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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아버지의 장례식

친구이야기

by 원호

새벽에 눈이 떠졌다. 아, 또 한주의 시작이구나. 핸드폰을 슬쩍 켜보니 아직 5시 반이다. 화장실갔다가 일어나서 스트레칭과 운동을 하면서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상상만 하고,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보통 7시 20분에 일어나니, 아직 누워서 두 시간은 놀 수 있다.

아 참, 오늘은 제1회 재테크모임이 있는 날이다. 이직을 하면서 이전 회사에서 가깝게 지내던 두 분과 핑계삼아 계속 볼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한 분은 나랑 동갑인 개발자 분인데, 규모있는 개발조직을 많이 이끌어보고, 이끌고 있는 나랑 동갑인 베테랑이다. 모임도 이분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또 한 분은 S전자 시절 내가 사수였던 후배인데 회사 생활 동안 잘 자라서 QA 전문가가 되었다. 기특한 녀석!

오늘은 기대되는 만남이 있어서인지 월요일인데도 별로 싫지가 않다. 다만 오늘은 각자 재테크 계획을 세워서 공유하기로 했는데,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아본 게 없어서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처럼 그게 좀 찔린다면 찔린달까.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분산투자”, “금투자” 이런 키워드를 찾아보면서 유투브와 블로그를 어슬렁 거리는 사이 한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하루 8분 투자로 월300 부가수익 올려요” 같은 꿈 같은 동영상도 계속 피드에 올라왔다. ‘하루 30분 일하면 월 천인데, 하루 종일 일하면 사돈에 팔촌까지 일안해도 되겠다’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카톡에는 뭐 새로운게 없나… 하는데, S에게 카톡이 왔다. 문자가 도착한 시간은 여섯시 이분.


“어젯밤에 아버지 돌아가셨어….”

머릿속이 멍해있다가 일단 통화버튼을 눌렀다. 문자가 온 지는 벌써 삼십분이 넘었다.

“어디야?”

“응. 나 아직 집이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있어서, 좀전까지 울고 있었을 친구의 모습도, 눈두덩이가 빨갛게 부어올랐을 모습도 본 듯이 알 수 있었다.

“그래. 내가 빨리 갈께.”

나도 모르게 말끝에 눈물이 났다.

“야, 니가 왜 그렇게 울어. 그리고, 빈소차릴려면 시간 좀 걸린대. 이따 또 연락할께.”

몇 마디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S와 마지막 통화를 한 것은 지난주 수요일이었다. 나와 S, 그리고 미국에 있는 H는 매일 같이 메신저방에서 떠들지만 통화는 어쩌다 한 번인데, 그 날이 지난주였다. 그 전 주에 응급실을 통해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S 아버지는 벌써 십년이 넘는 기간을 대장암 투병중이셨다. 간혹 며칠씩 입원하는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입원할 때 의료진이 심각한 상황이 오면 연명술을 할지에 대해 결정해달라고 해서 식구들을 긴장하게 했다. 하지만 며칠만에 의식도 돌아오고, 일주일만 있으면 다 괜찮아질 것 같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근데 병원밥이 맛이 없다고 농담까지 하셔서 식구들은 한 숨돌리고, 바로 월요일에 퇴원을 하셨다.

퇴원하는 과정에 의료진들한테 싫은 소리도 하고, 역정도 내셔서 아니래도 “JS”환자로 낙인 찍힌 S 아버지는 또 한 번 사위를 곤란하게 하셨단다. S의 제부가 이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고 있다.


집에 돌아와서는 S 어머니의 고난이 시작되셨다. 아버지는 입원 이후에 기력이 떨어지셔서 혼자서 거동이 힘든 상황이었다. 엄마가 기저귀를 해놓으면 정신이 멀쩡한 아버지는 너무 불편하니 다 풀어헤쳐 놓고, 엉망이된 이불을 몇일째 빨고 있는 늙어버린 엄마가 S 눈에는 안쓰럽기만 했겠지. 5월 주중에 부처님 오신날로 휴일이 하루 끼어서 S는 인천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아빠 계속 이러시면… 이달말까지도 이러시면 진짜 요양병원에 가실 수 밖에 없어.”

아버지는 당연히 요양병원은 너무 싫다고 근데 내가 일주일이면 다시 기력 차려서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그러면서도 속이 안 좋아서 식구들이 주는 식사는 전혀 하지 못하셨다고….

S는 인천에서 용인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에게 전화해서 그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지만, S를 이해한다.


같은 자식입장이라서가 아니라, S가 그동안 해온 것을 나는 이 십년간 지켜봐왔다. 스무살때부터 S는 부모 같은 자식이었다. 과외를 해서 과외비를 받거나 하는 날이면 부모님은 돈 쓸일이 생기셨다. 갑자기 집에 수리할 곳이 있거나, 뭐가 고장났는데, 홈쇼핑에서 싸게 팔아서 사야하거나, 아니면 장을 봐야하는데 돈이 없다거나…. 항상 내가 돈 없는지 물어보는 엄마를 가진 나는 그런 S의 말이 처음에는 좀 믿기지 않아서 얘기를 들어주면서도 당연히 어느 만큼은 과장일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 해져서, S가 열심히 과외를 해서 여행을 가려고 모았던 적금을 타거나, 대학원에서 알바를 하거나 하는 여러가지 이유로 돈이 생기면 어김없이 S 부모님들은 그 돈을 쓸 이유가 생겼다. 대학원에서 돈을 벌면서부터는 선희는 번 돈의 일부를 부모님께 당연스레 보태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 좋은 친구 부모님 들이셨다. 우리가 기숙사에 살던 대학 시절, S부모님은 동네에서 참치집을 하셨는데, 일요일 기숙사로 돌아오는 친구의 손에 항상 맛있는 참치와 김, 참기름, 무순을 넉넉하게 싸서 보내주셨다. 먹성 좋은 우리들은 배고픈 참새들처럼 일요일마다 S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기숙사 바닥에 박스를 깔고, 먹자판을 벌였다. 대학생들이 돈주고 사먹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싼 참치를 배불리 먹으며 깔깔대는 스무살의 일요일밤은 언제나 즐거웠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인당 얼마라는 소문난 참치집에서 회식을 몇 번 해보았지만, 스무살에 먹었던 S네 참치맛을 이길 만한 참치는 아직 없었다.

그 후로 오래지 않아, 참치집은 영업이 어려워져 문을 닫았다. 왜 문을 닫았냐는 내 물음에 파는 것보다 우리식구가 먹는게 훨씬 많아서 그렇게 됬다고 답하는 S와 함께 나는 한참 웃어 제꼈었다.

S는 대학교 3학년에 자취를 시작했다. 그 전 해에 나와 같은 기숙사 방을 쓰던 나의 방순이와. 둘 다 친했던 나는 자취방에 가서 놀다가 자다가 얻어먹고 가는 게 일상이었고, 엄마에게 손맛을 물려받은 S 음식과 S 엄마가 싸주신 반찬의 최고 수혜자였다.


사실 S네는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백평짜리 이층집에 사는 부자였단다. 중학교 가기 전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갑자기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S는 유복한 초등학생 시절을 증명하듯 볼링, 수영 등 갖가지 운동을 돈 주고 배운 태나게 잘하는 아이로 자랐다.


그리고 S는 번 돈을 쓸 줄 아는 아이였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은 참자는 나와 달리, S는 적당히 주변과 자신을 대접할 줄 알았다. 돈이 없을 때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인색하지 않았고, 자신에게도 그랬다. 특히 여행에 있어서 그랬다. 박봉의 대학원 생활 중에도 유럽, 동남아, 미국, 그리고 남미까지 다녀왔다. 그 무렵 S는 전화하면 여행중이거나, 다음 여행을 준비 중이었다. 잦은 여행에도 빼놓지 않고, 나와 아이들의 선물을 챙겨서 우리집에 들러주었는데, 세계각국에서 온 소소한 선물을 받는 것은 항상 설레고 즐거웠다.


그러다 내가 취업을 막 하고, S는 아직 대학원생이던 시절. S네는 또 한번 어려움을 겪었다. 급작스런 엄마의 간경화로 S의 동생이 엄마에게 간이식 수술을 해드리게 되었다. 간성 혼수로 정신을 못 차리는 엄마와 동생에 대한 걱정 외에도 이천만원이 넘는 수술비는 석사과정중인 S에게는 과한 짐이었다. S의 친한 친구들이 백만원, 이백만원씩 돈을 빌려주고, 이모에게도 돈을 빌려서 수술비를 맞춘 S 덕분에 이식수술을 받은 엄마는 곧 건강을 회복하셨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빌린 돈을 갚으려고 그 해 S는 여행은 물론 돈 쓰는 것도 안쓰러울 정도로 자제했다. 그 덕에 S와 동생은 거의 1년이 조금 넘어서 빚을 모두 갚았고, 그 때 빌려준 돈을 마지막으로 받은 게 나였다. 나는 그때 회사를 다닌지 2년째가 되어갈 뿐인 신입이어서, 실상 돈을 쓸데가 별로 없었다. 대학시절 내내 과외비로 용돈을 쓰던 게 다였던 나에게 월급은 너무 많아서, 거의 월급통장에 남아 있다가 어느 정도 모이면 예금에 넣는 것을 의미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이 일을 하고 돈을 이만큼 준다고?” 하는 생각을 하면 회사에 고마웠다.

물론 삼년차의 고비를 넘기고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올해도 이거만 준다고? 때려칠까?”의 상태로 바뀌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급한 돈도 아니었고, 내가 어려울 때는 S가 도와줄 것도 알아서 나는 정말 주지 않아도 된다고 S에게 몇 번을 이야기 했었다.

하지만 S는 빌린 돈을 안 갚고도 발을 뻗고 자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에게 빌린 돈과 엄마가 뜬 수세미를 들고 와서 이자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치킨을 시켜주었던가. 그리고 개운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물론 그 뒤로 다시 여행과 풍류를 즐기는 S의 삶으로 돌아왔다.

S가 취업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S 아버지는 용종을 하나 발견하셨다. 그게 암과 비슷한 종류여서 보험금도 타게 되었다.

“어차피 엄마아빠 알게 되면 또 달라고 할 게 뻔해서 적금이나 할려고, 아님 어디 투자라도 하던지… “

실상은 암도 아닌데, 보험금을 타게 되어서 행운이라고 말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증상은 심각해졌고, 병원에서 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서는 안되겠다 싶었던 S가 잘한다는 병원을 찾아서,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고, 좋은 의사선생님을 만나서 아버지의 본격적 치료는 시작되었다. 그게 벌써 십년은 된 이야기다.

그 뒤로 S는 병원에서 아버지의 항암을 상담하고, 아버지는 치료를 받고, 또 힘들다는 아버지를 달래고, 바닷가에 가서 바람도 쐬드리고, 그 항암제가 효과가 없어질 때 쯤이면 다시 다른 항암제를 써보자고 병원에 가서 상담하고….

이 과정은 수해동안 반복되었다. 쓸 수 있는 항암제 수가 줄어들수록 S는 초조해했지만, 그 사이 아버지가 나이를 드시는 만큼 암의 진행도 속도를 늦추었다.

코로나때 여행가기 힘들어지자 S는 아버지와 엄마를 위해 속초 바닷가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다. 늘 바닷가 집을 원하시는 아버지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 아파트는 나를 비롯한 S 지인들 모두 전화한통이면 하룻밤 묶을 수 있는 아지트이기도 했다.

아버지도 그곳에 와서 자주 쉬셨지만, 쓸 수 있는 항암제가 다 떨어진 최근 몇 해는 기력이 떨어지셔서 자주 다니진 못하셨던 것 같다. 그러시면서도 S에게 어디 조용한데, 낚시터 가까운 곳에 땅이랑 집 좀 사면 좋겠다고 알아봐달라고 하셔서 괜히 딸에게 싫은 소리도 듣고 하셨다.

S는 나에게 그렇게 하소연했다. 이십년은 부모님이 나를 키웠지만 지난 이십년은 내가 부모님 돌봤으니 퉁치고 연 끊으면 좋겠다고…. 그래도 S는 아부지 얘기를 듣고나서 명절에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낚시여행을 다녀왔다. 그랬던 S가 아버지에게 싫은 소리를 했던 그때를 마지막으로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냈다.


나는 그날 일을 하는 내내 뭔가 정신이 없었다. 오후 네시쯤 일을 마무리하고, S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가려는데 필요한거 있음 알려주라. 뭐라도 해줄 수 있음 내가 마음이 좋겠어.’

곧 답장이 왔다. “그럼 진짜 미안한데, 샌드위치 사다주라. 여기 주변에 편의점이 있는데 나가기가 쉽지 않네.”

나는 H와 D에게 부탁받은 조의금을 챙기고, 동네 약국으로 들어갔다. 알약과 드링크가 함께 있는 체력 회복제를 네 개 샀다. 삼일밤을 장례식장에서 보내야하는 S, S의 어머니, 동생, 그리고 제부에게 주면 좋겠다 싶었다. 편의점에 들러서 샌드위치와 S 동생의 세아이를 위한 간식도 넉넉히 샀다. 발걸음이 바쁜데, 인천은 참 멀기도 하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핸드폰 지도를 보면서 뛰다 걷다 했다. 양쪽으로 먹자골목이 이어진 상가골목의 오른쪽 끝자락에 병원 장례식장이 보인다.


쉬운 이별은 없는 것 같다. 아흔이 넘어 돌아가셨던 시할머니의 빈소에서도 딸들이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를 기억한다. 엄마보다 나이 많은 엄마의 친구가 백 살이 다 된 친정엄마를 떠나보내고 얼마지나서, 엄마는 눈치 없이 물었었다고 한다. 서른이 조금 넘어 친정엄마와 이별했던 우리엄마의 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렇게 오래 계시다 갔는데도 그렇게 슬퍼요?”

엄마 친구는 “그걸 말이라고… “하면서 다시 섧게 우셨다.


이럴 때, 위로 되는 말을 알고 있으면 좋을텐데… 병원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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