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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Apr 24. 2023

밥뭇나?

" 아재, 나오셨는교?

아침은 잡샀습니꺼? "


내가 자란 고향은 완전한 시골마을이었다.

밤이 되어도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은 오지 중에 오지~


40여 가구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전부 같은 姓, 같은 本을 쓰는 집성촌이었다.


항렬을 잘 몰랐던 그때의 나는 집을 나서 만난 어른들에게 무조건 아재라 호칭을 하였고 무조건 식사여부를 물었다.


" 오냐

니도 밥뭇제? "

내가 인사한 그 아재도 나에게 밥을 먹었는지 여부를 물으면서 내 인사에 답을 하셨다.


어쩌면 인사말로 하였던 아재와 나의 밥 먹었느냐의 서로 간의 안부에는 실제 밥을 먹었는지 여부를 물은 것이었다.


아침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아침밥을 못 먹은 사람들이 40여 가구 일가들 중에 몇 가구가 실제 하였다.

그들은 작은 바가지 하나를 들고 그래도 논과 밭이 조금 있는, 조금은 여유가 있는  집으로 가서 아침 요기거리로 밥과 반찬을 빌려갔다.


그때 밥을 빌린 사람도, 빌려주는 사람도 그 밥이 나중에 형편이 될 때 갚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고 그저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빌려 온 밥으로 그렇게 근근이 요기를 한 그 친구는 학교에서는 씩씩하고 활발한 아이였다.

밥을 얻어먹고 다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자신을 그렇게 만든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가정형편을 조사하였다.

'집에 라디오 있는 사람'

40명이 훨씬 넘는 학급에 한 두 명이 손을 들었다.


'집에 자전거 있는 사람'

이번에도 한 두 명이 손을 들었다.


손을 들지 않은 아이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하지 않았다.

당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위축되지도 않았다.


지금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밥을 굶고 집에 라디오, 자전거가 없는 아이가 학급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하였다.


나의 가난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아도 되었던 것 같다.


요즈음의 나는 자주 세상에 뒤처지는 것을 느낀다.

나보다 아파트 평수가 넓은 친구와 점심을 먹을 때, 나보다 자식들이 더 잘되어 있는 친구와 커피를 마실 때, 나보다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모임장소에 나타난 친구를 보았을 때 나는 조금은 위축이 되고 그들이 조금은 부러워진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나 혼자 나를 달래고, 아니라고 부정도 해보고, 나보다 더 못한 친구들도 많다고 자위도 해보지만 어쨌든 솔직한 내 가슴은 허하고 살짝은 서글퍼졌다.


왜일까?

세상물정 하나 몰랐을 어렸을 적에 없었던 그 자격지심이 왜 지천명의 나이를 지나 이순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에사 생겨났을까?

그때 집에 라디오, 자전거의 존재를 물으신 선생님 앞에서 한 번도 손을 들지 못하였을 때도 느끼지 못하였던 타인에 대한 부러움이 지금에사 생겨났을까?


내 욕심이었다.

내 어리석음이었다.


나를 나로 보지 않고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은행에 다녔을 때가 생각이 난다.

은행은 매년 새해가 되면 1년 동안 성장을 해야 할 각 지표별 목표가 본부로부터 내려온다.

예금증가 목표, 대출증가 목표, 퇴직연금달성 목표, 이익달성 목표 등............


그 목표의 구성요소는 크게 절대평가와 상대평가로 구분이 되어 내려오는데 절대평가는 주어진 목표만 달성하면 되는 구조이다.

예를 들어 예금증가목표가 50억 원이면 전년도 말 보다 50억 원만 증가시키면 그만이다.

그것으로 만점을 받는 구조였다.

다른 지점 눈치를 볼 이유가 하나도 없는 목표인 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평가였다.

우리 지점이 증가목표 50억 원을 전부 달성하였다고 해도 다른 지점이 51억 원을 달성해 버리면 우리는 그 지점보다 뒤지는 구조의 평가방식이었다.


늘 다른 지점을 의식해야 되는 피곤한 평가방식

상대평가


퇴직을 하고 6년이 훨씬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 상대평가의 잔재를 떨치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나의 지금 마음이 행복하면 될 것을 나는 아직도 남이 가진 것을 힐끗거리며 살아온 것 같다.


끼니를 채우지 못해도 마냥 행복했던 까까머리 그때가 그립다.

그때의 나는 내가 행복하고 내가 만족하면 되었을 나만의 절대평가 시스템 때였다. 


나는 얼마나 더 살아야 나를 온전한 나로 볼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더 살아야 내가 가진 작은 것에 만족하며 행복해할까?


내가 나에게 묻는다.

" 00야, 밥 뭇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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