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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과제 이야기

by 원호

나는 첫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 줄 곧, 한 부서에서 일했다.

개발 프로세스를 만들고, 그에 맞게 개발 인프라를 운영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부서로 옮겨가고 우리 부서로 옮겨오고 했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아서 자리를 지켰다.


친한 후배들은 나를 부서 지박령이라고 불렀다.

당장 상품화를 하지 않으니 적당히 안주하며 다니기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을 일 해왔으니 당연히 일은 손에 익었고,

손에 익은 일은 상대적으로 쉽게 해낼 수 있었다.

밥값 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사업부가 다른 회사로 매각되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 사업부를 산 외국 회사에는 우리 부서와 매칭되는 팀이 없었다.

누가 뭐라한 사람도 없는데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그때 마침, 기존에 없던 새로운 자리에 사람들을 뽑았다.

초조했던 나는 새로운 일에 지원했다.

이름도 생소한 PgM이라고 했다.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없없고, 가운데 g는 왜 소문자로 써있는지도 알수 없었다.


프로그램 매니저.

왜 프로젝트가 아니고 프로그램인지 구글링도 해보고 물어도 보고 희미하게 차이를 알았지만 와닿지는 않았다.


한가지 안도되는 것은 이미 지원한 사람들이 일단 모두 다른 부서에서 온 것을 보니

딱히 뭘 잘하기보다 영어로 회의만 진행할 수 있으면 될 것 같았다.

영어 면접을 포함해 무려 다섯번의 면접을 거쳤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드디어 새로운 자리에 PgM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과제도 받았다.

누군가 와서 뭘 해야할지 알려주기만 하면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리를 옮기고 내가 받은 것은 내가 진행할 과제명과 출시일,

그리고 같이 일할 사람들 중 일부의 명단이었다.

그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직접 찾아야했다.


자리를 옮긴 바로 그 날부터 회의를 진행했다.

당장 모든 관련부서와 한달 안에 과제 일정을 수립해서, 심의회를 해야 한다.

과제는 기술이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 시장 출시가 시급한 과제여서 빠르게 시장에 내놓아야한다고 했다.


빌드 일정, 툴링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나는 빌드가 뭔지, 툴링이 뭔지 몰랐다.

어디까지 물어도 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과제의 PM이 되어 내 과제의 가장 큰 위험요소가 되었다.


다른 과제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이 위로라면 위로였다.

다들 미국식 PM, PGM 을 해본 적이 없었고, 업무는 방대했지만, 나는 속속들이 구석구석 몰랐다.


거기에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것은 영어였다.

나는 나름 영어에 자신이 있었다.

대학교 때 어학연수도 다녀왔고, 그러다 보니 이전 회사에서는 계속 해외연구소와 업무를 해왔다.

나는 돈 쓰는 영어 말고, 돈 버는 영어를 한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착각이었다.


우리가 본사였고, 일을 시키는 입장일 때는 내가 “이거 아니?” 하고만 물어도 해외연구소에 있는 상대방이 “어떤 거? 이거? 작년에 한거? 아님 올해한거? 이거 맞니?” 하고 맞춰왔었다.

그럼 적당한 것을 골라 대답해주면 일은 진행된다.

지금은 내가 그 역할이다. 물어보면서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맞춰야 한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영어로 회의를 하고 나면, 온몸의 진이 다 빠졌다.

시간대가 다른 여러 나라와 회의를 하다 보면 늘 밥 시간을 놓쳐서 식당에 뛰어가서 남은 테이크아웃 메뉴를 집어와서 자리에서 때웠다.

그마저도 시간을 놓친 날은 부서 사람들이 커피나 과자를 사다 주었다.

대체 뭐 하자고 이렇게 일을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과 고민을 할 시간조차 부족할 정도로 바빴다.


회사가 바뀌고 담당자와 문의처가 모호해진 수많은 문의 메일은

PM을 통해서 제자리를 찾아가야했다.


한 번에 담당자를 제대로 찾게 되는 일은 드물었고,

일은 일을 만들고,

그 와중에 따라오는 일정의 압박과 영어로 인한 자괴감은 부수적이었다.


그렇게 힘든 날을 보내고 마지막 퇴근 버스를 타고 집에 와서,

초등학교 다니는 첫째와 유치원 다니는 둘째와 자리에 누우면 밤 10시가 넘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자기 전에 나누는 짧은 대화가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내가 집중을 못하거나,

아이들이 눕자마자 잠들거나 했다.


그날은 첫째는 잠들었고, 둘째는 잠이 안 오는지 아직도 눈이 말똥한 날이었다.

“지호야, 요즘 뭐 배워?”

“노래”

“불러줘.”

지호는 엄마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노래가 참 좋았다. 가사도 좋았다. 나는 둘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주에 나는 첫 심의회를 무사히 마쳤다.

이후로도 과제 앞에 나타난 모든 고개를 넘어지면서 갔지만,

어쨌든 과제와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13개월간 6번의 심의회와 다섯번의 시생산을 무사히 마치고 나의 첫 과제는 전 세계에 출시되었다.


나는 정말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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