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면 된 거 같다
빨리 마흔이 되고 싶었다. 철든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내가 이렇게 힘든게 아홉수의 저주인가 해서.
서른 여덟에 회사가 분사되었다. 경쟁사였던 외국계회사에 팔린 것이다. 물적분할이라는 기분 나쁜 이름으로 직원인 우리는 통으로 넘겨진다고 했다. 미국회사에서는 내가 할일이 없을까봐 전전 긍긍하다가 시험보고 옮긴 자리는 일년내내 나를 긴장하게 했다. 자다가도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내일 회의 스크립트를 쓰는 정신나간 생활을 일년간 했다. 아홉수의 저주인가? 서른 아홉인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이었다. 마흔이 되면 이 모든 괴로움이 씻길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시작되었다.
코로나로 사람들이 힘들어지던 그 해, 나는 마침내 바라던 마흔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초 어느 평범한 날, 언니가 울면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암이래."
혼자서 힘들게 우리를 키운 엄마가 암이라니. 내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동안, 엄마의 수술은 잘 끝났다. 겁쟁이인 엄마는 내내 의연했지만, 나는 그래서 더 엄마가 안쓰러웠다.
엄마가 수술을 마치고 아직 방사선 치료를 받던 때에 또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언니 전화번호가 뜨면 긴장하는 이유다.
"OO이가 오늘 밤을 못 넘길지도 모른대."
며칠전에 결석 제거 수술을 받은 동생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전화였다. 간단한 시술이라고 했는데, 시술 부작용으로 천공이 생겼고, 천공으로 인해 다른 병이 생겼다. 받아주는 병원은 없고, 어디 매달릴 데도 없었다. 다행히 찾은 대학 병원에서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동생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며칠동안 동생은 계속 복수가 차고 열이 끓었다. 의사는 더 기다릴 수 없다며 수술을 하자고 했다. 10시간이 넘는 수술동안 수술실 앞에서 별 기도를 다 했다. 나의 기도가 무색하게 퇴원했던 동생은 바로 며칠 뒤, 다시 열이 끓었다.
코로나 검사를 해놓고, 응급실 앞에서 삼십분 마다 열을 재면서 밤을 보냈다. 동생은 결국 재수술을 받았다. 유착이 심해서 이번에도 수술시간이 길었다. 간병을 하는 동안 휴가를 다 쓰고, 급한 업무가 있는 날은 노트북을 들고 병원에서 일했다. 회복을 위해 동생은 휴직을 했다. 그래도 재수술 이후는 조금씩 좋아졌고, 늦 가을에 회사로 돌아갔다. 길고도 무서운 여름이었다.
여름 한가운데 내 생일이 지나고 나는 진짜 마흔이 되었다. 더 이상 아홉수도 아니고, 이제는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한동안 긴장한 탓인지 불안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유를 모른채 불안했고 잠이 오지 않는 채로 가을이 왔다.
첫째가 키가 작았다. 그해 가을, 성장클리닉을 찾아서 성조숙증이 아닌지 검사를 받았는데, 너무 오래 기다린게 아까워서 둘째도 함께 검사를 받았다. 둘째는 이 검사를 통해 다른 검사를 받게 되고, 그 검사결과를 보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천성 질환을 발견했다. 의사는 즉시 소견서를 써주면서 제일 큰 3차 병원을 추천했다. 그리고는 의사들로부터 들은 무서운 이야기는 깨질 때 튀어오른 유리 파편 처럼 나에게 박혀서 그대로 남았다. 아이없이 의사와 상담을 했던 날, 남편과 차에 탔다. 남편이 "우리 좀 울고 갈까?" 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눈치볼 아이들이 없는 한적한 병원 주차장 차 안에서 둘 다 짐승같은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아이의 뇌혈관은 이미 많이 부풀어 올랐고, 터질 확률은 100%, 한 해에 가능성은 10% 씩 올라간다. 이런 아이가 아직 증상이 없었다는 건 교과서에 나올만한 특이 케이스라고. 이 이후의 이야기들은 누군가 나에게 하는 협박처럼 들렸다. 나는 울음으로 의사의 입을 막았다.
아이가 수술을 받고 회복을 하는 동안 나는 휴직을 했다. 기운이 없어서 뭘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반년동안은 그저 불안한 채로 아이의 약을 열심히 챙겼다. 나머지 반년을 보내던 중 동네 도서관에서 하던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다. 쫒기듯이,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그리고 누구라도 잡고 뭐라도 얘기하고 싶어서.
기다렸던 마흔에 불행이 손을 잡고 왔다. 나는 한껏 얻어맞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중이다. 불행의 크기를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지나고 보니 내 불행은 크지 않았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모두들 잘 회복해주어서... 그럼에도 나는 내 생각보다 허약한 사람이었는지 기운을 차리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버틸 무기가 하나 생겼다. 나는 쓸 수 있다. 누가 읽어주지 않아도, 훗날 내가 나를 걱정해주고, 내가 노력했다는 것을 알아 줄 것이다. 내가 빛났던 어떤 날을 기억해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어땠더라. 18년을 다닌 회사를 내손으로 그만두고, 스타트업으로 옮겼다. 1년동안 재미나게 일했고, 회사는 사업을 접으면서 이직을 권고했다. 나는 다시 이직을 했고, 아직도 적응하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그 해 최고령 신규입사자였는데, 남들도 눈치 챘을라나. 큰 딸은 그 사이 사춘기를 앓았다. 하루는 법륜스님 유튜브를 보고 마음을 가라 앉히고, 하루는 육탄전을 벌이고를 반복했다. 이제는 아이 전두엽 공사도 끝나가는 듯 하다.
내가 현명하게 잘하고 있느냐 하면 그건 자신이 없다. 여전히 요리도 못하고 살림은 일에 밀려 뒷전이다. 자꾸 주변을 힐끔거리면서 비교하고, 그때 이걸 살껄, 이걸 투자할껄, 오늘도 껄껄껄을 외치면서 되는 대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 대출을 다 갚은 뒤로는 '회사 때려칠까'를 주문처럼 외우면서 하루 하루 버티는 중이다.
그래도 사십대를 반도 넘게 보내버린 지금은 마흔하나였던 그 때 쓴 일기를 꺼내놓고 이야기 할 마음이 생겼다. 앞으로 나에게 생기는 일들도 차분히 써나갈 생각이다. 이거면 된 것 같다.
연재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