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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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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30일, 진해, 윤정민 

 

  사만다가 진해경찰서에 제 발로 나타났다. 얼굴색도 밝고 건강 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은 존 김 사망, 사사키 자살 사건과 맞물리며 언론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특집 기사도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엉거주춤 손바닥 글씨를 쓰는 그녀의 사진 한 장이 신문에 실렸다.     

  그녀는 일본인 사사키의 유언을 그대로 뒤집어 버렸다. 그녀의 납치와 감금을 주도한 인물은 재미 교포 존 김이고, 사사키가 의뢰인인 그를 죽인 이유는 계약사항을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사키의 죽음에는 거짓 유언장을 만들게 하고, 자신의 동생 제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자들이 배후에 있을 것이라 말했다.     

  어찌 되었건 나는 원장 실종 사건에서 완전히 발을 빼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점은 늘어만 갔지만. 사만다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실제로 내가 장복산을 조깅하던 날에 실종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제이가 일산 레인보우센터에서 자신의 행세를 하며 악마 짓을 할 때, 그녀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만다는 장복산에서 실종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증언에는 자신의 남동생, 제이가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납치되었던 사만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이후, 외국 방송 대신 하루 종일 그녀에 관한 신문과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아침 10시 30분. 아버지 옆에서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정보통 주일에게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를 봐서 역시 솔깃한 정보를 알려주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J 베이커리로 달려갔고 주일은 커피 2잔을 들고 2층 테라스로 황급히 올라와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만다가 조사를 마치고 한 병원으로 이동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머무는 요양병원 8층이라는 것이었다. 태우 아버지도 얼마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었다. 

  “거기, 요양병원 아니냐?” 

  “대부분은 그런데 8층 전체는 좀 특수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는데, 사복경찰도 지키고 있다고 하고.” 

  “희한한 병원이네. 사만다를 거기 데려가서 뭐 하는 거지?” 

  “지금 그 여자는 신드롬을 일으킨 사람이잖아. 여러 사건의 핵심 관계자이기도 하고 철저히 보호하려고 데려갔을 거야.” 

  “사람들은 사만다가 거기 있는 거 모르겠지?” 

  “그럼. 그 요양병원 사람들조차 모를 거야. 8층으로 올라가는 출입구는 완전히 다른 데 있고, 전용 엘리베이터를 사용한다고 그러던대. 보안이 철저해 8층은 다른 병실 사람이랑 얼굴 마주칠 일도 없다네. 대부분의 사람은 맨 윗동네에 누가 있는지 모르거든. 나도 지금까지 그 요양병원에 뻔질나게 다니면서 좀 이상하다 했어. 설마 그런 병원인지는 몰랐지. 미안한데 이건 어떻게 알게 됐는지 출처는 말해 줄 수 없다. 아버지가 신신당부해서.” 

  “그래....” 나는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그래도 이젠 한시름 놓았겠다. 사만다를 네가 납치하고 감금했다는 게 말이 되냐?” 그가 이마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리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진 형님도 너무하지. 이제 너하고 아버님 얼굴은 다 봤다. 정말. 사만다 안 나타났으면 희대의 사건 하나 만들 뻔했네. 끔찍하다.” 

  “그래, 별일도 다 생기네. 어이가 없다.” 

  “진 형은 이제 그 사건 손도 대지 못할 텐데 뭐. 다시 광역수사대에서 전담하지 않을까 싶다. 오, 사만다.... 조금만 늦게 나타났어도 진 형 옷 벗거나 했을 거야. 하늘이 도왔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답 없는 질문에 주일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내 생각에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오히려 완전히 웃기는 상황이 되었지. 사만다 증언과 사사키의 유서가 완전 반대잖아. 뭐 그래도 중요한 건 네가 무관하다는 게 밝혀진 거야.” 

  마음이 복잡했다. 사건에서는 빠져나왔지만 악마 제이는 아직도 잘살고 있지 않나. 아버지가 쏟아냈던 고백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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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31일, 진해, 최유진 

 

  카페 구석에서 사만다 관련 기사를 검색했다. 경찰서에 나타난 그녀는 나와 지내던 사만다가 아니었다. 그녀는 제 발로 경찰서에 찾아가, 그런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손바닥 글씨로 자신의 이름과 살려 달라는 말만 반복해서 써 대던 그런 사람이었다. 아이보다 못한 그녀가 경찰에서 그렇게 진술할 수는 없었다. 백발의 머리로 선글라스를 낀 채 엉성하게 움직였지만 눈이 뽑히고 귀가 잘렸으며 혀가 뽑혔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자극적인 내용이 한 군데도 기사로 다뤄지지 않은 것은 이상했다. 반복해서 그녀의 사진을 관찰했다. 옷과 액세서리도 신발도 모두 내가 꾸며준 대로 변함이 없었지만 헤어스타일만큼은 차이가 났다. 기장도 더 짧았고 옆머리도 달랐다. 사만다로 능수능란하게 변장하는 제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카페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레몬 본부로 향했다. 자동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무뚝뚝한 빨강 안경이 홀 끝에 있는 룸으로 안내했다. 일자 눈썹과 타투 여자가 마주 보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그들은 조용히 먹기만 했다. 나는 파랗고 투명한 플라스틱 물통에 담긴 차를 컵에 반쯤 부어 마셨다. 매실 향이 입안에 퍼졌다. 잠시 후 일자 눈썹이 휴대폰처럼 보이는 까만 네모 난 기계를 내밀었다. 

  “가짜 사만다의 소재지를 알아냈고 오늘 밤 그를 잡으러 갑니다. 경찰 조사가 본격화되고 있고 사사키의 죽음이 레몬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 밤 가짜 사만다를 처리해야 합니다.” 

  “저도 가면 안 될까요? 그녀의 본모습을 마지막으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가 무시하는 표정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 때문에 일이 틀어져서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일단 당신을 데려가겠습니다. 안면인식 프로그램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저는 복잡한 건 몰라도, 헤어스타일 하나만 보고도 누나와 남동생쯤은 구분할 수 있어요. 제가 진짜 사만다 머리도 만졌으니 더 확실합니다. 제이가 사만다 흉내를 아무리 잘 낸다 해도, 제 눈을 피해갈 순 없어요.” 

  “음.... 당신이 약에 취해 사만다를 놓쳤던 날, 집 앞에 주차된 4대의 자동차 카메라는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사만다가 당신을 부축해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진짜와 가짜가 뒤바뀌어 있었던 증거죠. 정전도 의도적이고, 사만다와 들렀다는 그 카페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혹시 사만다에게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마땅히 특이한 점은 떠오르지 않았다. 

  “정전 전에 내부화면을 분석해 보니, 당신이 사만다의 등을 긁어 주다 집 안에서 뭘 계속 찾고 있던 게 보이던데, 그건 뭐죠?” 

  “등갈퀴요.”

  “왜 그것이 필요했습니까?” 

  “자꾸 등이 가려운지 손을 등으로 가져가기에, 혹시 등갈퀴도 있을까 찾아봤던 거죠.” 

  일자 눈썹과 타투는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만다 등에는 표피 침투형 위치추적기가 박혀 있었을 겁니다.”

  “표피.... 뭐요?” 

  “피부 속으로 들어가는 아주 얇은 칩인데 거의 티도 나지 않습니다. 그녀와 전망대에서 만났던 남자가 접촉하며 심어 놓았을 거로 보입니다. 사만다와 접촉한 사람은 그 외에는 없으니까.” 

  “그런 것도 있습니까? 어떻게 사람의 몸에다 그런 걸....” 

  “아무튼, 사만다를 놓친 건 당신의 실수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오늘 밤 사냥으로 잘 마무리 하죠. 당신은 이걸 들고 움직이세요. 당부드리지만 레몬이 하는 일은 목숨 걸고 하는 일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자 눈썹은 검정 구식 폴더폰을 내게 내밀고 여자와 함께 방을 나갔다. 


  멈춰 버린 기차선로가 내려다보이는 경화역 근처 카페 2층. 황금빛 노을이 하늘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찜질방에 다녀온 후, 몇 시간째 폴더폰만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목숨 내놓고 일하란 말에 들숨과 날숨이 경쟁하듯 속력을 올리고 있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할 때쯤 연락이 왔다. 역시 감시당하고 있는 것인가.... 10분 후, 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작은 과일가게 앞에서 지나가는 택시에 합석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카페를 나와 골목길로 천천히 걸어갔다. 우측 모퉁이에 과일 상자들을 좌판에 내놓은 가게가 보였다. 택시가 스르륵 다가왔다. 

  택시가 남원로터리를 돌아 속천 바닷가로 향하고 있을 때, 일자 눈썹이 무거운 입을 뗐다. “저 언덕 위 요양병원 805호에 제이가 있습니다. 8층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된 특수병동이지요. CCTV 회피 동선은 이미 확보했고, 사복경찰 두 명의 행동반경과 시간표도 확보했습니다. 가짜 사만다 제이의 조력자는 현장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저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당신은 택시에서 대기하며 모니터로 사만다의 얼굴 확인만 하면 됩니다.” 

  “택시 안에서 모니터로 사만다를 확인하라고요?” 

  “8층은 보안을 강화하다 보니 취약점이 하나 생겼습니다. 맨 꼭대기 층이고 아래층과 격리된 공간이라 화재나 지진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대피가 어렵지요. 그래서 7층과 8층은 대피가 용이하도록 유리창 한 면이 크게 개방되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충분히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크기로요. 705호에 위장 입원하고 있는 레몬직원이 카메라가 장착된 딱정벌레를 805호 유리창으로 올려보내 사만다의 동태를 모니터링합니다. 작전이 시작되면 705호에서 805호 통유리창으로 직원이 올라갑니다. 당신은 화면에 나타난 얼굴만 최종 확인하면 됩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으로 올라가는 일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일자 눈썹의 피식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밥 먹고 회만 뜨는 사람이, 그 칼질이 무서울 리 있겠습니까?” 

  내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저기 왜 이런 어려운 방법까지 써야 하죠? 존 김도 사사키가 연주회장 화장실에서 조용히 죽인 거 아닌가요? 레몬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대부 같은 영화에는 마피아들이 대담하고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잖아요?” 

  “소설이나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죠. 우리는  홍보 집단이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두려움을 조장하고 위협하여  존재 가치를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특히 제이처럼 이미 보는 눈이 많아져 버린 인간을 처리할 때는 태풍의 눈이라는 전략을 쓸 수밖에 없죠.” 

  “태풍의 눈요?” 

  “쉽게 설명해 우연을 가장한 필연 같은 겁니다. 경찰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는데 허를 찔렸다고 해 봅시다. 그럼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모르겠습니다.” 

  “깔끔하게 사건은 종결됩니다. 어려운 만큼 깔끔하지요. 책임소재 문제가 있으니, 허를 찔린 사건은 불가피하게 종결되는 방향으로 갑니다. 외부의 침입은 막았으나 내부 분열은 막을 수 없었다. 타살은 막았으나 자살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식이지요. 만약 병원 침상에서 의사로 위장한 킬러에게 칼이나 총을 맞거나 증거가 남는 독약을 먹거나 독극물 수액을 맞거나 그렇게 되면 절대 경찰의 수사는 종결되지 못합니다. 명백히 공격한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사건은 아주 복잡해지죠. 레몬은 범죄조직과 달리 아주 작은 실마리가 불러올 나쁜 가능성도 막아야 합니다. 레몬이 지금까지 시끄럽게 사건을 만들어 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군요. 혹시 병원에 감시카메라는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움직이는 곳에는 없습니다.” 

  “저기.... 제가 확인을 잘못 하면 어떻게 되죠?”

  “당신도 알다시피 805호의 사만다가 진짜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녀가 우리에게 감금되어 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정신 나간 연기를 할 순 없지요. 경찰에 나가 진술한 사만다는 제이일 가능성이 100%죠. 그런데도 당신을 부른 것은 사만다를 놓쳤던 실수를 만회해 자책감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일종의 확실한 기회를 주는 거죠.” 

  택시는 병원 정문에서 일자 눈썹과 타투를 내려주고 언덕을 내려와 바닷가 공터에 멈췄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죄송한데 저기 화장실에 좀 빨리 갔다 오면 안 될까요?” 

  운전사가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황급히 눈앞에 보이는 화장실로 달려가 볼일을 마쳤다. 돌아오는 도중에 자동차 한 대가 도로를 빠르게 질주했다. 운전석 창틀에 한 손을 걸치고 있는 남자가 스쳐 갔다. 바람에 날리는 그의 파마머리가 가물거렸지만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다. 택시에 오르자 운전사가 노트북 화면을 펼쳐 내게 건넸다. 오후 9시 40분이 되자 거짓말처럼 화면에 805호 방이 나타났다. 선명하고 깨끗한 화질이었다. 사만다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침대 앞에 벽걸이 TV와 작은 냉장고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소파와 옷장이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더듬거리며 검정 선글라스의 사만다가 들어왔다. 줌 기능을 눌렀다. 흐릿하다. 조금 더 창가 쪽으로 다가와라. 사만다가 겉옷을 벗어 옷장에 걸었다. 제한 시간이 다가온다. 곧, 705호의 레몬이 올라올 것이다. 사만다가 냉장고 쪽으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 그녀의 머리 기장과 컬, 옆머리를 확대했다. 역시 가짜였다. 경찰서에 나타났던 그 사만다였다. 나는 일자 눈썹에게 ‘가짜’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식은땀이 났다. 이제 제이도 죗값을 달게 받게 된다. 투신자살한 사만다가 여장한 제이라고 밝혀지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의 모든 악행은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가짜 사만다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노트북 화면에 레몬직원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났다. 딱정벌레 카메라 촬영 각의 끝에 있어서인지 암막 커튼 뒤에 곧게 서 있는 검정 복면의 사람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작은 키에 닌자 같은 모습이었다.    

  예상보다 늦게 가짜 사만다가 화장실에서 나와 침대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닌자의 한 발이 살짝 왼쪽으로 움직인다. 사만다가 침대 옆을 지나치려 한다. 거의 다 왔다. 커튼 뒤 닌자의 다른 발도 살짝 왼발에 붙는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사만다가 침대 모서리에 부딪혀 넘어졌다. 넘어진 그녀의 얼굴 앞으로 커튼 사이로 빠져나온 닌자의 발이 보였다. 아.... 노출이다. 제이는 틀림없이 봤을 것이다. 그런데.... 가짜 사만다는 아무것도 못 본 듯 태연하게 일어났다. 양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공간을 더듬고 주의 깊게 한 발씩 다가왔다. 커튼을 잡으려 했다. 뭔가 이상했다. 제이라면 커튼 밑의 발을 봤을 것이고 당연히 소리를 치거나 도망쳤을 것이다. 진짜 장님이 아니고서야 저런 태연한 반응을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혼란스러웠다.

  노트북 화면을 확대해 커튼을 치려는 그녀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믿을 수 없게도 내 스타일이었다. 기장과 컬, 옆머리의 모양.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큰일이었다. 폴더폰을 들려는 순간, 화면에는 이미 레몬이 사만다의 목을 감고 입을 막고 있었다. 일자 눈썹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녀의 상반신이 이미 창밖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화면이 꺼졌다. 


  병원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쥐어짜듯 아팠다. 방에 들어왔을 때는 틀림없이 가짜였는데, 화장실에 갔다 와서는 진짜가 되어 있었다. 또 사고를 쳤다. 애초부터 이런 일에 엮이는 게 아닌데. 나 같은 사람이.... 경찰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운전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차의 번호판을 바꿔 달고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정문 입구에 가까워지자 우측 끝으로 경찰과 의사, 환자들이 몰려들어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멀찌감치 택시가 멈췄다. 추락사고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듯 한쪽에서는 큰 소리를 지르며 엉겨 붙어 싸우고 있는 두 명의 남자와 말리는 사람이 보였다. 싸우는 사람은 장발과 파마머리였고 말리는 사람은 30대 초반의 젊은 남녀였다. 그들은 신분증을 보이며 싸우는 사람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잠시 후 일자 눈썹과 타투가 택시에 올라탔고 차는 소란을 뚫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방에 들어올 땐 틀림없이 가짜였는데, 화장실에 다녀온 이후 진짜로 바뀌었어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계속 연락했었는데....” 

  나의 긴 한 숨소리가 차에 퍼져 나갔다. 험한 인상을 쓰고 있던 일자 눈썹이 말했다. “이 계획은 지금 여기 네 명, 요양병원 705호의 위장된 환자, 보호자역의 레몬직원 그리고 한국 책임자밖에 모릅니다. 총 일곱 명이죠. 그런데 제이는 마치 계획을 들여다보듯 805호 화장실에 진짜 사만다를 데려다 놓고 우리를 농락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 것 같아요?”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택시의 속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점점 겁이 났다. 멀리서 조선소 타워 크레인이 보였다. 조선소 둘레의 어둑한 언덕 공터에 택시가 섰고 모두 내렸다. 택시가 사라지고 캄캄한 구석에서 검정 벤츠 캠핑카가 슬며시 나타났다. 올 블랙패션을 한 드럼통 같은 두 남자가 다가와 타투 여자 앞에 나란히 섰다. 

  “레몬은 달다!” 한 남자가 말했고, 아무 말이 없자 다른 남자가 다시 말했다. “레몬은 달다!” 

  타투가 머뭇거리다 겨우 고개를 들며 말했다. “레몬은 달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남자가 여자의 복부를 가격하고 다른 남자가 단번에 그녀의 얼굴에 복면을 씌웠다. 그녀가 털퍼덕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전부 여기서 죽는 것인가.... 몸이 덜덜거리고 난생처음 바짓단으로 소변이 흘러나왔다. 복면을 쓰지도 앉았는데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레몬은 달다. 그 말이 내 유언이 되는가....’ 이런 깜깜하고 외진 곳에서 그냥 죽는구나. “일어나세요!” 일자 눈썹이 단호하게 외쳤다. 검정 드럼통 남자가 쓰러진 타투 여자를 업고 캠핑카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는 어떻게 되나요?” 

  “걱정 마세요. 유미는 작전을 노출했습니다.” 일자 눈썹은 처음으로 타투 여자를 유미라고 말했다. 

  “레몬은 시다. 그거 말씀인가요?” 

  “시다가 아니라 달다입니다. 배신을 뜻하는 용어지요. 유미는 제이에게 매수된 스파이였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제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 신도 아닌데 어떻게 사사키에 유미까지....” 

  “원래 사만다는 후쿠오카로 납치된 이후, 사사키가 고용한 할머니에 의해 돌봐지고 있었는데, 사사키가 제이에게 매수된 것이 탄로 나면서 레몬에서 유미를 대체 투입했지요.” 

  “유미를요?” 

  그가 전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둠 속에서 푸르른 빛이 반짝였다. “아시겠지만, 레몬에는 자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폐증에서 벗어난 사람이지요. 흔치 않은 사람 중에서도 흔치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세상이죠. 유미도 과거에 고도 자폐에 시달리다 벗어난 경우인데, 오래전 자폐 치료를 위해 온 가족이 미국에서 2년 정도 머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일본인인가요?” 

  “아빠는 한국인, 엄마는 일본인입니다. 자폐 치료 차 미국에 머물 때, 사만다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나 봅니다. 레몬은 이 사실을 파악하고 있지 못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운명의 장난처럼 유미가 후쿠오카에 감금된 사만다를 본 순간, 마음이 어떠했으리라 생각됩니까? 자신의 불치병을 고쳐 준 스승이 비참한 모습으로 감금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나 됩니까? 가슴이 무너질만한 일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유미는 혼돈 그 자체였을 겁니다. 왜냐면, 그 상황에서도 계속 사만다에게 메일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감금된 사람으로부터....” 

  “선생님은 유미가 그런 상황이란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한 팀으로 친하게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비밀을 지켰지요. 유미는 제이에게 자신이 레몬이라는 사실도, 사만다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밝히지 않고, 예전과 변함없이 사만다 행세를 하는 제이와 연락을 계속 주고받고 있었죠. 그런데 사사키를 매수한 후 유미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제이가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 접근했을 거라고 봅니다. 유미가 제이의 함정에 넘어간 거라 볼 수 있죠.” 

  “그럼 결국 유미는 제이에게 이용만 당하고, 자신의 진짜 스승인 사만다를 죽게 만든 거잖아요? 유미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일자 눈썹은 조선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까운 바다 속으로 들어갈 겁니다.” 

  “꼭, 사람을 그렇게 해야 하나요? 차라리 유미를 통해 제이를 유인하는 방법이 좋지 않을까요?” 

  그는 대꾸도 없이 어둠 속 캠핑카를 향해 걸어갔고 나도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랐다. 어둠에 잠긴 조선소 야드의 거대한 타워 크레인을 바라보니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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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일, 진해, 윤정민 

 

  현관 밖에서 태우의 기척이 들려 휴대폰을 확인하니 평소보다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대충 용무를 끝낸 다음 허둥지둥 나갔다. 

  “늦어서 미안하다. 한 번 일어났다가 다시 잠 들었네.” 

  허리를 두어 번 돌리는 시늉만 한 채, 달리기 시작했다. 시원한 아침 공기에 여름의 초입임에도 더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데이트 안 하냐?” 

  “엄마도 계속 바쁜 것 같고, 마유미도 일이 있다네.” 

  남원 로터리를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직선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언덕 위의 하얀 건물이 보인다. 태우가 어김없이 고개를 돌렸다. 사만다가 투신하며 벌써 세 번째 자살을 기록했다. 타살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살이었다. 사건 관계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있었고, 수사는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사만다가 투신한 병원은 일반인이 접근조차 어려운 비밀공간에 사복경찰들도 상주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주일의 말에 의하면, 8층은 병원 대부분의 환자도 모르는 곳이었다. 설사 사만다를 노리는 누군가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런 공간에서 그녀를 강제로 죽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 말대로 자살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이 시점에 그녀는 뛰어내려야 했을까. 사사키가 남긴 죽음의 증언을 부수고, 제이를 살려낸 그의 누이는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을까? 그녀의 투신 소식이 알려진 이후, 레인보우 학부모들이 하루에도 서너 번씩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물론 아버지는 받을 수도 없었고 받지도 않았지만.... 잊혔던 그녀의 모습이 희대의 사건처럼 언론매체에 재등장했다. 눈이 빠지고, 귀가 잘려나가고, 혀가 도려내진 그녀의 모습이 한 기자에 의해 특종으로 공개되면서 그 파장은 커졌다. 은폐된 진실은 알지 못한 채, 대중들은 대부분 좋은 소리 일색이었다. 젊은 나이에 불행하게 요절한 자폐아들의 천사. 자폐 치료의 선구자. 기가 막혔다. 

  “태우야, 돌아올 때, 저기 한 번 들렀다 올까?” 나는 요양병원을  가리키며 말했고 태우는 오케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해안도로를 되돌아오며 요양병원 언덕으로 올라갔다. 큰 사건이 있었던 병원답지 않게 평온함이 느껴졌다. 건물 앞 주차장을 지나 정문 쪽으로 걸어가니, 우측 끝으로 폴리스 라인이 보였다. 금이 간 벽돌 바닥의 얼룩 위로 사람 모양의 하얀색 선이 그려져 있었다. 입구에서 레이저 빔을 쏘듯 째려보는 파란색 유니폼 남자 두 명과 마주쳤다. 

  “가자!” 나는 태우의 팔을 살짝 건드리며 속삭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 돌아섰다. 

  “왜 그랬을까?” 

  “글쎄....” 태우가 언덕을 내려가다 건물을 뒤돌아봤다. 

  “잘 된 건지도 몰라. 이젠 제이가 불리해지겠지. 사사키의 유언으로 드디어 죗값을 받나 했었는데 납치되었던 사만다가 나타나 동생은 죄가 없다고 말한 셈이었잖아. 근데 자살을 해버렸으니.” 

  “그렇겠지? 제이 그놈도 죗값을 받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암만 생각해 봐도 이 사건 이상하지 않냐? 관련자들이 전부 죽어 나가고 있어. 그것도 자살로. 제대로 수사조차 안 될 것 같은데. 희대의 미제사건이 되지 않을까?” 

  언덕을 내려와 해안도로에 접어들자 우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남원로터리를 지나 중원로터리로 접어 들었을 때, 갑자기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나타났다. 우리는 동시에 달리는 것을 멈췄다. 텅 빈 거리에 휑하니 세워진 하얀 아우디의 운전석과 보조석 차창 밖으로 뻗어 나온 손이 우리를 향해 동시에 까닥이고 있었다. 심장이 달릴 때보다 더 쿵쾅거렸다. 태우도 평소보다 발걸음이 더뎠다. 달리기에 자신 있었기에 나는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파마머리가 까딱이던 손을 먼저 내리며 말했다. 

  “학생! 근처에 맛있는 해장국집 있나? 뭐 기사식당 같은 데라도.” 서울 말투였다. 해장국....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시장 쪽으로 가면 되는데,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걸어가도 되는데 제가 알려 드릴까요?” 태우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들은 좋지 라는 표정으로 키득거리며 차에서 내렸고 천천히 우리 뒤를 따라왔다. 외모 탓일까. 희한한 향수 냄새 때문인가. 거슬리는 말투 때문일까. 이른 아침에 마주하던 익숙한 풍경이 일그러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걷는데도 파마머리와 장발이 신경 쓰여 뒤에 눈과 귀가 붙은 듯했다. 맥박 소리가 귀에 울렸다. 근처에 경찰서가 없었다면 불안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조용해서인지 귀가 밝아서인지 예전처럼 뒤에서 소곤거리는 그들의 작은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번 거 하고 이번 거 합쳐서 2장 맞죠?” 

  “그래, 밥 먹고 얼른 가서 확인해 보자. 벌써 갖다 놨을 거야.” 

  “상자 열어서 일일이 확인할 필요 없겠죠?” 

  “그럼. 딱, 가로 세로만 보면 견적 나오지. 2장은 오만 원으로 비타민 상자 2개면 될 거야. 그 사람 확실해.” 

  “우와.... 형하고 죽이 너무 잘 맞는 거 같은데 어쩌지.... 아예 우리 이 길로 나갈까?” 장발이 웃으며 쑥덕거렸다. 

  “이만해서 다행이지, 우리도 콩밥 먹을 뻔했어. 8층에 그 젊은 놈들 신분증까지 내밀면서 당황하던 거 봤지? 어찌나 웃기던지 너하고 싸우는 척하면서 웃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어.” 

  “원래 그렇게 비상계단에서 욕하면서 큰 소리 내고 싸우면 사람들은 무시를 못 하잖아. 특히 경찰은 자기가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소란을 지나칠 수 없는 거야. 마치 자신들이 경찰인데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지. 설사 외부에서 따로 출동한다 해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비난을 피하기 어렵지. 미끼라는 것은 물어야 제맛이야.” 

  그들의 대화 소리가 귀에 쏙쏙 박혔고 어렴풋하게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그때 라이브 카페에서 그년은 형이 화장실에서 너무 오래 했어. 난 시간이 없어서 대충해서 너무 아쉽다 정말. 정신을 잃었는데도 반응이 아주 살아 있던데. 나이에 비해 몸도 좋고. 하마터면 못 참고 증거를 남길 뻔했어.” 

  “야. 야. 그건 진짜 조심해야지. 그래 봐야 5분도 못했어. 화장실 년보다 그 병신 년, 사만다인가. 나는 그 년이 더 좋던데. 카페에서 그년 데리고 와서 감금하고 정신 들 때까지 수도 없이 했지. 깨어났을 때도 귀신같은 게 뭔 말도 못하고 울부짖기만 하는데 난 그게 더 흥분돼서 못 참겠더라고. 도대체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어.” 

  “거. 혼자 재미 다 봤네. 나는 제이 뒤치닥거리 하느라 그 병신 년은 손도 못 댔는데. 그래도 그년은 제이 친누나인데 그냥 두지 그랬어? 제이가 알면 큰일 날 텐데.” 

  “야. 그년은 죽기 전에 내가 소원 한번 들어 준 거야. 지 누나 죽기 전에, 아니 죽이기 전에 당한 거를 신경이나 쓰겠냐. 그래도 들키지 않도록 조심은 해야지. 그놈은 시키는 대로 하면 돈도 잘 주고 신사처럼 굴지만, 엉뚱한 짓 하면 괴물로 변하니까. 아무튼 화장실 년 하고 병신 년 건은 비밀이야.” 뒤에서 떠벌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해장국 집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장발이 가래침을 뱉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태우가 돌아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일산에서 제이가 처음에 우리한테 일 맡긴 게 생각나네. 호수공원 앞 도로에서 꼬맹이 하나 갈아버리라고 했잖아.” 장발의 목소리였다.

  “그랬지. 그때 네가 실수하는 바람에 제이가 우릴 죽일 것처럼 날뛰지 않았나?” 

  “뭔 소리야? 형이 실수했잖아. 내가 꼬맹이 쪽으로 핸들을 꺾으려는 데 형이 그 아줌마 밀어 버렸잖아. 그 꼬맹이 엄마....” 

  “그런가.... 그때도 실수만 안 했으면 한 몫 단단히 잡았을 텐데. 지금까지 구차하게 이러고 있지도 않을 거고.”

  “그래.... 우리 일은 그런 일이지....” 장발이 파마머리를 꾸짖듯 말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해장국 집이 보였다. 

  “저기 앞에 보이시죠? 식사하고 나중에 돌아올 수는 있겠습니까?” 태우의 말에 그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호기 좋게 손을 흔들어 댔다. 갈 길 가라는 표시였다. 태우와 내가 몇 걸음 못 떼었을 때, 장발이 잠깐이라고 소리치며 태우를 불러 세웠다. “학생은 낯이 익은데.... 집이 여긴가?”

  “저요? 네 여기 삽니다.” 

  “아니다.... 가라, 가. 고마워.”  

  그들이 식당 안으로 멀어지며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왜 그래, 누군데, 그냥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등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사라진 후, 태우와 나는 자극적이었던 이 만남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의 대화 중에 언급된 사만다라는 말 때문에, 나는 그들이 말하는 제이가 제이 김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태우도 나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듯 표정이 심각했다. 

  “태우야! 우리 저 사람들 미행해 볼까? 밥 먹는데 한 20, 30분 걸릴 텐데 네 차로 해 보면 안 될까?” 

  태우가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로터리로 돌아와 흰색 아우디 근처에서 10분 정도 기다렸다. 갑자기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고 어질어질했다. 일산. 꼬맹이. 엄마. 갈아버려. 제이.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다 순식간에 멈췄다. 어느새 은색 쎄라토가 나타났다. 태우는 아우디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길가에 쎄라토를 세웠고 그곳에서 우리는 형사처럼 잠복을 시작했다. 

  “제이와 한 패거리 같지?” 

  “그런 것 같은데, 나쁜 놈들 같아.” 

  “미행 잘 할 수 있겠냐? 좀 떨린다.” 

  “글쎄.... 여기는 고향에다 모르는 길도 없고 나도 한 운전하니까 떨어져서 가면 되지 않을까.” 

  얼마 후 장발과 파마머리가 이쑤시개를 물고 나타났고 흰색 아우디가 거드름을 피우듯 움직였다. 은색 쎄라토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아우디를 따라갔다. 태우 말대로 날고뛴다 해도 이곳에선 우리 손바닥 위였다. 아우디가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 허름한 구멍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쎄라토도 그들을 지켜봤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적막한 골목이었다. 가게 문은 닫혀 있었고, 입구의 평상 옆에는 상자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장발이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평상으로 다가가 상자 틈에서 비타민 상자 2개를 들어 흔들어 보더니 품에 안고 차에 다시 올랐다. 몇 분쯤 지나 아우디가 다시 출발했다. 

  “이제 어떡할까? 무작정 쫓아갈 수도 없겠는데 그냥 돌아가서 생각 좀 해 보자.” 나는 태우에게 말했고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20미터 앞 정도에 멈춰 있던 검정 K7이 미끄러지듯 아우디를 슬며시 따라가기 시작했다. 

  “저 차는 또 뭐지? 아우디 따라가는 것 같지?” 

  “뭔가 이상하다.” 태우도 K7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우디가 얼마 안 가 도로변의 한 자전거 가게 앞에 멈췄고, K7도 차들 사이에 멈췄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가게 문은 열려 있는 듯했다. 우리도 K7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 멈춰 섰다. 장발과 파마머리는 각자 비타민 상자를 하나씩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10분 정도 지나 사이클 선수로 탈바꿈하고 나타났다. 타이트한 복장에 철모형 안전모까지 눌러쓰고 크로스백을 멘 채, 가볍고 비싸 보이는 티타늄 사이클을 끌고 능숙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뭐야? 어떡하지.... 이제?” 태우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역시 K7이 그들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안했지만 우리도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태우의 운전은 상공의 매처럼 멀리서도 침착하게 목표물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배를 타려는 듯 항구 변두리 구석에 자전거를 세웠고, 우리는 100미터 정도 떨어진 낡아빠진 자판기 옆에 차를 세우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K7에서 남자 두 명이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둘 다 검정 옷에 날렵한 걸음걸이가 운동선수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우는 불안한지 시동을 끄고 내부 문을 잠갔다. 항구는 지나치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검정 옷이 빠르게 다가가자, 사이클 남자 둘도 위험을 직감한 듯 큰소리로 뭐라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안전모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배를 내밀고 팔과 어깨를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검정 옷들을 쏘아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화처럼 서로 주고받으며 격렬한 불꽃이 튀는 액션 장면을 상상했지만 실제는 너무도 짧았다. 눈을 찌를 것 같은 장발과 파마머리의 살벌한 삿대질 사이로 검정 옷의 짧은 움직임이 있었고 둘은 장난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장발은 기절하듯 얼굴을 그대로 바닥에 세게 찧었고 파마머리는 큰대자로 뻗었다. 천천히 돌려보지 않으면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검정 옷은 비싸 보이는 사이클은 그대로 둔 채, K7 뒷좌석에 쓰러진 장발과 파마머리를 쓸모없는 짐처럼 구겨 넣고 사라졌다. 

  “돌아가자.” 

  우리는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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