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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를 기다리며

친구이야기

by 원호

J를 처음 만난 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많이 친한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렇듯, 돌아보니 어느 덧 당연해져 있었다.


처음 몇 년은 동기지만 교육 차수가 달라서 서로 어색하게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그래서 처음 2년쯤은 인사도 하지 않고 지냈다. J가 지현이와 친해지면서 우리는 건너서 이야기를 듣는 사이가 되었고 언젠가부터 인사를 하고 지냈다. 헬렐레한 나와 지현이와 달리 뭔가 딱부러진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그러다가 몇 번 회의에서 만났었을까? 어떤 계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가끔 회사메신저로 서로를 불러내 차를 마시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동갑이고 마음이 잘 맞아서 시간이 맞는 날이나 떠들고 싶은 날에는 회사 앞 매운 쭈꾸미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점심메뉴가 열개 넘는 회사였는데도, 우리는 학교 담을 넘는 고등학생들처럼 일탈을 즐기기 위해 점심시간을 쪼개 바쁜 걸음으로 사업장을 가로질러 30분은 족히 걸어야하는 외식을 감행하곤 했다.


혈액형 AB. 소심한 싸이코. 성향이 같은 우리는 수다가 딱딱 맞았다. 그러다 사업부가 미국회사에 팔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불안한 우리는 더 자주 만났다. 커피와 함께 나눈 대화는 대부분 하소연이었다.

“어린애들이야, 일자리 찾으면 되니까 낫지. 어르신들이야 5년 고용보장된다니까 차라리 잘된 일이고. 우리 연차가 제일 애매하다. ”


우리는 그 때 13년차였다. 책임 5년차. 그러니까 과장, 차장 정도의 직급. 정말로 우리 연차가 가장 애매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하소연하는 사이 많은 선후배, 동기들이 하나씩 회사를 떠났다. 함께 일하던 누군가로부터 그동안 감사했다고, 새로운 일자리를 잡아서 떠난다는 메일을 받고 나면 우리는 만나서 수다를 떨면서 불안함을 잊고자 했다. 나만큼 불안한 서로가 있다는 것에 위안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불안한 채로 우리는 미국 회사 직원이 되었고, 나는 불안함에 등 떠 밀려 무려 13년만에 부서를 옮기기 위해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J와 같은 부서가 되었다. 같은 일은 아니었고, J는 전체적인 과제나 프로세스 관리를 하는 업무였고, 나는 PgM 이라는 이전회사에는 없던 업무였다. PgM이라는 용어도 처음 들어보는지라 영어로 회의나 할 줄 알면 된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 그게 하루에 8시간씩인줄은 몰랐지. 아시아와 미국에 흩뿌려진 팀들과 하루종일 정해진 회의를 끝내고 나면 다시 쌓인 메일을 하나씩 줄여가는 저녁업무가 시작되었다.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건 일을 못하는 시시한 나였다. 업무를 바꾼 뒤 한 달 뒤에 있었던 첫 심의회는 어찌어찌 넘겼지만 두번째까지 운이 이어지진 않았다. Pass를 받으면 바로 금형을 파려고 개발팀과 협력업체 모두 대기중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 다시 승인을 받느냐는 문의와 독촉이 이어졌다.


심의회에서 Fail 을 받고 돌아선 나를 불러내 차에 싣고 J는 사업장에서 꽤 먼, 그리고 그 동네에서 꽤 유명한 추어탕 집으로 갔다. 거기서 뜨끈한 추어탕으로 배를 데우고,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다시 일할 기운이 났다. 그럼 추어탕집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달달한 음료 한잔을 사서 다음 회의 시간 맞춰서 다시 사무실로 나를 데리고 와 주었다. 그런 위로와 공감을 대여섯번쯤 지나 나의 첫 과제는 시장에 나왔다.


그 사이 우리를 산 미국 회사는 판교에 신사옥을 마련했다. 입사 후 13년을 한결 같이 협력업체 가득한 공장지대에서 보낸 우리에게 지하로 현대백화점이 연결된 판교는 신세계였다. 우리는 매일 같이 백화점으로 점심산책을 나갔다. 명품관을 돌면서 J는 나에게 브랜드 설명을 해주었다.

“재벌 누가 그때 입고 나온거”

“누구 여친이 입고 나온 브랜드 여기”


그리고 나서 비로소 만만한 h&m에 가서 바지도 입어보고, 애들 옷도 구경하고 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이런 게 가능하다니, 촌사람들에게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심란한 날이나, 회의시간이 한시간 중에 비면 우리는 현백으로 달려가서 한잔에 구천원하는 드립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우리는 언제쯤 평일에 다른 일 없이 백화점에 놀러와보나 하는 푸념은 디저트였다.


아쉽게도 우리의 판교라이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불과 네달쯤이 지나고 코로나가 심해졌고, 우리는 무기한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재택을 시작하자마자 엄마와 동생이 차례대로 큰 수술을 받으면서 나는 체력도 기력도 모두 떨어졌다. 지쳐서 쉬고만 싶었다. 그리고 그 해 말 일곱살이던 나의 둘째가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누구와도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딸의 병을 알게 된 날, 나의 상사에게 휴직한다는 한두줄의 메일을 보냈을 뿐이다.


내가 휴직하고 딸이 나을 때까지 몇 개월의 시간 동안 J는 나를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아이가 낫고 내가 다시 연락해서 그동안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을 때, J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연락이야 니가 할 수 있을 때 하겠지 했다. 그냥 많이 나쁜 일 아니기를 바랬지, 뭐.”

일년이 지나 내가 복직할 무렵 J는 휴직을 했다. 그 사이 J는 PgM이 되어 과제를 두개나 해서 많이 지쳤고, 하나 뿐인 딸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다. J가 없는 회사는 얼마나 허전하던지. 드디어 J가 돌아오던 바로 그 날. 회사에서는 두번째 희망퇴직을 받았고, J는 대상자가 되었다. 휴직이 이유였다고 짐작은 간다. 그렇게 회사에 J가 앞으로도 없을 날들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J는 멋지게 다시 이름을 들으면 모두 아는 꽤 큰 IT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다. 재취업은 이제 늦었다고 푸념했던 시간이 이미 5년쯤 흘러간 뒤였다. 회사에서 힘들다는 나의 푸념에 J는 J가 간 회사에 나를 소개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직이란 것을 해보았다. 이력서는 대학생 때, 지원한 첫 회사에 빈칸에 채우기가 다였다. 이직에 무지했던 나는 J 이력서를 거의 복사한 수준으로 베껴서 취업에 성공했다. 우리가 참 비슷한 길을 걸어왔구나 생각하면서.


이번회사는 무려 삼성동. 회사는 삼성동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한참 올라야있지만, 우리가 누구냐. 우리는 매주 수요일 코엑스로 맛집 기행을 감행했다. 내가 진정한 서울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코엑스에서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대구여자 J다. 우리는 새로 들어왔다는 미국 햄버거집, 중국에서 들어온 만두가게 등 맛집을 섭렵하고 다녔다. 코엑스에서 하는 전시회에 인파가 몰린 날은 맛없는 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떼운 날도 있었지만, 그런 날은 커피가 특별히 맛있는 곳에서 기운을 충전했다.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성격, 입맛, 나이, 경력 그 모든게 나와 닮아있던 내 친구. 그해 가을, 우리는 함께 우울했음에도 고궁과 교외의 호수를 함께 걸으면서 서로 위로했다. 모두 J가 계획을 세우고 나를 싣어 나른 덕분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다시 나는 새로운 곳에서 J 없는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회사에서 올해의 가장 나이 많은 신규입사자라는 사실보다도, 회사에 친구가 없다는 사실이 더 당혹스럽다.

내 우울과 불안을 기꺼이 함께 지고 가던 J의 연락을 나는 오늘도 기다리는 중이다. 연락이야 뭐, 괜찮아지면 주겠지 하고, 무탈히 잘 지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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