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9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횡성으로 무박 일일

친구-2024.12.10

by 원호 Mar 24. 2025

혜숙이가 한국에 왔다. 이것은 우리끼리의 명절. 날짜가 정해지면 혜숙이, 선희와 설레는 마음으로 함께먹을 맛있는 음식, 만나서 할 이야기,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한다. 시간은 하루인데 각자 세운 계획이 3박 4일쯤 된다.


혜숙이가 도착하기 전날, 11월의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지는 바람에 아직 잎이 지지않은 나뭇잎에 눈이 한가득 내렸다. 빨갛고 노란 단풍이 지기전에 성질 급한 눈이 나무위로 쏟아지는 바람에 나무에 쌓인 눈은 얼핏 핑크 같기도 연노랑 같기도 했다. 눈이 녹기 전에 혜숙이도 빨리 와서 봤으면 싶었다.

undefined
undefined
브런치 글 이미지 3

혜숙이가 도착한 날, 우리집에 모여서 함께 꼬막에 밥을 비벼먹고, 회에 와인을 마시고,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을 했다. 새벽 세시까지 이야기를 했는데도 시간이 모자랐다.


이번에는 혜숙이가 3주일정으로 짧게 오는 바람에 다시 볼 기회가 있을까 했는데, 혜숙이 어머니가 우리를 횡성집으로 초대하셨다. 감자와 옥수수 농사지은 것도 챙겨주고 싶으시다고... 선희와 나는 횡성에 가기로 했다. 나의 둘째 딸, 지호는 덤이다.


토요일 아침, 선희와는 맥도날드앞에서 만났다. 선희가 반쯤 카페인 중독인 나를 위해 커피도 미리 사놓았다. 선희차를 타고 출발했다. 운전을 할 줄 모르는 나는 밖을 쳐다보면서 마냥 신났다.

"오.. 이천아울렛, 오, 여주아울렛, 오~~~ 하이닉스" 하면서 지나가는 건물을 알은 체 하고,

"켄달스퀘어가 여기구나. 나 여기 리츠있는데..." 하면서 망한 재테크도 떠올린다.


전날 외부강의를 다녀온 선희는 피곤했을텐데, 운전하면서 내말에 부지런히 추임새도 넣어주고 회사이야기, 사는 이야기도 한다. (나에게는) 짧은 두시간이 지나고 찐빵집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우리는 벌써 횡성 안흥까지 왔나보다. 우리는 그 사이 휴게소에 들러 각자 좋아하는 간식도 하나씩 사먹었다. 나는 핫바, 선희는 핫도그, 지호는 회오리감자.


혜숙이네 집에 도착하니 멀찍이 아버지, 어머니가 나와 계신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서

"안녕하세요~~" 하고 외쳤다. 그 사이 혜숙이도 나왔다.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한번 와봤다고 집과도 구면이라, 들어가는 현관이 익숙하다. 거실은 이번 여름에 공사를 하셨다. 향이 좋은 나무로 천장과 벽을 감싸고 바닥도 평평하게 고르셨다. 그래서 거실은 더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는 "배고프지? 아침 안먹었을꺼 아니야." 하시면서 상을 차리시는 사이 먼저 밥알이 동동 뜬 식혜부터 한잔씩 주셨다.


식혜를 마시고 점심을 먹으러 부엌으로 갔다. 직접하신 통통한 간장게장, 쌍화차로 졸인 돼지수육, 새콤달콤하게 무친 더덕, 잘구워진 갈치, 시원한 물김치, 쫀득한 연근, 들깨랑 잘 무친 고사리인줄 알았던 고구마순까지 식탁이 그득하고, 방금 잘 된 밥을 어머니가 막 푸려고 하시는 참이다. 나는 지호와 나란히 앉아서 선희에게 부탁해 사진도 한장 찍었다. 갑각류알러지가 있는 선희는 게장을 못먹어해서 안타까워했다. 나는 원래 끈적한 식감이 싫어서 게장, 새우장은 안먹는 편인데, 이 날 만큼은 맛있게 잘 먹었다. 지호도 갈치 한토막과 함께 열심히 먹고 있는 걸 보니 입에 잘 맞나보다. 쌍화차로 졸인 돼지수육은 기분좋은 단맛이 났다. 무엇보다 새콤하게 무친 더덕이 상큼해서 먹고나면 배가 너무 부른데도 다른 음식을 또 부르는 맛이었다. 그래서 밥을 리필해서 먹고 배뚜드리면서 다시 거실와서 앉았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어머니는 과일과 함께 쌍화차를 주셨다. 당귀같은 한약재를 직접 기르시고, 물대신 배를 즙내서 같이 달여서 만들었다는 쌍화차가 맛이 없을리가 없다. 몸이 뜨끈해지는 쌍화차를 한잔 마시고, 우리는 봉평 5일장으로 향했다.


봉평은 2일, 7일에 오일장이 열린단다. 혜숙이 부모님이 횡성오일장이 더 큰데 날짜가 안맞다고 아쉬워하셨지만 의외의 도시여자인 나는 오일장이 처음이라 비교군이 없다. 선희차를 타고 사십분여를 달려서 "봉평전통시장"이라는 간판이 걸린 큰 대문을 지나 오일장으로 들어섰다. 바람은 차지만 따뜻한 볕아래 고양이 한마리가 나른하게 졸고 있다. 우리를 보고는 잠을 깨웠다고 투정하는지 "야~옹"했는데, 너무 사람 목소리 같아서 우리도 따라서 "야옹~" 하면서 오일장 여행을 시작했다.


시장 초입을 걷다보니 키 큰 가로등의 허리춤에 책모양 동판이 걸려있고, 동판에는 달과 별 그림과 함께 정갈한 글씨체로 무언가 문구가 새겨져있다.

"흐뭇한 달빛에 숨이막힐 지경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5

몇걸음 더가니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조각도 나온다.

왼쪽의 물레방아에는 아까보았던 문구가 다시 새겨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오른쪽에는 어른을 업고 있는 소년(?)의 조각이 있다.

아이보다 엄청 큰 어른이 업혀있는데 표정이 지나치게 밝고, 업은 소년은 너무 아이라서 소설 내용을 기억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기억속 한 구석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TV문학극장이었던가 하는 소설 내용을 드라마 형식으로 만들었던 옛날 프로에서 사방팔방 안개꽃 같은 하얀 꽃 사이로 두 사내가 걸어가던 장면이었다.


봉평이 이효석의 고향이어서인지, 메밀꽃 필무렵의 주막과 장이 바로 여기 봉평 오일장 배경이어서인지, 아니면 둘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일장 구석구석에서 메밀꽃 필무렵의 한구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은 오후 세시가 아직 안되었는데, 벌써 파장분위기다. 메밀로 만든 뻥튀기, 메밀빵, 황금칩이라는 이름이 붙은 메밀칩, 그리고 메밀 베게를 판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린시절 시장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장터이다. 긴 골목을 따라 늘어선 장터를 따라가다보니 왼쪽으로 꺽어지는 골목이 보인다.

"여기로 가면 먹을 거리들이 있어."

혜숙이의 안내에 따라 먹을 거리 길로 들어서니 메밀전과 메밀전병을 파는데, 모두 한장에 이천원이다.

사람이 많은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기다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손님이 계속 들어와서 포장마차 안의 네개 테이블은 거의 만석이었다. 쌀쌀한 바람에 모두들 손이 차고 볼이 빨갛다. 섞어서 다섯장을 시키고 난로위의 주전자를 들어 종이컵에 차를 따라서 모두 양손으로 종이컵을 감싸고 뜨거운 차를 홀짝 거렸다. 구수한 맛의 뜨근한 차에 뱃속이 따뜻해진다. 이게 메밀차 맛인가보다. 얋게 부친 메밀전이 돌돌 말아서 나오는데, 자극적이지 않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가득했다.

"건강해지는 맛이다." 선희가 말했다. 따뜻한 차를 한잔씩 더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숙이가 계산하면서 주인할머니께 들어보니 우리가 마신건 옥수수차였다.

브런치 글 이미지 6

오일장이 끝나는 지점에는 소설속 국밥집을 재현한 곳이 있었다. 사극에서 본 것처럼 기역자 모양에 툇마루가 있는 국밥집에 호기심이 들어 부엌안을 들여다보았다. 손님에게 국밥을 내갈때 썼을 개다리 반상과 행사에 쓰는 플라스틱 의자가 뒤엉켜 쓸쓸한 날씨만큼 허전해보였다. 소설에서 국밥집이 어떻게 나왔었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집에 돌아가면 꼭 읽어봐야지. 어느 샌가 아까 보았던 고양이가 계속 우리를 따라온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어느 샌가 옆에 와 있더니 우리가 길건널때 따라 건너다 트럭에 치일뻔 해서 모두를 놀래켰다. 고양이를 남겨두고 혜숙이네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는 어머니가 싸주신 배로 입가심을 했다.


집에 도착해서 작년에 갔던 뒷산으로 산책을 마치고 곧 출발하려고 하니 혜숙이 어머니가 오늘은 자고 내일 일찍 가라고 하신다. 집에 첫째혼자 있어서 오늘 가야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저녁 먹고 가라고 하신다. 어차피 늦었는데 저녁먹고 가라고... 그때 시간은 네시반. 가다보면 어차피 해지는데 집가서 저녁먹느니 저녁 먹고 가서 씻고 자는게 좋지 하셔서 그러기로 했다. 저녁은 통통한 낙지와 신선한 채소가 들어간 샤브샤브. 살이 통통하게 오른 조기도 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향이 좋은 커피까지 한잔하니 벌써 밖이 어두워진다. 향이 좋은 헤이즐넛 커피였는데, 옆에서 커피 향을 맡던 지호가 내가 다 마신 컵을 홀짝여보고는 얼굴을 찡그린다.

지호 덕에 한번 웃고 혜숙이 따라 야경을 보러 마당으로 나갔다. 어느 새 어둠이 내려앉은 조용한 마을 한켠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겸한 불빛이 화려하다. 완벽한 하루다. 하늘에는 손톱같은 초승달과 유난히 밝은 별이 하나 떠있다. 산골의 어둠은 달을 더욱 밝게 한다. 마당의 장독대 넘어 이어지는 앞동네와 언덕까지 부드럽고 고요한 달빛이 흐르고 있다.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전 14화 S 아버지의 장례식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