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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Sep 24. 2024

잊고 있던 10km 마라톤

끝까지 달릴 수 있을까?

2022년 10월. 내가 한 달 동안 달린 거리는 딱 15km였다. 5km씩 세 번 달린 게 다였다. 2022년 10월 29일. 난생 첫 5km 마라톤을 마쳤다. 그날 이후 달리기가 재밌어졌다. 시간 날 때마다 공원에 나가 달렸다. 2022년 11월 마지막 날 달리기 어플을 확인해보았다. 나는 한 달 동안 95km를 달렸다. 한 달 전보다 달린 거리가 6배 이상 늘어났다. 5km만 더 뛰었다면 100km를 달성했을 텐데…. 아쉬웠다.   



이제 막 달리기에 재미를 붙였을 때, 난관이 찾아왔다. 그 어떤 군대보다 무서운 동장군(冬將軍)이었다. 11월 말이 되자 조금씩 쌀쌀해졌다. 달리기는커녕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얼어죽겠는데 달리기는 무슨. 방구석에 따뜻하게 누워 유튜브를 보는 게 가장 행복했다. 그때, 유튜브에서 마치 나를 저격하는 듯한 제목의 영상을 보았다.      

올겨울달리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


     

‘마라닉TV’라는 유튜브 채널이었다. 채널의 주인 ‘해피러너 올레’님께서는 달리기의 즐거움을 수많은 이들에게 설파하신 분이다. ‘마라닉 페이스’라는 책을 쓰시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달리고 싶게 만들고 계시다. ‘올레’님께서는 추운 겨울 달리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공감해주셨다. 그럼에도 달리기를 하고 난 뒤 성취감을 강조하시며, 함께 뛰길 권유하셨다. 그는 권유로만 끝내지 않았다. 행동을 유도했다. 100일 동안 함께 달리며 서로를 응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리고 100일 뒤. 그동안 열심히 달렸던 모두가 동아 마라톤을 완주하는 기쁨을 누린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게 바로 올레님께서 만든 ‘동마 프렌즈’라는 프로그램이다. 동아 마라톤과 마라닉프렌즈를 합친 말이다.      



영상을 보고 의지가 불타올랐다. ‘추운 겨울이라고 이렇게 누워있을 수만은 없어. 계속 이렇게 지내다간 바닥에 붙어버리고 말 거야. 얼어붙지 않으려면 움직여야 해. 그래. 달리자!’. 바로 마라닉프렌즈를 신청했다. 곧이어 동아 마라톤 10km도 신청했다.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중단했던 달리기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나가 10km를 달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동마 프렌즈는 온라인 인증 프로그램이다. 내가 달린 거리를 sns에 일주일에 3번 이상 올리면 된다. 이를 위해 인스타그램 달리기 계정도 새로 만들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달리기만 하면 된다. 나는 100일 뒤 동아 마라톤 10km를 완주할거다!     



12월 1일 비장한 마음으로 5km를 달렸다. 달리다 보니 추위는 금세 사그라들었지만, 손이 너무 시렸다.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장갑이 필요했다. 다음 날 바로 장갑을 사고 다시 달렸다. 하지만 겨울의 추위는 만만치 않았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은 시리다 못해 아팠다. 장갑을 껴도 손가락 끝이 아려왔다. 결국 장갑을 낀 채 주먹을 쥐고 달렸다. 하루 하루 지날수록 이렇게까지 달려야되나 싶었다. 이러다 감기 걸린다며 달리기를 멈췄다. 추운 겨울을 피해 필리핀 세부로 갔다. 신나게 물놀이를 하며 놀다가 달리기 생각이 났다. 러닝화를 신고 리조트 한 바퀴를 달렸다. 3km를 달리고 나니,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세부는 너무 더웠다. 한국에선 추워서 필리핀에선 더워서 달리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기와 점점 멀어졌다. 야심 차게 만들었던 인스타그램 달리기 계정엔 더 이상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가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퇴근하고 집에 오자 문 앞에 택배 상자가 있었다. 주문한 게 없는데 잘못왔나 싶었지만, 택배엔 분명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열어보니, 까만 티셔츠와 배번표가 들어있었다. 갑자기 머릿 속에 기억이 선명해졌다. ‘아! 나 마라톤 신청했지!’. 큰일이었다. 겨우내 달리지 않았다. 100일 동안 함께 달리겠다는 동마 프렌즈와 약속은 이미 잊었다. 동아 마라톤은 2주도 남지 않았다. 급하게 러닝 벼락치기를 했다. 너무 오랜만에 달리니 5km도 힘들었다. 결국 10km는 달려보지도 못 한 체, 동아 마라톤 날이 다가왔다.    


 

동아 마라톤은 우리나라 최고 마라톤 중 하나다. 서울 도심 한복판을 달릴 수 있는 흔치 않은 마라톤이다. 동아일보에서 주관하는 동아 마라톤, jtbc에서 주관하는 jtbc마라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춘천 마라톤을 우리나라 3대 마라톤이라고 부른다. 동아 마라톤은 그중에서도 역사가 깊고 코스가 좋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그동안 코로나19 열리지 못했고, 무려 4년 만에 열리는 마라톤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땐 동아 마라톤의 위상을 알지 못했다. 그저 수많은 마라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전날까지도 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했다. 내가 지금 10km를 뛸 수 있나가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이미 냈던 참가비가 아까워서였다. 뛰다가 힘들면 천천히라도 들어오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동아마라톤 10km 출발지는 올림픽 공원이었다. 올림픽 공원은 아침 일찍부터 사람이 많았다. 달리려고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니 나도 설레었다. 오늘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나갔던 송도 마라톤보다 규모도 훨씬 컸고, 사람도 훨씬 많았다. 짐을 맡기고, 몸을 간단히 푼 뒤 출발선에 섰다. 모두가 축제 분위기였다. 출발을 기다리는 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았다. 출발 시간이 되자 다함께 카운트 다운 했다. 3! 2! 1! 드디어 내 첫 10km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잘 달릴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평소보다 느리게 달리기로 마음 먹었다. 한 시간 이내로 들어온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분명 천천히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휴대폰 어플에서 페이스를 보니 생각보다 빨랐다. 즐거운 마라톤장의 분위기를 즐기다보니,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진 듯 했다. 촌놈인지라 내가 지금 달리는 곳이 어딘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지금 서울 한복판을 달리고 있다. 이런 경험을 언제 또 해보겠는가? 매순간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달리던 중 수많은 장면을 보았다. 달리지도 않는데 주로에 나와서 응원을 해주시는 분들은 정말 고마웠다. 그분들 덕분에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손목에 끈을 묶고 봉사자와 함께 뛰는 시각 장애인 러너분은 나보다 훨씬 빨랐다. 인간은 생각 이상으로 강한 존재라는 걸 몸소 보여주셨다. 언젠간 나도 손목에 저 끈을 묶고, 시각장애인 분들과 함께 달릴 수 있는 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내가 좀 더 빨라져야겠지. 좀 더 열심히 달려야겠지. 다른 주로에서 달리던 엘리트 선수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까만 피부에 쭉 뻗은 긴 다리를 가진 그들은 정말 자동차 같았다. 어린이 보호구역에선 그들이 달리는 걸 금지해야 할 정도로 빨랐다. 사람이 저렇게 빠를 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이런저런 풍경을 보며 달리니 힘들지가 않았다. 10km를 언제 다 뛰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거리가 줄어드는 게 안타까웠다. 10km가 너무 짧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은 거리를 최대한 즐기며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 결승점이 보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해주었다. 배번에 적힌 내 이름을 보고 외쳐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신나게 양팔을 들고 결승점에 들어왔다. 메달과 간식을 받았고, 기록을 확인했다. 50분 12초. 60분 안에 들어오는 게 목표였는데, 목표보다 10분이나 빨리 들어왔다. 이렇게 내 인생 첫 10km 마라톤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이제 난 10km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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