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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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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일, 진해, 최유진 

 

  사만다가 병원에서 어떻게 진짜로 둔갑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일자 눈썹이 잡아 온 사이클 복 남자들은 낯이 익었다. 장발과 파마머리. 사만다와 정신을 잃기 전 라이브 카페에서 추근거렸던 흐릿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들은 운동장 근처에 위치한 레몬의 검도 체육관에서 깨어난 후, 크로스백을 가슴에 안고 불쌍한 표정으로 무릎까지 꿇으며 살려 달라 빌었다. 자신들이 왜 잡혀 왔는지는 나를 보는 눈길에서 알고 있는 듯 느껴졌다. 장발은 나를 게슴츠레 살펴보더니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자신들은 그저 제이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시발, 좆같이 라는 추임새를 수도 없이 섞어서 그간의 스토리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파마머리는 비굴한 눈으로 힐끔거리며 날 쳐다봤다.   

  제이가 사만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등에 심어놓은 위치추적기 때문이 아니라 유미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와 사만다가 머물던 해변의 안전가옥 근처에서 변압기를 건드려 정전을 일으키고, 외출 시 미행했으며, 라이브 카페에서 종업원 몰래 음식에 약을 넣어 정신을 잃게 했다. 이후 카페에서 정신을 잃은 진짜 사만다는 그들이 데려가 감금하고, 사만다로 변장한 제이 김이 약에 취한 나를 데리고 안전가옥으로 들어갔다 다시 빠져나갔던 것이었다. 그렇게 제이는 사만다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레몬의 은신처까지 들어왔고, 이후에는 경찰서에서 가짜 진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이가 사만다의 모습으로 경찰에 진술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실종된 사만다가 어떤 모습으로 감금되었는지, 경찰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제이는 오랜 습관대로 능숙하게 사만다로 변장한 후 경찰에 진술했는데, 손 글씨로 지문이 없어져 버린 사만다를 흉내 내기 위해 지문 제거용 약품도 사용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제이는 경찰을 속이고 요양병원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제이는 그를 노리는 계획에 대해서도 유미를 통해 눈치채고 있었고, 치밀하게 대비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병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호기롭게 떠벌리기 시작했다. 먼저 가짜 사만다 제이는 805호 화장실 변기에 야구공처럼 둥글게 만든 휴지 3개를 넣고 비상호출 버튼을 누른다. 간호사가 입구의 사복경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805호로 들어가 화장실 변기가 막힌 것을 발견한다. 조치를 취해 보려 하지만 제이는 용무가 급한 듯 배를 움켜잡고 있다. 간호사는 제이를 데리고 805호를 나와 8층 복도 끝 화장실로 데려간다. 제이는 화장실로 들어가며, 간호사에게 괜찮으니 이만 자리로 돌아가라 말한다. 간호사는 돌아간다. 장발과 파마머리가 비상계단에서 소란을 피워 805호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복경찰을 유인한다. 제이가 805호실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방심한 경찰의 유인작전은 손쉽게 성공한다. 8층 복도 화장실에 있던 제이는 자연스럽게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화장실로 들어가 미리 준비된 후드티와 트레이닝복을 환자복 위에 겹쳐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다. 그리고 주차장 구석에서 환자복 차림으로 대기하고 있던 진짜 사만다를 데리고 805호로 올라오게 된 것이었다. 이후, 진짜 사만다는 방 화장실에 숨기고, 제이는 다시 옷을 벗고 가짜 사만다로 변장해 방을 빠져나갔고 8층 복도 화장실에서 잠깐 머문 후, 사복경찰들이 돌아왔을 때 805호로 되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몸동작은 번개 같은 일자 눈썹도 머리 회전은 느린 것이 확실했다. 시종일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듯 맹했다. 그때 유리창에 붙어있던 딱정벌레 카메라에는 왜 제이가 누나를 방 화장실에 숨기는  모습 등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또 병원에는 CCTV도 많을 텐데.... 특히 8층에는.... 장발과 파마머리가 소란을 일으켜 문 앞의 사복경찰이 비상계단으로 나간 그 짧은 시간에, 제이가 그 일들을 처리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었다. 장발 머리가 비웃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 이유?” 

  일자 눈썹이 한 대 칠 것 같은 자세로 화를 내며 다가갔다. 

  “새 대가리도 아니고 이런 것도 금방 이해를 못 합니까?” 

  “이 자식이.” 일자 눈썹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입 닥치고 있으려는데, 하는 짓이 답답해서 한 수 알려 드리지. 경찰로 보이진 않으니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요. 한 번 생각해 보슈. 제이 혼자 이 일을 어떻게 다 합니까? 특수 첩보원도 아니고, 우리도 이 일 도와주는 대가로 두 장을 받았소. 우리 같은 사람은 이 돈 벌려면 평생을 일해도 모자라요, 알겠소? 우리는 밖에만 있어서 누군지는 몰라도 그 병원에서 우리 같은 사람 있었을 거 아니오. 제이는 돈도 많으니 얼마든지 매수했을 거 아니요. 대단한 일도 아닌데 눈 한번 딱 감는다고 생각하는 거지 뭐. 요즘 같은 불경기에 우리 같은 사람에게 10원 한 푼 도와주는 사람 있는 줄 압니까? 그리고 CCTV, CCTV 하는데 그것도 만능은 아니지. 오히려 그것 때문에 방심만 커져요. 얼핏 듣기로 8층은 전용 엘리베이터 내부에 1개, 입구 쪽에 1개, 간호사 데스크 쪽에 1개가 있다는 것 같은데 내부에 조력자 있으면 CCTV 돌려봤자 얻을 만한 건 찾을 수도 없을 거요. 내가 누구인지 말은 할 수 없지만, 거 있잖아요. 걸레 들고 이곳저곳 먼지 닦고 다니는 아줌마, 아저씨. 아무튼 돌아다니면서 제이가 움직일 때 옆에서 엘리베이터하고 현관 CCTV도 막 닦아대고 그랬을 거요. 그런다고 문제될 건 없지 뭐. 딱정벌레인지 뭔지도 805호 유리창에 들러붙기 훨씬 전부터, 진짜 사만다는 805호 화장실에서 이미 숨죽이고 있었을 거고. 제이는 당신들 계획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우리가 사주를 받고 도로에서 아줌마 한 명을 들이받아 그 사람이 죽었다 칩시다. 딱 피치 못할 사고처럼 빠져나오려면 목격자 두 명 정도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란 말이오. 사전 시나리오에 보행자 한 명, 운전자 한 명만 조력자로 등장시키면 된다는 얘기요. 그게 어려운 일이냐. 한두 장이면 한 푼이 급한 사람들은 줄을 서요. 줄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이 아니라 억을 벌 수 있단 말이오. 마음 단단히 먹음 돼요. 그래서 이런 종합예술을 하려면 머니가 필수지.”

  그럼 제이는 자신의 누나가 떨어져 죽어가는 동안 화장실에서 숨죽이고 있었다는 말인가.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던 것일까. 왜 자신을 죽이려는 레몬에게 대항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따라온 누나를 희생양으로 만들어야 했을까. 비정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당신들이 누군지 정말 모릅니다. 제이하고 무슨 관계인지도 모르고요. 단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제이가 우리 여기 잡혀 온 거 알면 가만히 안 둘 겁니다.” 장발 머리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당연하지. 쓸모없어진 놈이 비밀까지 떠벌리고 다니니, 가만히 두는 게 이상하지.” 일자 눈썹이 말했다. 

  “이제 우리 그만 보내 줘도 되지 않습니까?” 

  “도망가면 더 위험해. 제이가 너희들을 애초부터 살려 둘 거라 생각했나? 이렇게 입이 가벼운 데. 우리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너희들은 그냥 술술 내뱉어 버리잖아. 제이도 처음부터 때가 되면 손쓰려고 했을 거야. 조력자, 조력자 하는데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이래서 우리가 너희들 같은 놈들과 관점이 다른 거야. 우린 그딴 거 안 믿어. 일을 마무리하면 당연히 조력자도 사라져야 해. 그게 완전 범죄의 기본이지. 혹 하나 떼려다 혹 여러 개 붙으면 어찌 살라고. 안 그래? 우리가 오히려 너희를 살려준 거야. 앞으로 너희가 살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뭔데요?” 

  “제이가 죽는 거야.” 

  “이보세요. 형씨. 저희도 돈 받고 험한 일을 많이 하지만 원칙은 지킵니다.” 

  “그게 뭔데?” 

  “의뢰인을 죽이진 않습니다.” 

  일자 눈썹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너희 같은 아가리 파이터에게 제이를 죽여 달라 부탁하리라 생각하나? 콱 제대로 물어뜯지도 못하는 똥개 같은 입으로 그 정도 털어놨으면 이미 제이를 배반하고도 남았어. 그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지만 너희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제이가 확실히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도....” 

  “제이는 아직 진해를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그렇지?” 

  “그렇게 알고 있는데 저희도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너희들을 풀어 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해라.” 

  “정말입니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제이가 먼저 너희들을 죽일 거야. 그리고 어디서 다시 그 입 나불거리면 그 즉시 죽는다고 생각해.”      “네.... 그런데 당신들은 어디 소속입니까? 경찰이나 기관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조직이나 용역도 아닌 것 같은데....” 

  일자 눈썹은 대꾸 없이 쓴웃음만 지으며 방을 나갔고, 파마머리가 계속 내 눈치를 살폈다.

  장발과 파마머리는 그렇게 풀려나 항구로 다시 돌아갔고, 그들의 계획대로 배에 올랐다.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거제도로 직행하지 않고 근처 횟집에서 소주를 3병 마신 후 어선을 몰고 여객선과 충돌했다는 것이었다. 승객을 가득 태운 여객선은 음주 어선에 의해 한바탕 소란을 겪어야만 했다. 그들은 긴급체포 되었고, 언론에도 시끄럽게 오르내렸다. 음주 선박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유미는 아직 살아 있었는데 이유는 제이가 그녀에게 다시 이 메일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첨부된 파일에는 요양병원에서 사만다가 창밖으로 떨어지는 과정이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었다. 영상에는 유리창에 붙은 딱정벌레 카메라도 보였다. 805호 어딘가에 창문 방향으로 비밀 카메라를 역으로 설치해 레몬의 계획을 녹화한 듯했다. 유미에게 전해진 메일의 목적은 분명했다. 앞으로 자신을 건드리지 말고 장발과 파마머리도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유미도 죽이지 말라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었다. 약속을 어길 시, 병원에서 녹화된 영상은 곳곳에 퍼져 나갈 것이라고 제이는 레몬에 선전포고했다. 결국, 제이의 속셈은 누나를 희생양으로 레몬의 약점을 잡아내고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나 행세하며 살아왔던 자신의 원죄를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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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3일, 진해, 윤정민 

 

  늦은 저녁을 먹고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던 중, 여객선과 충돌사고를 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이클 남자들이었다. 장발과 파마머리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어선을 몰고 나가다 여객선에 충돌했다고 진술했다. 그들이 틀림없이 K7을 타고 온 검정 옷들에 붙잡혀 간 것을 봤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음주 선박사고를 일으킨 사람들로 변해 있었다. 제이와 한통속인 것은 확실했다. 그들은 도로에서 나를 갈아버리려다 엄마가 튀어나오자 그녀를 치었고, 엄마는 즉사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명백한 실수다. 날 죽이려다 엄마를 죽인 것이다. 장소는 일산 호수공원 앞 도로. 의뢰인은 제이. 내 엄마를 앗아가고 내 기억을 앗아간 사고의 네 번째 기억, 진짜 기억이었다.  

  주일은 놀랍게도 제이가 장복산 게스트 모텔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줬다. 이 모든 사건이 시작된 곳이었다. 게스트 모텔은 사만다 실종 사건 후, CCTV를 많이 설치한 덕분에 비밀스러운 커플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 외지 관광객들이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그곳에 제이가 다시 돌아왔다. 악마의 귀환이었다.


  오전 5시 00분. 오늘은 태우가 오지 않아도 달리기를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홀로 집을 나서자 어둑한 공간 사이로 익숙한 외로움이 스며왔다. 장복산에서 운동화 한 짝을 잃어버린 이후로 그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복잡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내 과거는 그대로 묻혀 버렸을 것이다. 북원로터리를 돌아 여좌천을 따라 장복산 방향으로 계속 달렸다. 오랜만이라 낯선 느낌이 들었다. 스쳐 지나는 나무 사이사이, 골목 사이사이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거렸다. 검정 옷의 사람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바닷가에서 사이클 남자들을 데리고 갔던 검정 옷의 저승사자들. 정체는 뭘까.... 게스트 모텔이 보이기 시작했다. 꼭대기 층은 이른 시각임에도 불이 켜져 있다. 모텔을 지나쳐 장복산 입구 경사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경사로라 숨이 가빴다. 어디선가 벌레 날갯짓 같은 소리가 들려서 뛰는 것을 멈췄다. 귀를 기울이자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는 것 같은데 주변에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람의 움직임도, 새들의 울음소리도, 바람에 나부끼는 스산한 수풀 소리도 아니었다. 그건 기계음이었다. 게스트 모텔을 내려다보며 경사로를 조금씩 내려가니 모텔 뒤편의 큰 소나무 숲 근처에서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소나무들 사이로 작은 비행체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드론이었다. 10대는 족히 넘어 보였는데 편대를 형성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 공중에서 줄다리기라도 하듯 10대 모두 주황색 호스 같은 것을 집어 들고 있었다. 드론들은 건물의 옥상 주위를 낮게 날고 있었다. 호스로 액체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큰 바위 뒤에 앉아 드론이 하는 짓을 한참을 보고 있으니 이런저런 고민이 앞섰다. 그래도 섣불리 나서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불쑥 나올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조심스러웠다. 하늘이 제이에게 천벌이라도 내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모텔 앞쪽을 보니 익숙한 거리에서 불안감이 느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텔 맞은편 공터에 주차된 차량에서는 인기척이 있었고, 평소와 다르게 등산객으로 위장한 듯 보이는 젊은 남자 두 명이 식당가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경사로를 조금씩 올라갔다. 지금 입구로 내려가면 그들이 만들어 낸 조작된 풍경 속으로 빨려 들고 말 것만 같았다. 다시는 이런 사건엔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한발씩 조심스럽게 경사로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뛸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산 밑에서 이별한 줄 알았던 낯선 풍경이 또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경사로를 따라 가볍게 걷고 있었다. 등산객으로도 보이지 않았고, 잠복하고 있는 경찰 같지도 않았다. 길고 둥근 녹색 배낭을 짊어진 것을 보니 행군하는 군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곤두선 신경을 달래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그들 옆으로 천천히 지나쳐 갔다. 두 명이 동시에 아무 말 없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제발, 제발, 부르면 안 돼’ 도망갈 준비를 했다. 서서히 호흡이 가빠지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거리를 벌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돌아보니 한 명이 축지법을 쓴 듯 바짝 다가와 있었다. 민첩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도망가면 잡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얼굴을 마주하니 진한 일자 눈썹이 왠지 낯이 익었다. 

  “어디 가세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깅요.” 

  “그러시군요. 이 시간에 여기는 사람들 거의 없던데, 오늘 처음 조깅 오셨나 봅니다.” 

  “아닙니다. 옛날에는 여기서 자주 달렸는데, 사정이 생겨 오랜만에 왔습니다.” 

  “그렇군요.” 

  그가 목을 한 바퀴 돌리자 우두둑 뼈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보란 듯이 근육 덩어리인 팔과 어깨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갑자기 공격하는 건 아닌지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등산하시나요?” 이번엔 내가 물었다. 묻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 일행 한 명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그래도 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배낭이 꽤 무거워 보이는 게 어쩌면 잡히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이 새벽에 인적 없는 산속에서 나를 공격한다면 손도 못 쓰고 당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아.... 여긴 다시 오지 않으리라. 후회가 밀려왔다. 이 새벽에 또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선 안 된다. 침묵이 흘렀다. 

  “그럼 수고하세요. 저는 그만.” 

  간단한 묵례를 하고 돌아선 순간, 뭔가 옆구리를 툭 쳤다. 헉. 정확히 맞아서인지 이건.... 숨이.... 안 쉬어졌다. 너무 고통스러워 도망가려 해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하얀 면 수건이 얼굴을 덮었다. 희미한 냄새가 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오려 했다. ‘숨 쉬면 죽는다. 나는 참을 수 있다. 나는 달리기 마스터다.’ 통증 때문에 숨이 가빠왔지만 나는 계속 대뇌였다. 참아야 한다. 눈앞이 아른거렸고 나무가 옆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기가 어디일까. 슬며시 실눈을 뜨니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흐릿하게 그들이 보였다. 일자 눈썹은 크고 둥근 헤드폰을 낀 채 길고 굵은 안테나가 달린 검정 네모 상자의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군대 통신병처럼 보였다. 옆에 앉은 남자는 같이 화면을 보면서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도대체 뭘 하는 거지.... 날 붙잡고 있는 이유가 뭐야. 잠시 후 그들이 일어났다. 일자 눈썹이 헤드폰을 벗어 던졌다. 

  “아. 끝났다. 5층, 6층 파이어는 쉬웠네.” 

  “물품 비치 룸에는 턱도 없고, 문틈도 다른 곳보다 많이 벌어져 있어 미니미 침투는 껌이지 뭐. 비상계단 쪽에도 뭘 저렇게 쌓아놨어. 저래서 안 된다니까. 불나면 사람이 대피를 못 하지. 모텔이 겉만 번지르르하지 부실공사 덩어리고 안전관리도 엉망이야 엉망.” 

  “근데 5층, 6층에 손님 없는 거 맞아?” 

  “그렇겠지. 분명히 오늘 5층, 6층은 비어 있다고 확인했어.” 

  “그래 이미 파이어는 끝난 거지. 잊어버리자. 우린 지시받은 대로 이행한 거야.” 

  “오케이.” 일자 눈썹은 큰일을 마친 듯 크게 기지개를 켰고, 다른 남자는 골프채를 휘두르는 자세를 두어 번 취했다. 

  잠시 후 작은 진동 소리에 일자 눈썹이 메시지를 확인한 후 헤드폰을 다시 끼고 진지한 표정으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다른 남자도 옆에 붙어 앉았다. 일자 눈썹이 조종간처럼 생긴 것으로 화면을 보며 게임이라도 하는 듯 무엇인가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왠지 산 밑에서 봤던 드론일 것만 같았다. 저들이 제이를 노리는 사람들인가.... 뭐 하는 사람들일까.... 저걸로 뭘 하려는 거지. 

  “타깃 포착! 접근 중!” 

  “오케이!” 

  “파이어 준비! 잠깐만, 근데. 저거 뭐야?” 일자 눈썹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 옆의 남자가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엄마하고 애잖아.” 

  “뭐야. 이거. 어디서 올라온 거야. 저거, 저거, 쟤는 정신이 나간 거야. 뭐야. 워터파크에 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냐. 휘발유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옥상을 휘젓고 다니고 있잖아. 엄마는 잡으러 다니고, 이거 개판인데. 어떡하지....” 

  “잠깐만, 내가 다시 연락해 볼게. 레몬! 타깃 외 엄마와 아이 포착! 확인 바람!” 

  “대기! 잠깐 대기하라는데,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아.” 

  “저기 저건 또 뭐야.” 

  “어라? 레몬! 남자 한 명 추가 포착! 오케이 대기하겠다!” 

  “근데, 가만 저놈 저거.... 김태우 아냐?” 한 남자가 말했다. 

  “어디? 정말. 김태우 맞네. 빠져나가지 않고 뭐 했지. 저놈은 왜 옥상으로 올라온 거야. 도대체가.... 엄마나 아들이나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 없네.”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들의 입에서 김태우라는 이름을.... 왜 내 친구의 이름이 지금, 저기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똑똑히 김태우라는 이름을 말했고, 작전에 혼선이라도 생긴 것인지 누군가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들을 황급히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끝까지 안면을 감쌌던 면수건의 약품을 맡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던 것일까. 그들은 내가 깨어 있다고, 지금 그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었다. 정신도 이 정도면 괜찮았다. 

  “파이어 준비!” 

  “파이어?” 

  “작전 변경 없데.” 

  “아, 저기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있잖아, 워터파크로 착각하고 있는 저 애는 휘발유로 온몸을 칠갑하고 있는데. 게다가 김태우까지 있잖아.” 

  “우리가 언제 그런 것 따져가며 일했냐.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미니미드론 타깃 접근! 파이어 준비!” 

  “잠깐만.... 저놈 뭐 하는 거야 지금. 김태우가 드론 밑으로 이동하고 있어. 제이하고 마주 보고 뭐 하는 거야.” 

  “아.... 드론을 제이 쪽으로 다시 이동시키면 건물 앞쪽의 사람들에게 노출될 거야. 어쩔 수 없어.”

  “그렇긴 해도.... 근데 둘이 상당히 심각한데....”

  팟! 그때, 일자 눈썹이 쓰고 있던 헤드셋 코드가 빠졌는지 네모난 기계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웃음소리, 엄마가 아이에게 외치는 소리, 그리고 태우와 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일자 눈썹이 헤드셋 코드를 네모난 기계에 다시 끼웠다.

  “정 위치 파이어 하겠다! 3, 2, 1, 파이어!”  


  Epilogue -Aria  


  애초부터 제이와의 협상이란 용납될 수 없었다. 약점을 잡고 잡히는 밀월관계는 개인들이나 하는 것이지 레몬의 세계에선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탓일까, 천하의 제이도 결국 공권력에 자신의 신변안전을 맡겼다. 레몬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럼에도 레몬은 포기하지 않고 그런 상황을 기회로 여겼다. 레몬은 그들 말대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분명한 철학이 존재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아무리 제이 주변에 경찰이 진을 치고 함정을 파고 기다려도 레몬은 태풍의 눈으로 진입했다. 나는 레몬이 되고서야 그 고집을 알게 되었다. 


  작전명 ‘화형’은 오전 5시 00분에 시작되었다. 일명 미니미라는 드론과 벌레 로봇들이 주도하는 작전이었다. 제이가 머무는 장복산 게스트 모텔 옥상으로 날아든 드론들이 구석구석에 인화성 액체를 먼저 도포한다. 드론의 조종은 장복산 중턱에서 일자 눈썹과 다른 한 명이 맡는다. 저소음 프로펠러를 장착한 특수 드론은 모텔 주변에 잠복 중인 경찰 눈에 띄지 않게 모텔 뒤쪽 소나무 숲에서 저공비행하며 옥상으로 날아간다. 옥상에 인화성 액체가 충분히 도포되면, 그 위로 호스를 이용해 휘발유를 재차 뿌린다. 옥상 작업이 마무리되면, 벌레 로봇들이 5층과 6층의 물품적재 공간과 비상계단 곳곳으로 기어들어 침구, 수건 등 가연성 물건들에 불을 붙인다. 물품 창고는 문턱도 없이 틈새가 벌어져 있다는 점을 이용한 작전이었다. 벌레의 조종 또한 장복산 중턱에 있는 일자 눈썹이 맡는다. 벌레는 너무 작고 빨라 모텔의 CCTV로는 잡을 수도 없는 경로로 움직일 것이고, 어떠한 외부 침입의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화재 감식 결과도 전기 합선 정도로 봉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5층과 6층에 화재를 발생시키는 이유는 7층 펜트하우스에 묵고 있는 제이를 옥상으로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작전 개시 하루 전 5층과 6층의 투숙객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모텔의 5층과 6층에 불길이 시작되고, 펜트하우스의 제이가 옥상으로 올라오면 드론 1대가 같은 경로로 날아가, 불꽃을 낙하하고 원래 위치로 복귀할 것이다.

  나는 공터 주차장에 잠복 중인 경찰들이 어렴풋이 보이는 하천 옆 캠핑카 내부에서 미니미가 송출하는 작전 영상을 보고 있었다. 이번 작전은 노신사가 직접 지휘했다. 차 안에 있으려니 갑갑함이 몰려왔다. 레몬은 스스로의 교리에 갇혀 버린 사람들이었다. 제이 하나 잡으려고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억척스럽게 벌이고 있었다. 나 같으면 빌어먹을 경찰에 들통나건 말건 철학이건 나발이건 힘 좋은 남자들 딱 대동하고 집에 찾아가 팔다리 결박하고 목뼈를 분질러 버리겠다. 작전은 개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날은 점차 밝아오고 있었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모텔에서 불이 시작되자 공터 주차장과 모텔 주변에 대기하던 경찰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텔 저층 투숙객들이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곧 119의 요란한 축가와 함께 제이는 옥상에서 화형을 당할 것이다. 갑자기 스피커로 미니미를 조종하는 일자 눈썹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상에 제이 외에 엄마와 아이, 남자 한 명이 추가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노신사는 화면 확인 후, 잠시 머뭇거렸다. 캠핑카에 난감한 침묵이 흘렀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고 장복산 일자 눈썹이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작전을 취소하자고 말하고만 싶었다. 모니터에서 물장구치듯 휘발유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옥상을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니 옛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함박웃음을 짓고 뛰어다니고 있었고, 울상인 엄마도 고함을 치며 아이를 쫓아 옥상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승의 마지막 나 잡아 봐라 놀이가 될 것 같았다. 아이를 잡으려던 엄마가 미끄러운 바닥에 고꾸라지며 머리채 휘발유를 뒤집어썼다.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옥상에서 두 남자가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제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맞은 편 남자가 말했다. “존 김은 왜 죽였어?” 

  “....” 

  “왜 죽였냐고?” 

  “내가 죽게 생겼는데 다른 이유가 필요하나? 지금 그게 중요해?  이 엄청난 상황을 보고도 그런 시시한 질문을 하는 거야? 우린 곧 불구덩이 속에서 활활 타 죽는다고.” 제이가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드론을 올려다보며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옥상은 곧 불바다가 될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드론이 떠 있는 곳 바로 아래로 한 걸음씩 나아갔고, 제이가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한 걸음씩 뒷걸음쳤다. 그러자 장복산 일자 눈썹에게 드론의 위치이동 여부를 묻는 연락이 왔고, 노신사는 정 위치를 지시했다. 드론이 잘못 움직였다가는 건물 밑의 경찰에게 발각되면 미니미 작전은 수포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일산에선 왜 그랬어?” 남자의 비장한 목소리가 태우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렸다. 

  “세상에. 그걸 아직도 기억하는 거야? 넌 떡잎이 딱 보이더라고. 시키는 대로 운동화도 잘 숨겨 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했구나. 그걸 아직 맘에 담고 있었다면 그만 잊어버려. 좋아. 불타 죽을 마당에 한마디 해 주마. 고백이라고 해두지. 자폐라는 불량품은 원래 회복이 안 되거든. 진짜 어렵다고. 근데 그놈은 회복이 됐어. 절대 안 될 줄 알고 내가 좀 가지고 놀아 줬단 말이야. 그래서 어째. 슬슬 걱정이 되더라고. 애들은 럭비공 같아 어디로 튈지 모르잖아. 어르고 달래도 너무 정직하단 말이지. 그래서 애초에 싹을 자르자고 결심했지. 그놈은 기억상실증만 안 됐어도 엄마 곁으로 보냈을 거야.” 이글거리는 눈으로 제이가 말했다. “그리고 너 말이야, 똑같은 운명을 맞을 뻔했지. 참 행운아야.” 

  “.....”

  낯선 남자가 드론을 올려다보자 송출되는 화면에 그 남자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태우였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멈춰 주세요! 제 아들이 있습니다!” 

  캠핑카 밖으로 뛰쳐나가려는데 옆에 앉은 남자에게 거세게 제지당했다. 노신사를 향해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안 돼요! 살려주세요!” 나는 울부짖었다. 

  “정위치, 파이어!” 

  오 이런 세상에.... 그의 말이 끝나자, 하늘에서 붉게 타오르는 민들레 홀씨 하나가 살랑거리며 태우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제이가 옥상 출입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엄마는 아이의 뒤를 빙글빙글 쫓아가고  있었다. 불꽃이 태우에게 가까워져 갔다. 태우가 울고 있었다. 그리곤 갑자기 공중으로 힘껏 뛰어오르더니 성냥불 켜지듯 몸이 불타오르며 건물 아래로 사라졌다. 엄마.... 외침이 크게 메아리쳤다.  

  노신사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철수!” 

  나는 차 안에서 발악하다 잡고 있던 남자의 팔을 뿌리치고 겨우 뛰쳐나갔다. 벚꽃 잎이 흩날리던 오후, 아이를 베란다에서 밀어 버렸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 들것에 실려 구급차 뒷문으로 들어가는 검게 그을린 태우가 보였다. 붉은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제지했고 나는 엄마라고 소리치며 있는 힘을 다해 구급차에 올라탔다. 호흡기를 붙이고 의사와 간호사가 다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깨지고 검게 타버린 아이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쏟아져 내리는 붉은 피에 가슴이 갈기갈기 뜯어진 것처럼 아파졌다. 태우는 어린아이도 아니었고, 자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생긴 내 아들을.... 병원에 도착하기 전, 태우는 불꽃을 안고 스러졌다. 불사신이 되었다. 


  작전이 개시되는 날, 태우는 모텔 4층에 있었다. 엄마인 나도 모르게 레몬이 비밀리에 태우를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베란다 창을 열었다. 바가지 안에 가득 담긴 칫솔들, 먼지가 내려앉은 바람 빠진 자전거, 장난감 자동차와 블록들, 한글놀이 판과 퍼즐들이 보였다. 가슴 한편에 뚫려버린 구멍으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아들이 스러진 4월의 도시로 돌아왔다. 거실의 움푹 꺼진 소파에 앉았다. 태우가 왜 그랬는지는 옥상에 있었던 모자의 인터뷰를 통해 밝혀졌다. 아이는 서울에 사는 중증자폐아였다. 아이 엄마는 일산의 자폐 학원에 다녔던 지인으로부터 윤 선생님 소문을 듣게 되었고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사건 전날 밤 진해로 내려왔던 것이었다. 밤늦게 도착했던 탓에 숙소를 잡기 위해 서성이던 모자가 운명의 장난처럼 길을 지나던 태우에게 길을 물었고,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던 태우가 그날 자신이 묵을 예정이던 게스트 모텔로 그들을 안내하게 되었다. 새벽에 벌어질 일을 걱정하던 태우는 그 모자가 비상계단에 가까운 2층 방을 배정받도록 유도했고, 그들이 201호에 배정받은 것을 확인한 후 4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날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아이는 늦게까지 온 방 안을 뛰어다녔고, 클레임을 받은 카운트에서 두 모자를 비어 있던 6층으로 이동시키게 되었다. 새벽 작전이 개시된 후, 태우는 아래층으로 빠져나오다 201호에 들르게 되는데 그제야 모자가 6층으로 이동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태우는 옥상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었다. 


  사만다 사건은 다시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제3의 배후가 있을 것이란 제이의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지만, 경찰들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제이가 병원에서 녹화한 영상을 경찰에 공개했더라면 수사속도는 빨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레몬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제이도 아이의 엄마도 모텔 옥상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맞춘 듯 입을 다물었다. 옥상에 가득한 휘발유와 하늘에서 민들레 불꽃을 내렸던 드론 얘기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태우가 불사신이 되어 옥상에서 뛰어내렸던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레인보우센터에서 그 아이를 특별히 치료해 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레몬도 제이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약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제이는 살아남았다. 


  계절은 다시 흘러 4월의 도시는 축제를 앞두고 들떠있다. J 베이커리 2층 테라스에서 벚꽃 잎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도시를 바라보며 가만히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아들의 작고 하얀 손의 온기를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다면.... 저 멀리 부드러운 봄바람을 타고 태우가 좋아하던 노래가 들려온다. 서영은의 Blue Moon.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정민이 어느새 다가와 씩씩하게 인사했다. N 마크가 새겨진 파란색 신발이 보인다. 

  “정민아, 신발이 바뀐 것 같네.” 

  “이거요. 이제부터 분위기 좀 바꿔 보려고요.” 정민이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버님은 좀 어때?” 

  “많이 좋아지셨어요. 요즘은 주문 외우는 법도 잊어버리신 것 같아요. 집에만 계시지 않고 친구들이랑 가끔 탁구도 치시고.” 정민이 환하게 웃었다. 그의 친구인 듯 보이는 J 베이커리 사장이 테이블로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인심 좋게 먹을 것이 가득 담긴 접시를 두고 간다. 

  “생각은 해봤니?” 

  “제안은 감사하지만 전 영화관 체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민이 태우가 내정되었던 영화관 자리를 또 거절했다. 

  “그럼 다시 학교로 돌아갈 거야?” 

  “네. 일단은요. 저 사실 꿈이 생겼습니다.” 

  “꿈?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거니?”

  “네. 아버지랑 얘기 많이 해 봤는데 요즘에 마음 아픈 아이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어서요. 정답도 없는 어려운 분야지만, 제가 자폐를 극복해 낸 산 증인이잖아요. 태우도 그랬고. 제시도 그랬고. 그냥 제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 맛있게 빵을 먹기 시작한 정민을 보니 태우가 눈앞에 아른거려 또 정신 줄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옆자리에서 짙은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귀 밑머리를 만지고 있다. 테이블 끝에 놓인  핸드폰 은색 고리가 달랑거린다. 자유의 여신상이다.    

  화사한 벚꽃, 눈부신 햇살, 살랑거리는 바람. 이렇게 아름다운 4월의 도시에서 내 마음은 레몬 향 영화관의 비밀을 꼭 껴안은 채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멍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축제 전야의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쾅! 쾅! 쾅! 군인들이 쏘아 올린 형형색색의 축포가 하늘을 수놓고 있다. 보고 싶어 .... 너무 보고 싶어.... 맥주 두 캔을 홀짝거린 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늦은 아침. 커피 한 잔을 내려 푹 꺼진 소파에 앉으며 텔레비전을 켰다. 지역 뉴스에서 사건 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피해자가 없는 희한한 사건이었다. 장복산 게스트 모텔 펜트하우스에서 베개와 이불을 뚫고 간 총알 세 발이 발견되었다. CCTV에 용의자의 모습이 잡혔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파마머리에 검정 모자, 하얀 마스크의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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