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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Sep 26. 2024

축하해요. 처음으로 10km 넘기셨네요.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그동안 나에게 가장 장거리의 기준은 10km였다. 그동안 나에게 빠른 달리기는 1km를 5분 이내의 속도로 달리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내 달리기의 목표는 1km당 5분 페이스로 10km를 달리는 것, 즉 10km를 50분 이내에 달리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얼마 전 jtbc 마라톤에서 이뤘다. 기쁨은 잠시였다. 얼마 가지 않아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나? 45분을 목표로 해야 하나? 굳이 그래야 하나? 이제 됐다. 마라톤은 이만하면 됐다.      



마침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달리지 않을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기는 추운 겨울에 할만한 운동이 아니었다. 매서운 바람을 얼굴에 얻어맞으며 달리는 기분은 결코 상쾌하지 않았다. 학교도 겨울 방학을 하는 것처럼, 달리기도 겨울엔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헬스장을 등록하고, 일주일 정도 가다가 말았다. 겨울엔 운동을 쉬고 겨울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에너지를 아끼던 그때, 송도러닝크루 단톡방에 전 크루장님께서 투표 공지를 올리셨다. 

훈련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봄 대회를 위한 훈련을 시작하려고 합니다이번 주 일요일 장거리 LSD 시간주(90~150하실 분 투표해주세요!”

LSD가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대충 오래 뛴다는 의미 같았다. 찾아보니 LSD는 Long Slow Distance의 약자로 천천히 긴 거리를 달리는 훈련을 뜻한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90분은 1시간 30분. 150분은 2시간 30분. 엥? 2시간 30분? 2시간 30분 동안 달린다고?’. 정말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궁금해졌다. ‘나는 몇 분을 달릴 수 있는 사람일까?’. 객기를 부렸다. 투표에 들어가 참가 버튼을 눌렀다. 잠시 흥미가 떨어졌던 달리기에 기대감이 생겼다. ‘훈련’이라는 단어가 기분 좋게 다가왔다. 내가 마치 운동선수가 된 느낌이었다.     



그날이 왔다. 설렘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생각해보니 90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10km를 천천히 달리면 약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90분을 달리면 적어도 15km를 달리는 것이다. ‘내가 미쳤지. 왜 그랬을까.’ 후회가 몰려왔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약속 장소인 센트럴 파크로 갔다. 다른 크루원들께서 미리 나와 준비하고 계셨다. 함께 마실 음료수를 준비하신 분, 에너지를 보충할 바나나를 준비하신 분, 음료수와 바나나, 종이컵을 올려둘 테이블을 준비하신 분. 다들 무엇인가를 준비해오셨다. 오직 나만 빈손으로 덜렁 몸만 왔다.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다음엔 나도 음료수라도 사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다음이 있으려나? 내가 오늘 뛰고 다시 뛸 마음이 생기려나….     



긴장된 상태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대부분 얼마 전 jtbc 마라톤에서 풀코스를 뛰신 분들이셨다. 그분들과 발맞추며 달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다시 한번 궁금해졌다. ‘나는 몇 km를 뛸 수 있는 사람일까?’. 여럿이 함께 발맞춰서 달리니, 혼자 뛸 때보다 힘이 났다. 달리다가 너무 힘들면 약속이 있는 척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끝까지 함께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때 옆에서 달리던 크루원께서 물으셨다. 

“몇 km까지 뛰어보셨어요?”

“아직까진 10km까지 안 달려봤네요.”

“오늘 그 기록 깨시겠네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대화는 끊겼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송도 센트럴 파크를 크게 한 바퀴 돌고, 바로 옆에 있는 워터프론트 호수 공원까지 한 바퀴를 돌고 나니 9km 정도가 되었다. 다시 송도 센트럴 파크로 돌아와 조금 더 달리니 스마트 워치에서 10km를 알리는 음성이 나왔다. 그때 옆에서 달리던 크루원분께서 침묵을 깨셨다. 

“처음으로 10km 넘기셨네요. 축하해요!”

조금 지친 탓에 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마음을 깊이 울렸다. ‘축하해요!’. 그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 한마디를 가슴에 품고 계속 달렸다. 그 어떤 음악보다 힘을 주는 말이었다.     



그날 나는 무려 2시간 33분을 달렸다. 총 25km를 달렸다. 태어나서 가장 많이 날렸다. 하프 마라톤보다 긴 거리였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축하해요’라는 말을 되뇌며 이를 악물고 달렸다. 달리기를 마치고 나니, 종아리가 딴딴해졌다. 조금만 방심하면 쥐가 날 것 같았다. 허벅지도 근육통이 느껴졌다. 집까지 어떻게 갈지도 막막했다. 내일은 월요일인데, 출근은 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지하철 계단을 엉거주춤하게 내려갔다. 그런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한동안 재미를 못 느꼈던 달리기가 다시 재미있어졌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 추운 겨울도 녹인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 매일 아이들을 마주하는 나는 이 사실이 가장 두렵다. 내가 말 한마디가 아이들에게 잘못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조심한다. 좋은 선생은 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쁜 선생은 되고 싶지 않으려 애쓰는데 쉽지가 않다. ‘축하해요!’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추운 겨울과 맞서서 달렸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가을보다 더 많은 거리를 달렸다. 달리기는 겨울 내내 이어졌다. 10km도 긴 거리라 느꼈던 내가 겨울이 지나자 10km는 가볍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막연한 꿈이었던 하프 마라톤은 충분히 해볼만한 도전이 되었다.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던 풀코스 마라톤도 아직 멀었지만, 아주 멀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은 ‘축하해요’라는 말 한마디에서 시작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라는 책에서 읽은 인상깊은 구절을 소개한다.      

146p. 저자는 북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그제야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당황하는 그녀 대신 현지인 할머니가 버스 요금을 내주었다나중에 갚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자기에게 갚을 필요 없다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나는 내가 받은 환대를 어떻게 세상에 돌려줄 것인가. 앞으로 남은 내 숙제다.

“처음으로 달리기를 시작한 모든 분,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거리를 달린 모든 분들, 저번 달보다 이번 달에 더 많은 거리를 달린 모든 분, 10km를 처음 완주한 모든 분, 하프 마라톤을 처음 완주한 모든 분, 첫 풀코스를 완주한 모든 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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