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엘렌에게 간단히 얘긴 들었습니다."
아이작이 테이블 위 주전자에서 조용히 차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우리를 말리려고 한다고요. 우리가 GU를 공격해선 안 된다고… 아마 당신은 상당한 평화주의자인가 보군요."
말투는 온화했지만, 노라는 그의 시선과 억양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느꼈다.
"저는… 전쟁을 막고 싶을 뿐입니다. 폭력으로는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으니까요."
노라가 조심스레 말하자, 아이작이 마치 예상했던 답이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답니까?"
아이작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노라가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아이작이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런 어설픈 감정호소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군요. 아시다시피, 세상은 그다지 이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총 대신 무엇을 든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대화를 요청하면… 저들이 응할 것 같습니까?"
느릿한 말투 속에도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왜 그가 이곳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의 말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도 이런 일을 원친 않습니다.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에겐 지푸라기 한 움큼도 절실한 법이죠. 지금 우리에게 그 지푸라기는, 바로… 저 여성분이 들고 온 ‘무기’입니다.
물론 공짜로 도와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 대가로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할 수 있어요. 바로 ‘안전’ 말입니다."
그가 ‘안전’이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하자, 노라는 그 속에 담긴 미묘한 압박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것은 언제든 그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경고처럼 들렸다.
하지만 노라와 칼리뮤도 아무런 준비 없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이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노라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그건 왜죠?"
아이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려면… 우선 '지구의 자녀'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 아이작의 눈빛이 서늘하게 날카로워졌다. 조금 전까지의 온화한 표정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노라… 제가 그걸 말해버리면, 정말로 당신들의 안전을 위협해야 할 수도 있어요."
아이작의 저음이 방 안을 가볍게 울렸다.
"칼리뮤가 가진 물건을 어떻게 쓰려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당신들을 도우려는 겁니다. 부디… 믿어주세요."
노라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아이작이 천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좋습니다. 단, 이야기할 수 있는 선까지만 말하죠."
그는 손을 깍지 낀 채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파악한 정보로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코어리움 반물질 폭탄입니다. 우리 연구진들의 계산에 따르면, 그것은 행성조차 파괴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죠.
우리는 그것으로 루나포트를 완전히 소멸할 계획입니다. GU의 군사력이 거의 모두 밀집된 곳이니만큼… 가장 확실한 무력화 수단이라 할 수 있죠."
아이작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일단, 여기까지가 제가 말할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아이작의 답변을 들은 노라는 잠시 칼리뮤를 바라보았다. 칼리뮤는 노라와 눈빛을 교환한 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라는 다시 아이작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 방식으론… 지구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아이작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 이유를 들어봅시다."
노라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차분히 말을 이었다.
"현재 로쉬의 탐사선 코라를 비롯한 GU 전투 함정들의 거의 대부분이 화성 궤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화성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배치겠죠.
이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루나포트를 무력화한다 해도, 그 함정들은 건재합니다."
"고작 함선 몇 척 정도야, 우리도 충분히 무력화할 수 있어요."
아이작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몇 척’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게 되는지,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하겠죠. 죽어가는 이들에게 그건 ‘고작 몇 척’이 아닙니다."
아이작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 대의를 위해선 희생이 불가피한 법입니다. 이 늙은이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그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지만, 노라는 멈추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요."
노라는 아이작의 눈을 곧게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루나포트에 대한 공격은… 태양계 전체의 여론을 한순간에 잃게 되는 일입니다."
아이작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였지만, 이번에는 노라의 말을 곱씹는 듯 시선을 잠시 아래로 떨구었다.
"계속해봐요…"
"루나포트는 단순한 기지가 아닙니다. 인류 전체의 기술 아카이브이자, 화성과 금성 거주민들의 핵심적인 생존 인프라와 보급망이 연결된 곳입니다.
그런 곳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화성과 금성의 거주민들의 생존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아이작이 낮게 말했다.
"그게 아니에요, 아이작. 생존이 위협받은 사람들이 그 증오의 화살을 어디로 돌릴지를 생각하셔야 해요."
아이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노라를 바라보며, 더 말해보라는 듯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노라는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마지막 결론을 꺼냈다.
"결국 루나포트를 공격한다는 건, 지구의 자녀를 무차별 대량살상 조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노라의 말이 조용히 공간에 가라앉자, 다시 한번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작은 오래 고민하듯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결국 우리는 살아남을 거예요. 외부의 평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의 어조는 이전처럼 단단하지 않았다.
노라의 말이 어디선가 분명하게 걸린 듯한, 묘한 흔들림이 노인의 눈빛에 스쳤다.
아이작이 아무 말 없자, 노라는 천천히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그들이 뭘 할 수 있냐고요? 그야, ‘지구의 자녀’를 적대하는 행위겠죠… GU와 함께요."
아이작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노라는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루나포트를 공격하게 되면, GU 지도부는 오히려 완벽한 반격 명분을 얻게 됩니다.
지금 GU는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예요. 부패, 억압, 실정(失政)… 그 모든 것 때문에 화성과 금성에서 사회 불만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지도부의 정당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죠."
노라는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아이작과 시선을 맞췄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노라의 그림자 때문에, 실내조차 한층 어두워진 듯 보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지구의 자녀가 루나포트를 폭파한다…?"
아이작의 턱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건 지도부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거예요.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지구의 생존자들은 은하 문명을 위협하는 테러 집단이다.’"
노라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한 문장으로, GU는 화성과 금성 전체를 다시 완전히 통합할 수 있어요. 달 연구기지, 금성 거주지, 화성 도시 정부… 모두 ‘비상계엄’이라는 이름으로 GU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그 어떤 반발도 없이, 자연스럽게요."
노라는 굽혔던 허리를 다시 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처음엔 지구가 승리할 수도 있어요. 단 한 번의 폭발로, 아주 짧은 평화를 얻을지도 모르죠."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천천히 아이작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다음은요? 모든 인류를 적으로 돌린 지구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아이작은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테이블 모서리를 눌러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깊은 주름 사이로 억눌린 감정이 스며 나오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낮고 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러면… 우리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시궁창 속의 쥐처럼, 이 삶을 그대로 이어가란 말인가요…?"
노라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아이작."
지휘실의 공기가 조용히 흔들렸다. 노라의 목소리엔 단단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우리 모두가 간과하고 있지만… 지구의 자녀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어요."
노라는 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 그 표정은 누구보다 진지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이 느끼게 될 감정."
그 말에 아이작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엘렌은 분명 아이작에게 노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그의 뜻대로 되길 바라지만…
그는 감성적인 이상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좋은 사람인 건 분명하지만, 지도자님께서 그의 말에 휘둘릴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엘렌에게서 들었던 그 평가가 아이작의 머릿속에서 조용히 재조정되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GU의 선전전에 진실이 묻힐 가능성은 고려해 봤는지 모르겠군요. 당신 말도 일리가 있지만… 지금으로선 반물질 폭탄만큼 빠르고 명확한 수단은 없어 보입니다.
혹시, 더 할 말이 남았나요?"
아이작의 목소리는 여전히 의구심으로 가득했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긴장으로 조여들던 지도자실의 공기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제 더 이상 노라를 ‘감성적인 이상주의자’로만 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노라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