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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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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2일, 진해, 윤정민 

 

  누가 엄마 봉안 묘에 보관된 250 사이즈 운동화와 똑같은 것을 진 형사에게 보내 그가 이곳까지 오도록 유도했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666 한 짝을 봉안 묘에 숨겨 둔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누군가 하늘에서 훤히 내려다보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괴상한 스토리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탈출구는 단 하나.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는 방법밖에 없다. 아버지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든, 제이의 정체를 알리고 공권력으로 그 실체를 밝혀내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찰서 내부는 밝고 깔끔했지만 진 형사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복도 끝 구석진 창고 같은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겁주려는 의도가 틀림없었다. 좁고 썰렁한 회의실은 채광이 나빠 어두운 데다 밖에서는 까마귀 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형광등은 주기적으로 깜빡이고 있었고, 차가운 철제 의자는 다리 하나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균형을 잡고 앉아 있기도 불편했다. 진 형사가 책상 위에 비닐 포장과 봉안 묘에서 가져온 상자를 하나씩 툭툭 던졌다. 비닐 포장 안에는 장복산 실종 사건 이후, 아버지가 참고용으로 제출했었던 666 운동화 한 짝이 들어 있는 듯 보였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아버지의 심각한 표정에 의기양양해진 그의 목소리는 더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자세도 과장되게 커졌다. 눈동자에도 더욱 힘이 들어가 보였다. 옷을 팔꿈치까지 접어 올리더니 구석에 몰아넣은 쥐를 보듯 히죽거리며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말해 보세요. 분실했다던 운동화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도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말씀을 좀 해 보세요.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왜 분실하지도 않은 운동화를 분실했다고 해요. 왜 일을 크게 만들었어요? 네? 왜 그랬어요? 도대체 필요도 없는 일을 왜 만드는 겁니까? 네?” 

  계속되는 채근에도 침묵이 이어지자 그는 별수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능글맞은 얼굴로 협박을 시작했다. “그럼 저는 이렇게 조서를 쓰겠습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바로 고쳐 주세요. 안 그러면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는 미리 작성해 놓은 듯 보이는 종이를 검정 결제 판에서 꺼내 마치 어린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것처럼 크고 과장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어 나갔다. 


  “윤정민은 레인보우 원장이 주기적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러 진해에 오고 게스트 모텔에 묵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억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원장이 누구인지, 왜 그녀가 아버지와 자주 만나는지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지만 언제부터인지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회복하게 됨에 따라,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버지를 지속적으로 괴롭혀 왔고, 자신도 어렸을 때 그녀에게 성추행을 당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를 죽이기로 결심한 윤정민은 그녀의 단골 숙소 주변 지리와 동선 파악을 위해 무려 1년 넘게 장복산 쪽으로 달리기를 한다.” 


  갑자기 그가 읽는 것을 멈추고 아버지와 나를 뚫어지게 번갈아 보며 반응을 확인하더니 다시 읽기 시작했다.   


  “실종 사건 당일, 변함없이 아침 달리기로 장복산 입구에 다다른 윤정민은 미리 준비해 둔 소품으로 여장을 한 다음 게스트 모텔 비상계단을 통해 원장이 묵고 있던 P1실에 잠입해 그녀를 살해, 유기한다. 깊은 산속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났다. 당황한 윤정민은 급히 도망치려 했는데 하필 그때, 신발 한 짝이 벗겨지게 된다. 신발을 줍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그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아는 사람임을 알아채고 놀라 도망친다. 멀리 도망치지는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신발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망가는 척하다 멀찌감치 숨어서 그 사람을 미행한다. 그 사람은 운동화에 적혀 있는 윤정민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후, 자신의 트럭을 타고 윤정민의 집 앞에 운동화를 두고 떠난다. 뒤따라온 윤정민은 집 앞에 둔 운동화를 챙긴 다음 그를 쫓아간다. 

  그 후, 운동화 분실을 스스로 경찰에 신고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집 주변 감시카메라 등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용된 전형적 트릭의 일종이다. 만약 그가 운동화 분실을 신고하지 않았으면 그 트럭 운전사가 집 앞에 두고 간 운동화를 본인이 뒤따라가서 가져간 것으로 밝혀질 가능성도 있어, 산속에서 분실했다고 밝히는 편이 의심을 덜 받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야 수사의 초점이 운동화를 가져간 여자로 흩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윤정민이 계획한 트릭에서 중요한 요소인 운동화 한 짝. 그가 분실했다고 줄곧 주장했던 그 운동화 한 짝이 자신의 엄마가 묻혀있는 봉안 묘에 보관되었던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본 설명은 설득력이 상당히 확보된 것으로 판단된다. 윤정민은 트릭에 사용된 운동화와 동일한 운동화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운동화마다 자신의 고유번호를 부여해 왔으며, 경찰이 보관하고 있던 운동화 한 짝과 분실되었다고 주장한 운동화 한 짝이 모두 666으로 일치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현재까지 유일하게 확보된 CCTV의 화질 상, 윤정민의 집 앞에 운동화를 갖다 놓은 목격자인 트럭 운전사의 신원을 파악하기 힘든 상태이고, 그 뒤를 따라온 사람도 윤정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부족한 면이 있다. 또한 실종된 원장 역시 시신이나 흔적도 없고, 게스트 모텔 P2실에 숙박했던 원장의 동행인도 행적이 묘연하다는 점은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추가적으로 그 동행인은 목격자도 실종 신고도 없는 상태라 당일 P2실에 숙박하지 않은 것으로도 보인다.”


  어이가 없었다. 그의 조서대로라면 나는 살인범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엉터리 시나리오로 아들이 살인범으로 몰리게 되었는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궁리를 하는 것일까. 그냥 솔직히 다 털어놓으면 되는 것 아닌가. 가슴이 그냥 팡 하고 폭발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끼워 맞추기를 잘하는 놈이 생사람 하나 잡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 아닌가. 저 놈은 정말 내가 범인이라 생각하고 저런 시나리오를 쓰는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원한 때문에 겁주려고 그러는 것일까. 끼워 맞추기로 당했던 동생에 대한 억울함을 아버지도 똑같이 당해 보라는 심보 아닐까. 주일은 사건이 종결되었다며 내가 방심하게 만들었다. 단 한 번도 진 형사가 이런 일을 꾸미고 있다고 경고 한 적이 없었다. 진 형사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민 씨!” 

  “네?” 

  “어디 있어요?” 

  “네?” 

  “실종자들 어디 있냐니까?” 그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제가 어떻게 압니까?” 나는 아버지 얼굴을 돌아보며 말했다. 

  “구속되고 싶어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왜 신발로 장난쳤냐고? 똑바로 말해! 어?”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형사님, 제가 다 말씀드릴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아버지의 눈빛은 애절해졌고, 두 손은 기도하듯 한데 모으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 견디기에 힘든 상황에 빠진 듯 보였다.   

  “아니 무슨 시간요? 지금 이 사건이 얼마나 오래된 건지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그냥 뭘 작당할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만 하면 된다니까. 자꾸 그러실 겁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의 눈동자가 돌아가며 흰자위가 보이기 시작했고 곧바로 난쟁이의 주문이 시작되었다. 이 엄청난 광경을 진 형사는 한 번도 보지 못했으리라. 엄지와 검지를 눈가에 붙이고 아버지는 중얼대기 시작했다.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난쟁이의....”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하얗게 변해 버린 눈동자였다. 진 형사가 기가 막힌 듯 말했다. 

  “이거.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아버지의 주문은 계속되었다. 깜빡이는 형광등과 아버지의 흰 동공, 공중에서 너털거리기 시작한 그의 두 손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다. 

  “진 형사님! 아버지는 정신병이 있습니다. 자주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데 안정이 필요하니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진 형사는 일어서서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채, 한숨을 쉬며 탁자 주위를 왔다갔다 맴돌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선심 쓰듯 말했다. “좋아요. 오늘은 그냥 가세요. 조만간 구속영장 나갈 테니까 그렇게 아시고, 마음의 준비 잘 하세요.”   


  나는 주문을 끝도 없이 외워대는 아버지를 부축해 회의실을 나왔다. 돌아간 눈알의 흰 동공은 여전했고 복도를 지날 때, 한 무리의 사람이 의심 어린 눈길로 뚫어지게 쳐다봤다. 경찰서 밖으로 나올 때는 아버지가 영화처럼 허리를 뒤로 크게 젖혀 초소에 있던 경찰까지 달려 나와 아버지의 뒤통수를 받쳐야 했다. 거리의 사람들. 그들의 따가운 시선이 쯧쯧거리는 비아냥거림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렇게 비참할 수 있을까.... 자동차라도 타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부둥켜 잡고 강력한 광고효과를 내며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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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3일, 후쿠오카, 최유진 

 

  레몬의 관리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느끼겠지만 한 번도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리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영화관이 그냥 영화관이지 레몬 같은 이상한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그런 괴상망측한 세계에 아들과 내가 운명의 장난처럼 함께 입장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누군가에겐 그런 독특함이 바라 마지않는 특별한 인생일지 모르지만 내겐 지금이라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레몬이건 복숭아건 그런 세계는 눈을 뜨면 사라지는 어느 봄날의 꿈이길 빌었다. 지금이라도 그저 복잡한 걱정 없이 평범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영화관 주위를 맴돌던 남자가 사라졌다. 직원명부를 확인해 보니, 켄이 내게 사사키라고 말했던 그 남자는 캐널시티 지점의 시설관리팀 과장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나도 영화관에서 일하는 10년의 세월 동안 감시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오래도록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마유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 외에는 날 감시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그녀와 태우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한가한 오후. 화창한 날씨에 손님은 뜸했고 몸은 나른했다. 나는 마유미와 극장에서 두 블록 떨어진 UCC 카페에 커피를 사러 나섰다. 걸어가는 내내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나는 그녀가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고, 그녀도 내게서 위화감을 느끼는 듯했다. 카페에 거의 도착했을 때, 마유미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언니, 요즘 켄 사장님과 레몬 얘기하는 거 알고 있어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친근한 말투에 예전 감정이 돌아왔다. “너도 자폐증을 앓았니?” 

  “아뇨.” 그녀가 고개를 세게 저었다. 

  관리인인 그녀의 사정을 알기에 복잡한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카페에 도착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 곧바로 생크림을 잔뜩 올린 아이스 에스프레소와 라떼를 각자 받아 들었다. 

  “너는 어떻게 레몬으로 왔니?” 궁금했지만 속에만 담아 두었던 얘기를 꺼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말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마유미, 미안하다. 내가 그만 주제넘게....” 

  그녀는 발걸음을 늦추며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저 때문에 고생이 많았어요. 제가 외톨이에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지메를 당해서.... 부모님은 자기 인생을 포기하다시피 하며 집에서 제 교육에만 전념하셨지요. 그렇게 제가 열세 살 생일이 되던 날, 우리 가족은 기념으로 자동차를 타고 가족여행을 떠났어요. 행복했던 그 겨울을 끝으로 여행은 마침표를 찍고 말았지만.... 시코쿠, 규슈를 돌아다니다 중부고속도로를 탔을 때 사고가 발생했어요. 그날따라 고속도로는 차도 없어 한적했는데 잔뜩 낀 안개로 앞이 보이지 않아 아빠는 천천히 운전하고 있었어요. 어둑한 저녁이 되고 히로시마 분기점을 천천히 지나치는 데 우리를 앞서가던 하얀 승용차 한 대가 좌우로 비틀비틀 흔들리고 있는 거예요. 아빠는 졸음운전이라 생각했던지, 두세 차례 세게 경적을 눌렀어요. 아니 좀 더 눌렀던 같기도 해요. 저도 앞차가 졸다가 놀란 사람처럼 순간 움찔하는 것을 봤어요. 그렇게 그 차를 앞서 얼마를 달렸을까, 그 하얀 자동차가 안개를 뚫고 빠른 속도로 우리 옆을 지나 가더니, 갑자기 급브레이크로 우리 앞을 가로막는 거예요. 아빠도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우리는 앞으로 튀어 나갈 뻔했지만 다행히 앞차와 부딪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앞에 멈춰선 차에서 한 남자가 내리더니, 한 손에 해머 같은 것을 쥐고 험악한 표정으로 우리 차로 다가왔어요. 어둠이 내리고 자욱한 안개에다 차도 한 대 없는 산속 도로에서 전 너무나 무서웠어요. 아빠는 경황이 없었던지 비상등도 켜지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어요. 남자가 계속 위협하는 통에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고 겁에 질린 엄마도 따라 나갔어요. 저는 차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있었지요. 아빠는 연신 머리를 숙이고 있었고, 엄마는 지갑에서 돈까지 꺼내 주고 있었어요. 남자는 한 손으로 해머를 내려칠 자세를 유지한 채, 돈을 받아 들고 침을 뱉은 다음 자동차로 돌아갔어요. 나쁜 사람이라는 판단은 들었지만, 그런 장소에서는 억울해도 어쩔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와 아빠는 그 사람이 돌아가는 뒷모습에도 머리를 잔뜩 숙이고 있었고 그가 자동차를 타고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머리를 들지 않았어요. 그렇게 상황이 끝났다 생각했어요. 하얀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라졌고, 엄마와 아빠가 돌아서는 순간 번개 같은 것이 쾅 하며 엄마와 아빠를 하늘로 날려 버렸고, 트럭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빙글빙글 돌다 멈췄어요. 아빠 대신 제가 비상 깜빡이만 켜고 있었어도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몰라요. 아니, 그렇게 오랫동안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빨리 차에 타기만 했더라도....”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극장 옆 샛길로 걷기 시작했다. 이미 검정 마스카라가 잔뜩 번져 있었다. 백에서 티슈와 손거울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우리 차에는 카메라가 없었고 저는 경찰에게 본 것을 그대로 진술했어요. 하얀 자동차를 운전했던 그는 날씨도 안 좋고 내비게이션도 없어 길을 묻기 위해 비상등을 켜고 자동차를 멈췄다고 진술했어요. 결과적으로 내 진술은 아무런 힘이 없었고, 그는 아무 죄도 받지 않았어요. 엄마, 아빠를 치었던 트럭 운전사도 별다른 벌을 받지 않았지요. 억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고 친척들도 제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았어요. 특수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도 그날의 괴로움은 더욱 심해졌고 언젠가는 엄마 아빠를 따라가리라 다짐했어요. 마음껏 울고 싶은 장소조차 마땅치 않았기에 히로시마 버스센터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자주 들렀어요. 언제나 레몬 향이 나는 곳이었죠. 어둠 속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어요. 그렇게 한껏 울고 극장을 나설 때면 두 눈은 퉁퉁 부어있었지만, 울분은 많이 가시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던 4월의 어느 날이었어요. 하교 후, 혼자 극장을 찾아 마음껏 울분을 발산하고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가 말을 걸어왔어요. 종이 재질의 검정 옷을 입고 있었는데, 팔을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밟는 소리가 났어요. 그 여자의 이름은 ‘와다’였고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어요.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 내가 극장에 들를 때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친근하게 아는 척 해 주며 마음속 깊이 쌓여 있는 울분을 따뜻하게 받아 주기도 했어요. 그때까지도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어요. 고등학생인 내게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지,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특수학교에 다니는 내게 기대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단지 불쌍한 마음으로 내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저 그런 그녀에게 감사했어요. 어느 날, 그녀가 뜻밖의 제안을 한 가지 했는데, 후쿠오카 영화관에서 일하지 않겠냐는 것이었죠. 마음속 응어리도 풀어주겠다고.... 난데없이 영화관 일자리를 추천받는 것도 모자라 응어리까지 풀어준다는 말에 정확하게 그 의도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설레는 기분이 들었어요. 제가 할 일은 그저 영화관의 좌석을 점검하는 것이고, 때때로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었어요.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괜찮아 보였어요. 히로시마에서 후쿠오카는 신칸센으로 1시간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전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4월에 후쿠오카로 이사를 왔어요. 마음속 응어리라는 것도 저는 엄마와 아빠를 죽게 만들고 뻔뻔하게 살고 있는 그가 어떤 벌이라도 받기를 바라는 것뿐, 그 벌이라는 것이 그렇게 끔찍한 것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제가 후쿠오카로 이사하고 정확히 사흘 뒤, 뉴스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어요. 중학생인 딸과 함께 자신의 맨션 13층에서 투신한 거였어요. 사인은 딸과 함께 독감으로 처방받은 타미플루의 환각작용으로 밝혀졌어요. 뉴스는 그와 딸의 죽음 자체보다는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발생할지 모르는 타미플루 환각작용의 위험성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죠. 그는 견실한 회사원이었고, 딸을 사랑하는 아빠였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아저씨였다고 해요. 그런 그가 왜 우리에게 그런 짓을 해야 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해요. 안개 자욱한 산속 고속도로에서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해머가 아직도 머릿속에 아른거려요. 그렇게 저는 여기서 일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언니처럼 레몬의 관리인이 되었어요.”         

  나는 거리를 걸으며 그녀의 얘기를 듣는 와중에도 습관처럼 계속 주변을 살폈다. 관리인이 아닌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설령 길가에서 우연히 듣게 된다 한들 믿을 수도 없겠지만, 관리인에겐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우리는 극장 앞에 도착하자 입을 맞춘 듯 화제를 영화 이야기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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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4일, 진해, 윤정민 

 

  장복산 실종 사건은 제이가 꾸며 낸 일이고 존 김도 제이가 죽였을 것이다. 단지 운동화 하나 때문에, 아버지의 엉터리 시나리오로, 내가 범인으로 몰려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자백한단 말인가. 진 형사의 조서는 결국 끼워 맞추기식 가짜로 판명 날 것이다. 아버지가 밝히지 않으면 모든 사실을 내가 공개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저 새벽에 조깅을 한 죄 밖에 없다. 어릴 때 성폭행당한 것은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살았고 제이, 그놈에 대한 원망도 가물거릴 뿐이다. 무엇보다 나는 원장 행세를 했던 남자 제이에게 성폭행당했지, 사라졌다는 여자 원장에게 당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왜 여자 원장을 죽이고 목격자까지 죽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런 억측을 할 수 있고 확대해석을 할 수 있다는 건지. 구속영장이든 뭐든 청구할 테면 해 봐라. 정면 돌파다.

  아버지는 연극을 했던 것일까. 그렇게 과장된 몸짓으로 길가에 누웠던 아버지가 집에서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엉터리 계획으로 아들까지 위험에 빠뜨리고도 경찰에 진실을 말하지 않을 참인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렇게 나쁜 짓을 했던 제이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던 이유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놈에게 잡힌 약점이 뭔지 궁금합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거기에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습니까? 부끄러워 말고 제게만 말해 주세요!” 

  시계 초침 소리만 들릴 뿐 아버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들이 이런 상황인데도 지켜내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인가.

  “전 사실 진 형사 말은 믿지 않습니다. 겁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진 형사가 제게 이러는 이유가 아버지를 계속 압박하려는 의도 때문이에요. 제 생각에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호시탐탐 누군가에게 미행을 당하거나 도청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의심이 들지는 않으세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보셨어요? 이번 운동화건만 해도 그래요. 666을 봉안 묘에 숨긴 거를 어떻게 알고 진 형사가 거기로 직접 왔겠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제가 일산에서 교통사고 당할 때 신었던 그 250 사이즈 신발이 봉안 묘에 있다는 것도, 누군가가 알고 진 형사에게 똑같은 신발을 보내 유인한 거잖아요. 그래도 모르시겠어요? 아버지의 마음을 누군가가 꿰뚫어 보고....”  

  우당탕.... 아버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엇인가 떠오른 듯 현관으로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매섭게 반짝이는 눈빛에, 탁구칠 때처럼 재빠른 동작이었다. 그는 5단 신발장 위에 대각선 방향으로 걸려 있는 녹색 거북이 인형을 떼더니, 갑자기 소파 앞에 내동댕이쳤다. 중학교 때부터 줄곧 그 자리에 걸려 있던 인형이었다. 아버지의 학원에도 신발장 위에 똑같은 인형이 걸려 있었다. 왜 그것이 그곳에 걸려 있는지, 누가 줬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냥 그곳에 있으니, 있는 거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거북이 인형 배 중앙에는 동그란 전자 배터리 2개 정도가 들어있을 만한 공간이 보였고 작은 나사 하나로 조여있었다. 아버지는 허둥지둥 신발장 서랍에서 드라이버를 찾아 거북이 배의 나사를 풀었다. 아버지가 거북이를 흔들기 시작하자 동그란 배터리 2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인형을 흔들더니, 네모난 배터리 공간 옆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미니 철제 라이터처럼 생긴 검정 물체가 전선과 함께 뽑혀 나왔다. 그는 물끄러미 그것을 보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제이는 도청과 녹음으로 아버지의 일상을 감시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진해를 방문했던 이유도 거북이 배 속에 숨겨져 있는 기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이는 아버지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어떤 식으로든 약점을 잡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보면 아버지가 이번 계획으로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패를 다 알고 있는 그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아니 무슨 이야기라도 해 줄 친구가 필요했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 집 밖으로 나서며 태우에게 전화했다. 약 1시간 뒤, 우리는 로망스 카페에서 만났다. 나는 그에게 현재 상황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태우는 내 얘기를 듣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말했다. 나는 그의 차를 타고 양어장이 있는 작은 생태공원으로 향했다. 호숫가 근처의 넓은 공터에 차를 세우고 뜨거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앉았다. 젊은 여자가 유모차를 밀고 지나갔고 그 뒤로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자 두 명이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었다. 태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민아, 나 취직할 것 같다.” 

  힘들어 죽겠는데 생뚱맞게 취직 얘기를 꺼내 짜증이 났다. 

  “어디?”

  “창원에 불났던 영화관 있지. 엄마가 아는 사람이 소개해 줬어.” 

  “희한한 일이네.”

  “그렇지? 그리고 음.... 네가 연관된 사건은 잘 해결될 거야. 걱정 안 해도 된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나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마라.... 자세한 건 얘기할 수 없다.” 

  “아니, 지금. 장난 치냐? 걱정 안 해도 된다면서.... 그러면서 이유는 얘기할 수 없다고 하면 지금 사람을 바보 만드는 거 아니야? 하늘에서 마술 방망이가 나타나 뚝딱 해결이라도 해 주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정말 그런 의도는 아니거든. 아무튼 믿어 주라.” 

  그의 뚱딴지같은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길에 걸리는 돌을 힘껏 걷어찼다. 친구지만 한 대 갈기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얼렁뚱땅 위로하려 하지 마라. 너한테 내가 다 말했잖아. 이번 사건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제이는 아동 성폭행에, 사기 실종에, 하물며 살인까지 저질렀어도 증거가 하나도 없어. 서울에서 유명한 형사들이 밤낮으로 조사하고, 광역수사대에서 난리를 치고, 진 형사가 아무리 쫓아다녔어도 미심쩍은 부분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고. 그런데 나는 지금 그 운동화 하나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게 생겼어. 있지도 않은 실종자와 목격자가 어디 있냐고 취조까지 당하고 있단 말이야. 큰일이라고 지금. 알겠냐? 사람 미치겠는데 정말.”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태우에게 답답한 마음을 쏟아붓고 말았다. 큰 붕어들은 내 기분을 모르는지 입을 뻐끔거리며 내가 있는 쪽으로 몰려왔다. 햇살이 부서지는 평화로운 물가에서 어색한 긴장감이 돌았다. 우리는 천천히 호숫가를 한 바퀴 돈 후, 주차된 곳으로 돌아왔다. 사실 태우에게 어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살인 누명으로 위기에 빠진 내게 취직 얘기나 하면서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라니. 진 형사의 첩자 같은 주일도 문제지만 눈치 없는 태우는 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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