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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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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5일~5월 26일, 후쿠오카, 최유진 

 

  인간이 과연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까. 설령 목숨을 담보한 것이라도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나는 수다쟁이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몬의 세계에선 그것은 일상이었다. 이제 내가 그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버스 창가에 가로누운 빗방울들 사이로 뾰족하게 솟은 후쿠오카 타워가 아른거린다. 지나간 시간들이, 공간들이, 이야기들이, 소리들이, 냄새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노란 꽃무늬 비옷, 초록색 장화, 하얀 우산을 쓴 아이가 작은 보폭을 옮겨가며 거리를 지난다. 존 김의 따뜻한 미소가, 딸의 연주회를 앞두고 떨리던 희고 긴 손이 떠올랐다. 

  짙은 일자 눈썹의 남자가 다가와 대각선 방향에 앉았다. 그리고 세 정거장 뒤 내렸고, 나도 뒤따라 내렸다. 나는 살짝 앞으로 기울인 우산 밑으로 그의 발이 보일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는 잠시 대로변을 따라 걷다 우측 1차선 도로를 따라 꺽은 다음, 직진으로 한참을 걸어갔다. 얼마를 그렇게 갔을까. 갑자기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도로를 벗어나자 작은 텃밭이 이어진 공터가 나왔고, 그 사이로 덩그러니 빛바랜 갈색 건물이 나타났다. 사무실이나 상가 같은 네모반듯한 외관이었지만 내부로 들어서자 묘한 느낌의 가정집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큰 중정이 있었는데 사면 모두 통창으로 둘려 있어 밝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조금 열린 중정의 문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쏴 하고 빗소리가 들렸다. 집안 곳곳에는 CCTV와 맹인들을 위한 플라스틱 점자판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인기척이 있는 거실 구석 쪽에는 초등학생 정도 몸집의 하얀 색 로봇이 파란 눈을 굴리며 서 있었다.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거실 벽면 뒤쪽으로 가려져 있었고, 한 사람이 양쪽 벽을 짚고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그를 따라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옆 욕실을 지나쳐 방 앞에 섰다. 그가 문을 열었다. 방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온통 하얀 빛이었다. 하얀 커튼, 하얀 벽에 하얀 침대. 그리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한 여인이 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창가에 서 있었다. 공포감이 몰려왔다. 그녀가 돌아섰다. 그녀의 손은 가슴에서 허공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무대에서 과장된 몸짓으로 연극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와 함께 그녀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아악 하고 그만 고함을 지를 뻔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눈이 없었고, 머리카락 사이로 귀가 있어야 할 곳이 휑하게 비어 보였다. 누가 봐도 신경 쓰지 않은 듯 수시로 하품을 해대는 입속으로는 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탈색한 것처럼 하얀색이었다. 비참하다는 말도, 잔인하다는 말도 모자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사라진 레인보우 원장이자 제이의 친누나인 사만다 김이었다.    

  사사키는 오래전 켄 사장의 친구인 존 김의 요청으로 제이를 추적했고, 그가 한국으로 입국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서울로 날아가 강남대로변 한 오피스텔에서 그의 신병을 확보하고 그를 죽이려던 순간, 그녀가 여장 남자인지 확인하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진짜 여자였다. 사사키는 자신을 본 그녀를 죽이려 했지만 존 김이 제시한 세 배의 사례금 때문에 죽이지 못했다. 그렇게 사만다는 부산에서 요트에 실려 후쿠오카로 옮겨오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곳에 감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언제 왔는지 뒷목에 별 모양 타투가 보이는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사만다의 긴 여행에 필요한 짐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짙은 일자 눈썹이 캐리어 하나를 들고 먼저 내려갔고 나도 그를 따라 내려왔다. 검정 벤에 올라타자 잠시 후, 타투 여자가 큰 가방 하나를 둘러맨 채 사만다의 손을 잡고 차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하얀 옷을 벗고 캐주얼 복장에 고글 선글라스를 쓴 사만다는 처음 본 이미지와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선착장으로 이동했고 사전에 입을 맞춘 듯, 해상경비대든 경찰이든 어떤 기관의 제지도 받지 않고 후쿠오카를 조용히 떠났다. 요트 맨 안쪽에는 두 명이 넉넉히 누울 수 있는 침실이 있었고, 그 앞으로 일자형 소파가 긴 테이블 사이로 마주 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계단 옆에는 화장실 겸 샤워 시설도 있었다. 요트는 쾌속선처럼 크지도 빠르지도 않았지만 생각보다 넓고 안락했다. 사만다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의 텅 빈 눈이 바람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내게 믿음이 가는지 연신 내 왼 팔목을 꼭 붙잡고는 손바닥에 글씨를 써댔다. 여기 어디에요? 살려 주세요. 사만다 김. 미국. 그녀는 내 손바닥이 찢어져라 세게 눌러댔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듯 보였다. 누나로서 동생의 죗값을 이렇게 치러야만 하는 운명일까. 그녀의 가냘픈 목과 어깨 사이로 백발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요트가 부산에 도착했고, 우리는 선착장에 대기하던 검정 벤츠 캠핑카로 바꿔 타고 곧바로 진해로 향했다. 말 한마디 없던 짙은 일자 눈썹의 남자가 검정 서류 가방에서 종이 두 장과 USB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일본어였다. 

  “사사키의 자필 진술과 음성 녹취파일입니다.” 

  나는 서류를 받아들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저는 제이 김의 의뢰를 받고 그의 누나인 사만다 김을 납치하여 일본에서 감금하였습니다.’ 의뢰인이 존 김에서 제이 김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남동생이 누나를 납치 감금할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그에게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누나인 사만다가 납치된 이후 오래도록 실종 신고도 하지 않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누나 행세를 하며 레인보우 원장으로 살아왔습니다. 이런 행동은 미국에서부터 계속되어 오던 것입니다. 외모가 누나와 판박이처럼 닮았지만 잘난 누나와 달리 공부도 못하고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던 왕따였죠.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아동 성도착증까지 있었으니 여자로 사는 인생이 꽤 매력적이었을 겁니다. 제이는 완전히 질투를 넘어 누나 행세까지 하며 누나의 인생을 사는 환영에 빠져 버렸던 겁니다. 여장을 이용해 아동 성폭력까지 저지르고. 누나가 없다면 자신이 누나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착각했기에 누나를 납치 감금했다는 사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왜 제이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뜬금없이 진해에서 누나의 실종 신고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자신의 악행을 눈치 챈 존 김, 윤성진과 그의 아들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일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제이가 가만히 있을까요? 사사키도 진술을 뒤집을 수 있지 않습니까? 사사키 가족도 제이가 납치해 협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자 눈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사사키는 자살 당할 테니까. 이것이 그의 마지막 유서입니다.” 

  “뭐라고요? 지금 우리는 어디 가는 가죠?” 

  “제이 만나러 갑니다.”

  옆에 앉은 사만다는 여전히 내 팔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 캠핑카에 타고 있는 내내 괴리감에 정신이 분열되는 느낌까지 들었다. 태우를 낳고 나서부터일까. 태우의 아빠를 만나고 나서부터일까. 일본으로 떠나고 나서부터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왜 나는 지금 이런 차 안에서 눈과 귀, 혀가 없는 불쌍한 여자에게 손목이 붙들려, 앞으로 일어날 한 남자의 자살 예언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가.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것일까. 내 소망은 그저 동네의 평범한 아줌마처럼 사는 것인데, 누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일까.... 진해로 접어들자 캠핑카는 조선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한참 올라가서 거대한 진녹색 컨테이너 트럭 앞에 멈췄다. 잠시 후, 컨테이너 뒤쪽에서 문이 천천히 열리고 낯익은 남자 한 명과 몸집이 드럼통처럼 둥그런 남자 두 명이 내리더니 캠핑카로 옮겨 탔다. 낯익은 남자는 사사키였다. 캠핑카는 다시 출발했고 시내를 통과해 어둑한 산길로 한참을 올라갔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인적조차 없는 산속은 적막 그 자체였다. 들어갈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공간들이 검푸른 빛의 환영으로 보였다. 잠시 후, 망원경이 몇 개 붙어 있는 나무 바닥의 전망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캠핑카는 바로 옆 공터에 멈췄다. 차창 밖으로 수놓듯 펼쳐진 시내의 불빛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터 구석 경사로에는 쟁반처럼 납작하고 널따란 바위 2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고, 옆으로는 추락 주의라는 경고 팻말이 붙어 있었다. 아래는 아찔할 정도의 절벽이었지만 펜스 같은 것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타투녀가 슬며시 사만다 쪽으로 몸을 굽히더니 그녀의 운동화 뒤편을 만지작거렸다. 어두운 밤이라 사만다의 검정 선글라스 속 빈자리 음영이 더욱 더 무섭게 느껴졌다. 잠시 후, 사사키가 사만다 김을 부축하며 캠핑카 밖으로 나갔다. 쟁반 바위 위에 사사키와 사만다가 손을 잡고 서서 우두커니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연이 있는 오누이처럼 서글퍼 보였다. 그때, 기다렸단 듯 적막을 뚫고 굉음을 내며 자동차 한 대가 캠핑카 맞은편에 멈춰 섰다. 디스커버리였다. 강렬한 상향등 불빛에 눈이 부셔 앞을 보기 힘들었다. 운전석에서 누군가가 급하게 내리더니 쾅 하고 차 문을 던지듯 닫고 쟁반 바위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창밖으로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디스커버리에서 내린 선글라스의 남자가 그들에게 가까워졌다. 아무 말이 없다. 

  “제이 김?” 사사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캠핑카 스피커에 울렸다. 남자는 사사키의 질문을 무시한 채, 다짜고짜 옆에 있던 사만다 김을 힘껏 끌어안았다. 남자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뻣뻣하게 굳어 있는 사만다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남자가 포옹을 풀고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분명 선글라스 사이로 움푹 파인 음영이나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이상한 모양의 귀를 봤기 때문이리라. 충격을 받은 것처럼 뒷걸음치는 그의 손목을 그녀가 붙들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힘차게 뿌리쳤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선글라스 남자가 갑자기 옆에 서 있는 사사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고, 사사키는 한 발씩 뒤로 물러섰다. 차창 밖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도 긴장되고 입이 바짝 말랐다. 아무 말도 없는 흑백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검정 옷 남자 두 명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나타나 순식간에 선글라스 남자 뒤쪽으로 다가가더니 검정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절벽 아래로 밀어 버렸다. 그리고는 한 명이 사만다 김의 팔을 당겨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켰고, 나머지 한 명은 사사키와 함께 차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순간, 캠핑카 맞은편에 서 있던 디스커버리가 후진 후 방향을 틀어 그들을 향해 상향등을 비췄다.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팔을 들어 불빛을 막았다. 디스커버리는 급출발하며 그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했다. 캠핑카도 거의 동시에 디스커버리 쪽으로 차를 돌진시켰다. 굉음만으로도 순간 가속도를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디스커버리 후면 범퍼가 눈앞에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두 손으로 창 위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쥔 채 눈을 감았다. 급브레이크.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창에 어깨를 부딪쳤다. 갑자기 디스커버리가 크게 선회하며 공터 아래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캠핑카는 더 추격하지 않았다. 급히 차에 올라탄 사사키는 찢어진 눈매가 무색하게 겁먹은 강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내 손목을 꼭 잡은 사만다의 손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캠핑카가 다시 어둡고 좁은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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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7일~5월 28일, 진해, 윤정민 

 

  어둠 속에서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적막을 흔들고 있었다. 아직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아들의 치료를 위해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 그 아들이 극한 위험에 처한 지금 이 순간에는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설마 하던 일이 결국 내일이면 일어날 것인데. 그토록 아끼던 자기 아들이 억울하게 감옥에 갈지 모르는 상황 아닌가. 엄청난 누명을 쓴 채. 이런 사건이라면 언론의 관심도 받을 것이고, 제대로 유명세를 탈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을 못 한단 말인가. 거실에서 아버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슬며시 방문이 열렸다. 

  “민아, 자냐?” 

  자는 척하려 했지만 그도 내가 잠들지 못 하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가 방으로 들어와 책상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밝으면 진 형사한테 그간의 일을 사실대로 밝힐 생각이다. 너는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게 더 걱정이다. 학부모들한테도 미안하고.” 

  “아버지,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 뭐....” 

  내 방에서 시작된 아버지의 고백은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지난날의 오랜 이야기들을 듣고서야 그가 왜 그렇게 진실을 숨기려 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엄마가 살아 있을 때부터  김은정 선생과 오래도록 연인 관계를 맺어왔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애인을 죽였으며, 그 죗값은 태우 아버지가 뒤집어쓰게 했다. 그러고 보면 제이 김이나 아버지나 나쁘긴 매한가지였다. 아동에게 성적 유희를 느끼는 인간과 부모나 선생에게 성적 유희를 느끼는 인간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과연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엄마와 내가 도로에서 쓰러지던 때, 그는 왜 아이들을 공원에 방치하고 돌아오지 않았나, 그가 김은정 선생과 그 짓거리를 하러 가지만 않았어도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일은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그것도 살인죄를.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 제이의 악행을 끝까지 묵인하고 방관한 행위는 어떤가. 그 값비싼 침묵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가 성폭행에 노출되었나. 아버지는 설명이 안 되는 겁쟁이었다.  


  이미 아침 7시였다. 뜨거운 물로 꼼꼼히 샤워하고 나오니, 아버지가 토스트와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계란 프라이가 들어간 바삭한 토스트에 꿀을 발라 한 입 베어 물고 커피를 마셨다. 한숨도 못 잤지만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돌았다. 한 입 더 먹으려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갑자기 외할머니 가게에서 먹었던 바삭한 파전이 떠올랐다. 오후 햇살이 가득한 가게에서 할머니가 손으로 뜯어 주시던 파전의 바삭함이 입안에 느껴졌다. 엄마가 옆에서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 가게 가득 비추던 눈부신 햇살 속에서 중얼거리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정민이가 말만 할 수 있으면 진짜 소원이 없겠다. 말만 할 수 있으면....’ 

  커피를 마신 후 외출 준비를 끝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진 형사였다. 급한 일이니 집으로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형사 여러 명이 들이닥쳐 집이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는 상상을 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헝클어진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가 작은 철제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상자 속에는 은행 통장 2개와 카드 2개. 우편물과 서류 뭉치들이 들어 있었다. 

  “민아, 혹시 모르니까 이것은 이제부터 네가 보관해라. 은행 잔고야 얼마 안 되지만, 주식은 좀 될 거다.” 

  그가 서류 뭉치 중 한 장을 내밀었다. D 증권사에서 발행된 주식 잔고증명서였다. 종이 맨 위에는 파란색 펜으로 계좌 아이디, 비밀번호, 계좌번호 등 인터넷 프로그램에 접속하는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잔고증명서의 보유 종목은 LG생활건강 한 회사였다. 잔고가 10억 원이 넘어 손으로 눈을 몇 번이나 비비며 다시 봐야 했다.

  “아버지, 저는 이렇게 큰돈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 건데 저한테 그냥 주셔도 되는지도 모르겠고요.” 

  “민아, 이거 내가 10년 전쯤, 여윳돈 조금 있던 거로 사서 바로 네 명의로 바꿨고 증여세도 냈다. 너한테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사실 진 형사 동생 사고는 말이야.... 태우의 고의가 맞다. 그것 때문에 진 형사가 나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거라 충분히 이해도 되고. 인지상정이지. 태우의 행동을 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난 그 아이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어. 아무튼 그건은 제이 사건과 연관이 안 되어 있으니 끝까지 비밀로 했으면 좋겠다. 태우에게도 상처가 될 테니 가급적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진 형사 동생이 담벼락에서 떨어져 죽은 뒤 태우 참고인으로 법원을 오가다 진 형사 엄마를 몇 번 만났는데 화장품 판매하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음이 아파 화장품을 많이 사줬지. 물론 다른 사람을 시켜 샀긴 했지만....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제이가 학원에 있는 화장품 상자를 물끄러미 보더니 자신은 여자보다 화장품을 더 많이 쓴다고 그러더라. 맨날 여장하고 다니니 당연했겠지. 그래서 그 화장품을 한번 줘 봤어. 그랬더니 좋은 제품이라고 칭찬을 해서 우리 집 올 때마다 사 뒀던 화장품을 죄다 줬더랬지. 제이가 그러더라. 자기는 랑콤이랑 시세이도 마니아였는데 LG로 바꿔야 하겠다고. 레인보우센터 여선생들도 너무 좋아한다고. 그때, 언뜻 주식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회사가 계속 번창하고 주식도 오르더구나. 운이 좋았던 게지.” 

  통장은 굳이 펼쳐보지 않았다. 상자를 받아들고 일어서는데 밖에서 진 형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시작일까. 예상과 달리 진 형사는 혼자 찾아왔고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범인을 낚아채려는 긴장감은 사라지고 깨진 앞니를 보이며 비굴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그는 소파에 앉았고, 나는 커피를 준비해 왔다. 

  “아침 일찍부터.... 이거 참. 잘 마시겠습니다.”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 공손하게 말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 아버님 일본어 잘하시죠?” 

  아버지는 뜬금없는 질문에 놀라고 있었다. 

  “그게.... 이것 좀 보세요.” 그는 카키색 항공 점퍼 안주머니에서 종이 두 장을 아버지에게 건네며 말했다. 누군가가 일본어로 쓴 편지 같은 거였다. 

  “그게 말이죠.... 참 희한해요. 어제 조선소 근처에서 남자 한 명이 익사체로 발견되었어요. 근처에 주차된 차에서 여권, 현금, 담배 그리고 자필 유서와 USB랑 이게 발견되었어요. 여권 조회를 해 보니 이름은 사사키 고이치로. 나이는 47세. 후쿠오카 출신. 출입국 기록을 보면 후쿠오카에서 서울과 부산을 많이 다녔고. 일본에서는 영화관 시설관리자로 일했어요. 안전관리 자격증도 많고 아무튼 그런 계통의 전문가였어요. 전과도 없었던 거로 나왔고.” 

  “갑자기 그 사람 얘기를 왜 하시죠?” 아버지가 물었다. 

  “그거 한 번 읽어보면 아실 겁니다. 죄송한데 한국어로 번역해서 읽어 주시죠.” 

  아버지는 진 형사가 내민 종이를 번역하며 읽기 시작했다.

  제가 직접 음성 녹취파일과 글을 남기는 이유는 제이의 협박으로부터 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일본에 사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한국을 오가다 서울 이태원의 한 바에서 우연히 제이 김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내게 한 가지 위험한 제안을 했었는데, 나는 그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돈과 욕정에 사람을 납치하고 감금하는 엄청난 일을 해버린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후쿠오카에 한 여자를 감금했습니다. 그가 왜 친누이에게 그러는지 의아했지만, 그를 바에서 만난 날, 똑같이 생긴 누이 사진을 보고 어렴풋하게 짐작을 했습니다. 쌍둥이 남매간의 복잡한 애증이겠지요. 

  제이 김은 제가 그의 누이를 납치한 이후, 실종 신고도 하지 않은 채 줄곧 누나 행세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장복산에서 누나가 사라졌다는 거짓 실종 사건을 만들어 내고 본인은 다시 남동생 제이로 돌아갔습니다. 이유는 존 김이라는 재미 교포 때문입니다. 제이는 미국에서 존 김의 딸 제시를 성폭행했고, 존 김은 그를 뒤쫓고 있었습니다. 위협을 느낀 제이는 가짜 실종 신고로 존 김의 추적을 따돌렸으며 이후 제게 존 김의 살인까지 사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존 김을 죽일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국여행 중이던 제 노모와 가족들을 납치하여 그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제이의 친누이 사만다 김은 현재 일본에서 진해로 건너와 저와 머무르고 있습니다. 장복산 실종 사건은 제이가 꾸며낸 가짜이며, 진짜 사만다 김이 이 모든 사실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사사키 고이치로


  아버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게 사실이라면 말이죠. 왜 윤 선생님 발목을 잡으려고 했을까요? 감이 안 잡힙니까?” 

  “그게....” 

  이제는 아버지가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아버지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더 이상....” 

  “글쎄, 일본에서도 수사를 시작했으니까 시간이 더 필요하겠죠. 그래도 실종 사건이 가짜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모두 멍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차하고 있었다. 엉터리 형사에게 실컷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일단 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정민 씨, 그럼 그 운동화는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엄마 봉안 묘 안에 넣어두고, 장복산에서 분실했다고 거짓 증언을 해서 이 사달을 냈었어요? 이유나 좀 들어봅시다.”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형사님, 봉안 묘에 있던 운동화는 민이가 분실한 운동화가 아닙니다.” 

  “뭐요?” 한풀 꺾였던 진 형사가 눈알이 튀어나올 듯 아버지를 노려봤다. 또 엉터리 거짓말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현관에서 운동화 한 짝을 들고 와 끈의 첫 줄을 뒤집었다. 999였다. 

  “이게 장복산에서 분실한 나머지 한 짝입니다.”

  “그럼 저한테 제출한 한 짝과 봉안 묘에 있던 한 짝은 번호가 666으로 일치하던데 그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형사님 아시다시피, 제가 정신병이 있고 자주 깜빡깜빡합니다. 이것 보세요. 여기서 끈을 뒤집으면 999로 보이는데.” 그가 신발 방향을 돌렸다. “여기서 보면 666으로 보이죠.” 

  숨이 탁 막히는 것을 겨우 참았다. 

  “형사님께 운동화 번호를 잘 못 보고 제출한 겁니다.” 

  진 형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놔.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럼 봉안 묘에는 왜 666 한 짝을 넣어 뒀습니까?” 

  “제 아들이 운동화 한 짝 때문에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 같아 죽은 아내에게 이 사건도 당신이 해결해 달라고 비는 마음에 넣어 뒀습니다. 작은 운동화와 함께 넣어 두면 이 사건의 오해도 풀릴 것 같았습니다.” 

  진 형사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거짓말은 이상하게 태연했다. 

  “형사님, 만약 사사키라는 일본 사람의 증언대로 제이가 장복산 실종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라면, 제 아들의 신발도 그가 처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 말은 나중에 확실히 증명될 겁니다.” 아버지의 눈빛은 빛났고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음.... 일단 알겠습니다. 그건 좀 더 지켜봅시다.” 그가 못 미더운 표정으로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제이가 여장으로 누나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의 귀가 붉어졌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 모든 것을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밝혀서는 안 된다. 

  “여장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누이가 닮았다면 누나 행세도 가능할 것 같고.” 

  “그렇습니까? 어떻게 남동생이 누나 행세를 하는데 사람들이 몰라볼까요? 전 그게 더 의심됩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말이죠. 변장이야 그렇다 쳐도, 이것저것 쳐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제가 제이를 몇 번이나 만나고 조사했잖아요? 그가 사만다로 변장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친누나를 감금하는 것도 그렇고. 이야기가 영 이상하니 냄새가 나는데, 어찌해 볼 도리도 없을 것 같고.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게 제 능력 밖이네요. 아무튼 일본 쪽에서 연락이 오면, 바로 제이  잡으러 가야죠.” 

  “네....” 아버지와 나는 입을 맞춘 듯 동시에 말했다. 

  “아침부터 경찰서 오려고 단단히 준비하신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죄송하단 말씀 드리고요.... 일단 집에서 대기하고 계시죠.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는 미안한 것처럼 구부정하게 인사를 한 후 현관 앞에 놓인  999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이건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아버지는 현관에 걸려있는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신발을 담아 건넸고, 그는 봉투를 받아들자 황급히 나갔다. 나는 현관에 서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언제 999 한 짝을 없애셨어요? 666과 999가 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이제야 알았어요. 그 생각 하느라 밤잠도 못 주무셨겠네요?” 

  “내 나이에 666과 999를 착각했다고 하면 별문제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 봉안 묘에는 원래부터 사고 당시 운동화가 들어 있었으니, 다른 운동화 한 짝도 넣고 사건에 휘말리지 않게 도와달라고 빌었다는 말도 이상한 건 아니지. 이제는 오히려 누군가가 진 형사를 이곳으로 유인해 민이를 의심하게 만든 그 의도가 밝혀진 셈이야. 공은 완전히 넘어갔어. 설령 999 한 짝을 그놈이 가지고 있더라도 이젠 그걸로 널 엮기 쉽지 않을 거다.” 

  “그렇긴 한데 이번에 진 형사가 꼬리를 내린 건 사사키라는 일본 사람의 유서 때문 아닐까요? 어리둥절하지만.” 

  “그건 나도 모르겠다. 만약 사사키의 자필 유서가 맞고 실종되었다는 사만다가 나타나 유서와 동일하게 경찰에 증언해 준다면 제이 는 빠져나올 수 없겠지.” 

  “그렇겠죠. 그런데 제이가 잡히면 아버지 약점을 물고 늘어지지 않을까요? 걱정 안 되세요?” 

  “그건 각오하고 있다. 그것보다 일이 훨씬 더 커져서 문제지만.”    아버지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소파에 누웠고, 나도 거실 바닥 한가운데 대자로 누웠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순식간에 조용하다 싶던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장된 아침이 지나갔다.

  늦은 오후, J 베이커리에 갔다. 주일은 소식통답게 내게 일본인 익사 사건과 함께 장복산에서 일어난 투신 사건도 알려줬다. 안민고개에서 30대 남자가 추락해 사망한 사건으로 등산객이 발견해 신고했다는 것이다. 남자는 진해 출신으로 LPG 충전소에서 일했다고 한다. 경찰은 그가 미혼에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66  


2019년 5월 29일, 진해, 최유진 

 

  나는 사만다와 동거하고 있었다. 감시도 하고 수발도 들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그녀는 이렇게 혹독한 운명에도 미치지 않은 것일까. 누군가 난데없이 자신의 눈을 뽑고, 귀를 자르고, 혀를 못 쓰게 만든다면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더구나 그 짓을 자기 동생이 사주했다고 끊임없이 세뇌한다면. 그럼에도 차분한 그녀의 느낌에 내가 공포를 느낄 지경이었다. 2층 방 창으로 잔잔한 바다가 보이고 파도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내 손을 슬며시 끌어, 또 손바닥 글씨를 써 댄다. 언제나 초등학생처럼 이름을 또박또박 눌러 쓰는데 하얗고 기다란 손이 참 곱다. 검지는 지문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굳은살이 박혀 있다. 

  3단 옷장에는 다양한 여벌의 옷과 내의가 있고, 여성용품들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그래도 후쿠오카처럼 공간 곳곳에, 물건마다 점자가 붙어 있지는 않아 그녀가 움직이면 나도 움직여야 했다. 휴대폰도 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갑갑해졌다. 그녀는 자주 등쪽으로 손을 가져가며 몸을 비틀어 댔다. 물건을 준비해 둔 사람이 아무리 꼼꼼하다 해도 등갈퀴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등을 가리키며 몸을 비비 꼴 때마다 긁어 주는 일도 반복되니 귀찮아졌다. 

  화장대 위에 놓인 가위와 빗, 드라이기를 보니 손이 근질근질했다. 가위 상태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녀의 손바닥에 헤어커트라고 글자를 적어봤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화장대 앞 의자에 앉혀 긴 목욕 수건을 두르고 집게로 고정한 다음 커트를 시작했다. 염색을 안 해서인지 머릿결은 푸석하지 않았다. 자주 다듬은 태는 났지만 조금 엉성했다. 귀의 상처는 보이지 않게 옆머리로 덮고, 윗머리는 드라이를 해서 부풀렸다.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이마로 내려오게 했고, 전체적으로 숱을 쳐서 가볍게 만들었다. 기장은 어깨선까지, 끝은 컬을 넣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소 띤 그녀를 보니 나도 마음이 좋았다. 드라이 바람으로 머리칼을 털어 내고, 작은 청소기로 머리칼을 정리했다. 옷장에서 허리 라인에 빨간 띠가 들어간 검정 원피스를 꺼내 그녀에게 입혔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옷을 펄럭이며 빙글빙글 돌았다. 작은 리본이 달린 갈색 숄더백을 어깨에 메어주고, 루비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진주 귀걸이는 귀볼 때문에 포기했다. 고글 선글라스는 내 것처럼 테가 크고 둥근 모양에 알의 색깔도 더 진한 거로 바꿨다. 굽이 있는 빨간 에나멜 구두를 고민하다 꽃무늬 단화를 신겼다. 한껏 꾸몄으니 방에만 있을 순 없었다. 집 안 곳곳은 CCTV로 감시당하고 있었고, 외출은 금지였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집 앞이 해변인데 바람만 쐬고 오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이 마음의 문을 계속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누군가 들었던 것일까. 밖에서 진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며시 숨을 죽였다.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통보받았다. 인기척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쿵쿵거리는 소리가 더 거세졌다. 전기공사라는 말이 들려왔다. 밖의 소란에도 사만다 김은 보이지도 않는 거울 앞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세를 고쳐 잡고 있었다. 잠시 후 갑자기 집안의 전기가 모두 나가버렸다. CCTV도 자가 동력이 아닌지 꺼졌다. 하늘이 도운 것인가. 다른 생각은 접어두고 잠깐 외출할 명분이 생긴 것 같아 그저 기분이 좋았다. 나는 슬그머니 사만다의 손을 잡고 1층으로 내려와 현관문을 열었다. 주변은 곳곳에 친환경 목조주택 단지들이 새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신나게 흔들어 대며 무작정 걸었다. 그녀도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도로변에 있는 라이브 카페로 무작정 들어갔다. 가게 앞으로 넓게 펼쳐진 나무 데크에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홀로 책을 읽는 사람이 있었고 자리마다 촛불이 켜져 있었다. 우리는 창가 쪽 높은 칸막이가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머뭇거리면 이상할 것 같아 메뉴판에서 눈에 띄는 것을 대충 주문했다. 

  백발 사만다라도 세련되게 꾸미고 나와서 그런지, 뒤이어 들어온 남자 두 명의 힐끔거리는 눈길이 느껴졌다. 찢어진 눈의 장발과 두꺼운 입술의 파마머리였다. 장발과 파마머리 모두 평범한 샐러리맨 스타일은 아니었다. 사만다의 선글라스를 확 벗겨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얼마 후 쟁반을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던 종업원이 그 남자들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보였다. 수작을 부리려는 게 분명했다. 장발이 종업원의 귀에 대고 숙덕이더니 호주머니에 돈 같은 것을 찔러 넣었다. 파마머리가 쟁반 위의 음식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런 망할 놈들. 종업원이 우리 테이블로 돌아와 음식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기서 계산하신다는데, 합석 괜찮으십니까?”

  화가 치밀어 올라 따지려다 겨우 분을 삭였다. “여기가 나이트예요? 조금 있다 가야 하니까 저희 거는 알아서 계산할게요. 합석 안 합니다!” 

  종업원은 연신 머리를 굽히고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체념한 듯했다. 나는 사만다의 손에 토르티야를 쥐여 줬고 그녀는 맛있게 잘 먹었다. 한 30분쯤 흘렀을까. 사만다의 손에 화장실이라는 손바닥 글씨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와인에 취한 것처럼 알딸딸하고 몽롱했다. 눈앞은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해졌고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힐끔거리던 사내들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제대로 들어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쪽저쪽 벽에 부딪히고 손을 씻다 머리를 세면대 거울에 부딪쳤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떴다. 내가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속옷도 벗겨져 있고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두려웠다. 비틀거리지 않으려 있는 힘껏 머리를 세게 흔들고 몇 번이나 넘어져 가며 자리로 겨우 돌아왔다. 사만다가 흐릿하게 뭉개져 보였다. 돌아가야 한다. 그녀도 정신을 못 차릴 텐데,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 사만다 손을 잡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계산이야 나중에 하면 된다. 방향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사만다 손에 이끌려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했을까.... 눈앞에 침대가 보였다.    


  눈을 떴다. 일자 눈썹 남자와 타투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사라졌습니다.” 

  “누가요?” 

  “사만다요. 제이가 데려갔을 겁니다.” 타투 여자가 말했다. 

  “네? 어떡해요. 이제....”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일자 눈썹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려 해도 머릿속은 하얀 공백 뿐이었다. 카페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니 음식을 먹고 있을 때까지는 뚜렷이 기억났지만 그 이후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가 음식에 약을 탔던 것일까.... 합석을 요구하며 힐끔거리는 남자 두 명이 떠올랐다. 

  짐을 정리한 트렁크를 타투 여자가 집 앞에 세워진 카니발까지 들어다 주었다. 10분쯤 흘렀을까. 일자 눈썹이 집에서 나왔고 차는 출발했다. 일자 눈썹이 다그치듯 말했다. “절대 레몬의 지시를 어겨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됩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명백한 협박이었다. 

  “제이는 분명 진해에 있습니다. 안민고개에서 추락사한 남자도 제이가 아닙니다.” 그가 무심히 말했다. 

  “그럴 리가.... 그럼 엉뚱한 사람을 죽인 겁니까?” 

  “그건 투신자살 건으로 마무리될 겁니다.”

  “제이가 사만다를 데려간 건 확실한가요?” 

  “그렇습니다. 사만다를 데려갔으니 이제 반격할 겁니다.” 

  카니발은 낮은 동산 앞 소고기 집 앞에 멈췄고 나는 그들과 작별했다. 앞으로 어떤 질책을 받게 될지 걱정이 몰려왔다. 레몬은 나 같은 사람과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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