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보고읽은 것.
나의 책읽기는 도박과도 같다. 책을 고를 때 보통 제목과 표지만 본다. 알고 있는 작가도 책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다 보니 별 수가 없다. 불편한 편의점의 돌풍과 같은 인기 이후로는 비슷비슷한 그림체로 표지가 그려진 책이 많아졌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이번에 내가 고른 책도 비슷했다. 책 표지는 수채화로 그린 웹툰 같은 그림이었다. 사람들이 퇴근해서 거실 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한 시각, 조용한 주택가 1층의 간판도 없는 서점에서 따뜻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노란 조명이 비추는 서점에서 한사람은 커피를 내리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책의 내용은 불편한 편의점과 완전히 다르지만 어딘가 그 소설을 생각나게 했다. 너무 지쳐 회사를 그만둔 주인공 영주가 어렸을 적 자신의 쉼터였던 서점을 떠올리고는 조용한 주택가에 서점을 열고, 그곳에서 일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따뜻하게 사귀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야기.
인기없는 편의점을 운영하는 은퇴한 선생님이 우연히 알게 된 노숙자를 편의점 알바생으로 고용하면서 알바생과 편의점 손님이 서로 알아가고 의지하고 성장하는 불편한 편의점.
비슷해서 재미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재미있게 책을 읽었다. 우리집 근처 어딘가에 이런 따뜻한 서점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음이 복잡한 날 서점에 들러, 가벼운 책 하나를 고르고, 누군가 정성껏 내려준 향이 좋은 핸드드립 커피를 앞에 두고, 고요히 앉아서 책을 읽다가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책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그런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지아 작가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책 판매가 20만부를 넘어서면서 그녀는 전국구의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대통령이 새로 문을 연 서점에 가장 먼저 초대받았고, 인기있는 유튜브 채널에 초대되어 유명한 연사들과 그녀가 쓴 소설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열렬한 팬이었던 나는 그녀가 출연한 유투브는 모두 챙겨보았다.
그 중 나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영상이 있었다. 편안한 옷차림의 그녀가 구례의 한 좁은 서점에 가운데 기다란 테이블을 두고 다닥다닥 앉은 동네 아줌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북토크를 하는 동영상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구례라는 동네는 좁아서 옆집사람, 앞집사람 모두 알고 지내서인지 분위기가 스스럼 없었다. 무뚝뚝한 형광등 아래 모여 앉은 사람들은 더 없이 편안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유명작가의 작은 서점 북토크가 신기했던 것인지 다른 곳과 달리 너무 편안하게 말하는 그녀가 좋아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영상을 두세번쯤 보았다. 그들이 갖고 있는 연대를 나도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연대를 꿈꾸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닌 것 같다. 불편한 편의점류의 이야기가 계속 세상에 나와도 계속 사랑받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편안한 연대의 꿈을 꾸는 모양이다. 서로 응원을 주고 받는 편안한 연대와 그 사귐을 가능하게 하는 따뜻한 공간. 원하는 때에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나를 보여주어도 되는 부담없고 편안한 연대. 기꺼이 응원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부드러운 공간.
글을 쓰다 보니 나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다. 한 달에 한번 그래쌤이 열어주는 그림책에 기대어 글쓰기 시간. 열시 반이 다가오면 두근거리며 수업에 들어간다. 그 날 사정이 있어서 참석을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무겁지 않도록 그래쌤이 한마디 해주신다. “선생님이 오시면 좋지만, 일이 있으시면 다음에 오셔도 좋아요. 우리 부담없이 하자구요.” 따뜻하게 마음에 내려 앉는 말.
내가 서점 가서 찾아보면 없던데, 우리 쌤은 어디서 저렇게 따뜻한 이야기를 찾아오시는지. 우리는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그림책의 온기를 저마다의 이야기와 함께 나누어 갖는다. 그러고 나서는 글을 쓰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조용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글을 쓰고 있는 시간.
헤어지기 전에는 각자 쓴 글을 나눈다. 나보다 한 발 앞서 인생을 경험한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어깨 너머로 배우는 인생이다. 울엄마가 그랬다. 육십에는 육십만큼보이고, 칠십에는 칠십만큼 보인다고. 엄마말씀은 틀린 적이 없다.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배울 수 있는 형형색색의 인생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세령쌤과 영숙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이야기의 한토막 같다. 이렇게 공감가는 이야기라니…
온라인으로만 만났지만, 따뜻한 바닥에 부드러운 이불 속에 다들 발을 집어 넣고 둘러 앉아 귤을 까 먹으며 머리를 맞대고 그림책을 보는 기분으로 이번 달 수업을 기다린다. 봄이 오고 있다. 선생님은 예쁜 꽃사진을 아마 먼저 보여주실 것이다. 내가 본 예쁜 꽃을 나누는 마음. 그 마음이 나를 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