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옮겨지고, 옮기고, 짤리고, 관두고 다시 일하는 중
지금 다니는 회사로 이직하기 전, 회사에서 있었던 1년간의 기억.
2023년 10월이었다. 회사에서는 신사업을 시작한다고 사람들을 모았다. 회사에서 장기적으로보고 시작하는 신사업이었다. 든든한 신규부서가 좋았다. 그래봐야 스무명 남짓이었다. 우리팀은 넷이었는데 나, 말하는 걸 좋아하는 아저씨, 나를 따라 얼마 전 이직해온 내가 아끼는 후배, 그리고 이제 막 이십대 중반이되어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귀여운 막내 아가씨가 있었다. 팀이 된 날부터 점심시간이면 손들고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로 다 들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옆팀인 PM팀에는 나이를 알 수 없이 귀엽지만 실은 경험이 많은 든든한 기획자들이 있었고 디자인팀은 삼십대 팀장에 통통튀는 이십대 친구들 셋이 있었는데 같이 있으면 내 기분도 통통 튀는 것 같은 사랑스런 친구들이었다. 어른들이 왜 어린시절 우리는 보고 통통튄다고 했는지 이해될 것도 같았다.
개발팀은 묵직하고 진지하게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이었지만 옷에는 귀여운 캐릭터그림으로 피규어를 모으고 핸드폰 하나가 겨우들 어가는 작은 가방을 문신한 듯 늘상 매고 다니는 덕후들이 많았다. 일정을 말하면 "아우, 그때까지는 못해요. 안돼요!" 하고서날짜가 되면 말한 것보다 더 고민해서 기꺼이 해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임무는 거의 방치되다시피한 솔루션을 가져다가 다시 시장에서 팔리는 물건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기존의 솔루션은 누가 열심히 책을 보고 만든 것 처럼 현실하고는 많이 달랐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를 데려와 씻기고 보듬어주는 것 같은 과정이었다. 오랜만에 일이 재미있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침부터 회의하고 영업팀에 시장 상황듣고 다시 회의하면서 23년 계획 로드맵을 만들었다. 23년말이 되면 어느 정도 쓸만한 제품이 나올 것 같았다. 물론 아주 바쁘게 움직인다면...
로드맵은 경영진 승인을 받았고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봄에는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어서 사용성 테스트를 했다. 많이 사용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춘천으로 팀을 짜서 내려 갔다. 가는 길에 닭갈비도 먹고 다 같이 으쌰으쌰하면서 사용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 봄소풍처럼 설렜다. 사용자가 어떤 기능이 제일 편하다는 얘기를 거듭 했는데 그 기능은 마침 함께 했던 수줍 음 많은 개발자가 만든 기능이었다. 그 분은 올해중에 제일 힐링되는 시간이라며 베시시 웃었다.
여름에는임직원 대상으로 사용성평가를 하고 설문조사도 했다. 그 사이에 새로 만들어진 기능이 많아서 자신있었는데 아직 고칠 것도 많았다. 모두들 최대한 출시 전에 반영하자고 의욕이 넘쳤고 개발팀이고 검증팀이고할 것 없이 화장실도 뛰어다니는 여름이었다. 다들 그렇게 열심히 한 덕에 여름이 가기 전 아직 모두 반팔을 입고 있는 시기에 제품이 출시되었다.
그동안 고생한 걸 지켜본 영업팀이 이제는 영업 차례라면서 팔을 걷어부쳤다. 첫 달에는 계획을 밑돌았던 영업실적이 가을이 시작되 려고 할 때는 계획을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인 사용을 지원하고 반영하고 또 VOC와 다른 계획이 머릿속에 가득찼다. 그리고 늦더위가 가시지 않은 가을 어느 날 회사에서는 '이사업을 접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과제를 했던 사람들은 모두 대기 발령된다는 악몽으로 꿔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이었다.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어디서 잘못했는지 시간을 되짚었다. 그리고 한달동안의 시간에 사업은 유지보수만으로 축소되었고 이 일을 하던 사람들은 대기발령되거나 희망퇴직의 수순을 밟았다.
너무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희망차고 바쁜 사계절의 마무리 는 허무함이었다. CTO는 나를 불러 미안하다고 회사 사정이 지금은 밖으로 보이는 숫자가 가장 중요해져서 위에서도 어쩔수 없었다고 사과했다. 우리는 사업을 접는다는 발표 전날까지도 아무 것도 모르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원망이 향할 곳을 찾다 못해 허공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일을 찾아보려고하니 시장은 얼어붙었고 일자리는 거의 없었고 내 나이는 부담스러웠다.
그 사이 사람들과 여러번 만났다. 처음에는 원망과 한숨으로 시간 을 보내고 맥주를 마셨다. 그러다 우리는 좀 계획적으로 놀기 시작 했다. 호수바람도 쐬고 대기 200번을 넘는 맛집도 갔다. 그 사이에 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야구를 보느라 바빴고 다음주에는 드디어 우승을 축하하며 다 같이 백운호수에서 만날 예정이다. 친구와 가을이 짙은 날 경복궁, 창경궁을 가이드와 함께 돌아보고, 미쉐린뭐라는유명한 집에서 순서를 기다려 맛있는 칼국수를 먹고, 북촌 한옥마을 야외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람도 쐬었다. 평일에 누 리는 흔치 않은 호사였다.
새벽요가를 시작했다. 5시 55분에 몸을 일으켜 요가복 바지에 다리 를 꿰어 넣고 오백걸음 정도 걸으면 내가 요가를 배우는 아파트 내 헬쓰장이 나온다. 아침에 요가를 하면 하루 종일 뭔가 하나는 했다는 생각에 내가 기특하다. 11월 한달을 쉬고 있다. CTO는 그 사이에 다시 나를 불러서 다른 자리를 제안했고 나는 일단 당장은 못나하겠다고 12월부터 나가겠다고 이야기 해서 11월 한 달 간의 여유가 주어졌다. 끝이 있는 휴식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덜 막막하다.
다시 나가면 열심히 일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는 벌써 일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떤 마음으 로 일해야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일을 하러 간다는 생각으로 채우려 하고 있다.
한 해가 정신없이 지나다 덜컥 멈춰섰다. 멈추고 나서는 바람이 불고 배경이 바뀌고 해와 달과 별이 번갈아 뜨고 졌다. 다시 달리기 전에 숨을 잘 고른다. 일에 나를 다 쓰지 말고 조금 아껴두었다가 아껴 둔 나와 함께 일 이후의 삶을 고민해야겠다. 어느 날 또다시 갑자기 멈추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즐길 준비를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