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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Sep 23. 2024

마라톤을 나가자고요?

5km 마라톤을 도전하다

기원전 6세기. 동양과 서양이 최초로 맞붙는다. 동양의 대표는 서아시아를 평정한 페르시아 제국. 서양의 대표는 아테나, 스파르타 등 여러 도시 국가들이 발달한 그리스. 당시 페르시아는 엄청난 대제국이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비하면 한 줌의 흙이었다. 페르시아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려 한다. 그리스군은 두려움에 떨며 페르시아군을 기다린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페르시아 함대는 강한 폭풍을 이기지 못하고 전멸한다. 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이렇게 싱겁게 끝난다.      



페르시아는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함대를 모은다. 그리스의 수많은 섬을 정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아테네와 아주 가까운 마라톤에 도착한다. 페르시아군의 규모는 약 7만 명이었다. 아테네군의 사령관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이 마라톤으로 상륙할 것을 예측한다. 아테네에 있던 병력 대부분을 마라톤으로 데려온다. 그 수는 단 1만 명. 페르시아군에 상대가 안 되는 숫자였다. 하지만 아테네군의 사령관 ‘밀티아데스’의 뛰어난 전략과 아테네인들의 투지 덕분에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다.      



‘밀티아데스’는 승리를 자축한 새가 없었다. 그는 페르시아군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아테네 쪽으로 방향을 돌렸음을 간파한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해로는 육로보다 멀었다. ‘밀티아데스’는 전령에게 당장 육로로 달려가서 아테네인들에게 경고하라고 말한다. 전령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죽을힘을 다해 달려간다. 아테네에 도착한 전령은 말한다. 

“우리 그리스가 이겼다! 곧 그리스군이 아테네를 지키러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라!”

그리곤 그 전령은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그 전령이 달린 거리는 42.195km. 이후 우린 42.195km라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달리는 육상 종목을 ‘마라톤’이라고 부른다.      




몇년 전 크로스핏을 배운 적이 있다. 크로스핏은 여러 가지 고강도 기능성 운동을 섞어 수행하는 운동이다. 한 마디로 엄청나게 힘든 운동이다. 그래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몇 달 다니지도 않고 그만둔 크로스핏 체육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크로스핏을 함께 다니던 회원분들과 난생처음 마라톤 대회를 나간 일이다.      



어느 날 크로스핏 체육관에 도착하자마자 코치님께서 물으셨다. 

"비오님 혹시 마라톤 좋아하세요?"

질문이 잘못되었다. 마라톤을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좋아하는가?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마라톤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요."

코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10월 29일에 송도국제마라톤 대회 저희 회원분들이랑 같이 나가보실래요?"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회원님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거들었다. 

"5km밖에 안 뛰어요! 별일 없으면 같이 해요!"

얼떨결에 마라톤을 나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10월 29일. 별일이 없기도 했다. 나는 무엇인가 홀린 듯 대답했다. 

"네. 나가보겠습니다."     



사실 마라톤을 나가보고 싶었다. 1년 전쯤에 달리기를 즐겼다. 당시는 주로 3km 정도를 달렸다. 가끔 위대한 도전을 하고 싶은 날 5km를 달렸다. 그렇게 조금씩 달릴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마라톤에도 관심이 생겼다. 마라톤 대회가 없나 찾아봤지만, 코로나19가 세상을 잠식한 시기인지라 비대면 마라톤뿐이었다. '마라톤을 어떻게 비대면으로 할 수 있지?' 궁금했다. 확인해보니 마라톤 주최사에서 주는 칩을 끼우고 정해진 코스를 그냥 혼자서 뛰는 것이었다. 마라톤이 끝나면 자신의 기록을 주최사에 보내주기만 하면 된다. 모두가 함께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리는 그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는데 혼자서 뛰어야 한다니. 이게 마라톤이 맞나 싶어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그 후로 날씨가 더워지자 달리기에도 흥미가 떨어졌다. 그렇게 마라톤을 해보겠다는 꿈을 잊고 살았는데, 우연하게 다시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인생 첫 마라톤을 하는 날. 5km밖에 되지 않는 단축 마라톤이었지만, 인생 첫 마라톤이라고 생각하니 설렜다. 난관도 있었다. 전날 술자리가 있었다. 인생 첫 마라톤을 망치지 않기 위해 조금만 마시겠다는 다짐을 하며 갔다. 술을 조금만 마시는 것은 나에게는 어쩌면 마라톤보다 더 힘든 도전이었다. 그래도 평소보단 훨씬 조금 마셨지만, 부작용으로 다른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다. 집에 돌아오니 배가 터질 듯했다. 조금 후회가 되었다. 

'이 상태로 내일 뛸 수 있을까. 내일 8시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일어날 수는 있을까….'     



다행히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어디 가지 않았다. 6시쯤에 눈이 떠졌다. 배가 더부룩했고, 술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냥 한숨 더 자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샤워를 했다. 씻고 나니 조금 기운이 생겼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아직 누워있는 아내에게 얼른 갔다 오겠다고 했다. 나도 다시 침대에 드러눕고 싶었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5km는 껌이지. 금방이야. 얼른 하고 다시 자자.‘     



송도국제마라톤이 열리는 인천대학교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구나.' 싶었다. 벌써 트랙을 뛰고 계시는 분들도 많았다. 분명 9시에 시작한다고 했는데, 저분들은 왜 벌써 뛰고 계시는 걸까? 나 같은 애송이는 알지 못하는 고수들만의 루틴인가? 한 가지 놀라웠던 점은 마라톤 대회가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축제였다는 점이다. 마라토너들이 입는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트랙을 뛰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은 너무나 멋졌다. 달리기는 평생 할 수 있는 좋은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크로스핏 체육관 부스로 가서 번호판을 받았다. 도착한 다른 회원분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나처럼 첫 마라톤이신 분들이 많았다. 내가 느끼는 설렘을 그들도 느끼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새로운 러닝화를 준비하신 분도 계셨고, 첫 마라톤을 기념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사진을 남기시는 분도 계셨다.      

9시가 가까워지자 방송이 나왔다. 

"5km 마라톤 참가자분들은 출발선으로 이동해주세요!"

크로스핏 회원분들과 운동장에서 마지막 사진을 남긴 후에 출발선으로 향했다. 손에 휴대폰을 들고 가다가 문득 방해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는 분께 여쭤보았다. 

"혹시 휴대폰 챙기셨나요?"

"아니요. 저는 가방에 넣어두고 왔어요."

나도 두고 와야 하나 고민하던 중 다른 분께서 말씀하셨다. 

"두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주저 없이 부스로 뛰어간 후에 가방에 휴대폰을 넣었다. 잠시 후 이 행동을 매우 후회하게 된다.      



출발선은 꽤 멀었다. 가는 동안 다른 회원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마라톤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때 한 분이 말씀하셨다. 

"5km는 기록도 따로 측정 안 해준대요. 그래도 돈 내고 뛰는 건데 너무하지 않아요?"

기록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너무한 것 같았다. 아무리 못 뛰더라도 첫 마라톤인데. 갑자기 기록을 재고 싶었다. 그때 휴대폰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당시 나에겐 스마트 워치 따윈 없었다. 나이키 런 클럽이라도 켜놓고 뛰면 몇 분 만에 도착 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내 인생 첫 마라톤 기록을 남길 수 있을 텐데. 옆에 계신 다른 회원 분께 물었다. 

"혹시 휴대폰으로 기록 측정하실 건가요?"

"네! 여기서 안 해준다니 스스로 해야죠."

그분을 따라가면 대충이라도 기록을 알 수 있겠다 싶어 구차한 부탁을 드렸다. 

"제가 휴대폰을 두고 와서 같이 좀 뛰어도 될까요? 그냥 원래대로 뛰시면 알아서 따라가겠습니다. 너무 빠르시면 제가 그냥 포기할 테니 그냥 버리고 가셔도 괜찮아요."

부담스러운 부탁에도 그분은 웃으며 대답해주셨다. 

"네! 같이 뛰면 좋죠."     



출발선에 가까워지자 점점 실감이 났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과 함께 뛸 생각을 하니 설렜다. '도대체 몇 명이 참석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나는 몇 등을 할 수 있을까? 달리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았구나' 생각하다 보니 출발선에 도착했다. 모두 함께 카운트 다운을 하고 내 인생 첫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처음 1km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내가 지금 마라톤을 하는지 사람 피하기를 하는지 헷갈렸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함께 뛰기로 약속했던 분을 잃어버릴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분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려 애쓰며 뛰었다. 1km 구간을 지나자 사람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함께 뛰던 분과 이제 나란히 뛸 수 있게 되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 피하면서 뛰다 보니 200m는 더 뛴 것 같네요."

공감하며 대답했다.

"그러니까요. 이제 조금 사람들이 없어서 좋네요."     



아직 반환점이 보이지도 않는데, 벌써 반환점을 지나 반대편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달리는 자세, 속도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그분들을 보니 조금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환점을 돌고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함께 뛰던 분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볼 힘도 없어 그냥 앞만 보고 뛰었다. 멈추지 않고 뛰다 보니 한 명씩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기분이 좋았다. 계속해서 앞에 보이는 사람을 따라잡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뛰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결승점이 저 멀리 보였다.      



결승점에 도착하자 진행자분께서 격려를 해주셨다. 진짜 마라톤 경기처럼 수십 개의 생수병이 놓인 테이블도 있었다. 그곳에서 생수 한 병을 집어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뒤를 돌아 다른 회원분들을 기다렸다. 곧이어 처음에 함께 뛰던 분께서 들어오셨다. 

"잘 뛰시네요. 마지막에 너무 빠르셔서 못 따라갔어요!"

'나 혹시 빠를지도?'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록이 궁금해졌다. 

"혹시 기록 몇 분 나오셨어요?"

그분께서는 휴대폰을 확인하시고 알려주셨다. 

"저는 25분 나왔네요. 비오님은 그럼 24분쯤 되실 것 같아요."

내 인생 첫 마라톤 기록은 그렇게 어림잡아 정해졌다.      



크로스핏 회원분들이 모두 도착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다시 인천대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가니 간식 봉지와 완주 메달을 주셨다. 간식 봉지에는 꿀 호떡, 사과파이, 포카리스웨트가 들어있었다. 부스로 돌아가 사과파이 하나를 먹으며 메달을 꺼내 보았다. '완주를 축하합니다'라는 문구를 보니 뿌듯했다.      



인생 첫 마라톤은 그렇게 끝났다. 달리기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하루였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휴대폰 메모에 이렇게 기록했다. 

‘비록 오늘은 5km 코스를 뛰었지만, 다음에는 10km, 그다음에는 하프 마라톤까지 도전해보고 싶다.’    


 



2년 뒤, 그 메모는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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