로 보이는 책들도 있었고 명함도 있었다. 자신의 과거는 이렇게 잘 정리하면서, 어떻게 엄마와 나에 대한 과거는 모조리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인지.... 어이가 없었다.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외국어 상자였다. 포토 앨범의 비닐 커버 속에는 사진 대신 각종 외국어 시험 성적표가 소중히 끼워져 있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였다. 도대체 몇 년 동안 모은 건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허구한 날 내게 외국어를 가르쳤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 정도면 편집광 수준을 넘어서는 게 아닐까.... 아버지가 무섭게 느껴졌다. 마지막 상자를 열었다. 관찰 일지라고 적혀 있는 빛바랜 캠퍼스 노트가 날짜별로 구분되어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맨 위의 한 권을 열어 보니 녹색 수성 펜으로 빼곡히 적힌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자, 한 자 붓글씨처럼 정성 들여 쓴 것처럼 보였다. 노트를 한 장씩 넘기다 난쟁이란 글씨가 보여 페이지를 멈췄다.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민이가 처음으로 한 말.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아빠, 엄마 같은 단어조차 입 밖으로 낼 수 없던 아이가 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했다. 왜 하필 난쟁이일까. 만화에서 나온 말일까. 책에서 나온 말일까. 그 말을 할 때면 오른쪽 눈 위아래에 검지와 엄지를 살며시 갖다 댄다. 주문을 외기 위한 의식 같은 것일까. 난쟁이란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아이의 눈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난쟁이처럼 작게 보이고, 사람이 말하는 것도 희미하게 들리는 것이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면 아이와 똑같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까. 주문을 외워 아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까.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

계속 사람들을 난쟁이로 보려니 미치는 건 아닌지 두렵다.

....

노트를 몇 장 넘겼다. 



[교신]


  오늘도 민이가 벽을 두드리고 있다. 규칙성이 있다. 다섯 손가락을 차례대로 사용해 세 번 연속으로 두드린 후, 그쪽의 응답에 귀를 기울인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러기를 세 번 연속 반복한다. 그리고는 다른 벽으로 이동한다. 거실에서 안방으로, 작은 방으로, 화장실로 벽 찾아 순례를 떠난다. 벽에서 교신이 실패하는 날이면 바닥으로 이동한다. 두드림의 방식은 동일하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민이와 똑같은 자세로 벽과 바닥에 귀를 대어 보았다. 희미하게 사람 목소리, 자동차 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아이는 누구와 교신을 하는 것일까. 어떻게 그 마음을 알 수 있을까.    

....


교신하는 이유를 알아냈다. 민이는 음성 퍼즐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는 전체 소리에서 빠진 소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

계속 노트를 넘겼다.


[달리기]


  민이는 달리기를 좋아한다. 호수공원 한 바퀴, 4킬로를 쉬지 않고 달린다. 뒤서 가는 것보다 앞서가는 것을 좋아하고, 상반신을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인 채 달리는데 희한하게 넘어지지 않는다. 달리는 동안 거의 웃고 있고, 지친 표정은 본 적이 없다. 좋은 폐활량을 타고난 건지, 자유로움을 느끼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다. 가끔 내가 옆에서 달리며 힘든 얼굴로 엄살을 부려도 무시당한다. 아예 관심이 없다. 하얀 아식스 운동화가 아니면 다른 운동화는 쳐다보지도 않아 피곤할 지경에 이르렀다. 9켤레의 똑같은 운동화에 자신만의 표식을 하고 기분에 따라 골라 신는다. 밑창은 하나같이 오른쪽 뒤가 닳아 분간이 힘들 정도다

....   


  노트를 닫고 상자 3개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과거를 본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타임머신을 탄 기분. 글만 읽어도 아버지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나는 정신이 나가버린 아버지가 부끄러워 함께 외출하기 싫을 때도 많았고, 어느 요양병원에 모시면 좋을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가 나를 위해 희생했던 사랑은 과거형이었고 내 마음속에서는 살아 숨 쉬고 있지도 않았다. 사람은 결과보다 과정에 더 감동하는 것일까. 기록으로 축적된 과정의 시간은 현상으로 드러난 결과보다 마음을 움직였다. 관찰 노트의 과정을 들여다보고서야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103호 문을 닫고 긴 복도로 걸어 나오는데 바닥 구석이 심하게 뿌지직거렸다. 바닥이 쪼개져 발이 밑으로 빠져 버리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디딘 발 옆으로 작은 구멍 같은 것이 보여 집게손가락을 넣어 들어 올리니 바닥 아래에 아궁이 같은 공간이 있었다. 마루판을 다시 덮으려다 갑자기 희한한 공간에 궁금증이 생겼다. 예전 일본식 장옥이라 그런 것일까.... 그냥 연탄을 때던 곳인가.... 엎드려 이곳저곳 안쪽을 들여다보니 옆으로 깊숙이 들어간 틈 속에서 조그만 철제상자 하나가 보였다. 가까스로 상자에 손이 닿았다. 녹슨 상자의 먼지를 손으로 대충 닦아내자 눈 덮인 후지산 그림 아래쪽 귀퉁이에 ‘영원의 이별’이라고 휘날려 쓴 일본어가 보였다. 별 기대 없이 뚜껑을 열었는데 상상 밖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건 연애편지도 돈다발도 집문서도 아니었다. 비닐로 겹겹이 감싸져 있는 권총 한 자루와 가죽 케이스 같은 것이었다. 가죽 케이스 속에는 총알 3발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보관했는지 총알에 윤기가 흘렀다. 권총 손잡이 옆면에는 작은 글씨로 ‘마사토’라고 적혀 있었다. 덜컥 겁이 나 상자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아궁이를 원상복구 한 다음 바닥을 다시 덮었다.            

  학원 문을 닫고 나오며 이 공간에서 태우와 홀로 씨름했을 아버지의 인생을 생각했다. 아내를 잃고 살인사건에 휘말려 자신 속에 칩거해 버린 인생. 그리고 또다시 마주한 친구와 후원자의 죽음. 머릿속에서 슬며시 아궁이 틈새에 숨겨져 있던 권총이 떠올랐다. 깊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전 16화 4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