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둔탁한 기계음을 내며 철문이 열리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고 어둑한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천장에 달린 전등들은 간신히 깜빡이며 빛을 내고 있었지만, 넓은 복도의 윤곽을 겨우 흐릿하게 비출 뿐이었다.
“항상 전력이 부족해요. 대규모 발전시설은 GU에게 포착당하기 쉬우니까요.”
엘렌이 깜빡거리는 전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복도엔 수많은 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만, 우리는 어느 문에도 들어가지 않고 끝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 다다르자 차갑던 금속벽이 사라지고, 하얀 바위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밑으로 느껴지는 석회석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이 신발 너머로 전해졌다.
“석회동굴이군요…”
내가 천장과 바닥을 잇는 기다란 종유석들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우리가 지나온 복도보다 오히려 밝았다. 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조명은 복도의 그것처럼 희미했지만, 수십 미터 위 천장에는 커다란 원형의 자연 채광구가 있었다. 덩굴들 사이로 은빛 햇살이 쏟아져 내려와 동굴 한가운데를 밝히고 있었다. 그 빛이 닿는 자리엔 초록색 이끼가 두텁게 깔려 있었고, 작은 나무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자라고 있었다.
지하수는 어디론가 흘러가는 작은 계곡처럼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석회석을 다듬어 만든 듯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였다. 누군가는 지하수를 퍼서 집으로 가져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집 앞 작은 의자에 기대 쉬고 있었다. 그 사이를 어린아이들이 도랑을 뛰어넘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동굴의 울림과 뒤섞여 묘하게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생존자들을 품고 있는 곳이에요. 우리 활동의 중추이기도 하고요. ‘에그리나’에 온 걸 환영해요.”
엘렌이 발밑의 지하수에 손수건을 담갔다 꺼내며 말했다. 그리고 물을 적신 손수건으로 얼굴의 검은 위장 크림을 닦아냈다.
엘렌의 얼굴이 드러나자마자, 도랑을 건너며 놀던 아이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엘렌! 엘렌이 왔어!”
“엘렌! 이거 봐요! 우리가 뭘 만들었는지 봐요!”
아이들 중 한 명이 금방이라도 자랑하고 싶다는 듯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내밀었다.
얇은 끈과 작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조그마한 인형이었다.
“이게 뭐니?”
엘렌이 물었다.
“말이에요! 엘렌이 저번에 보여줬던 동물!”
아이가 인형의 다리를 까닥이며 말했다.
“정말 멋진걸?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아.”
엘렌이 환하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말에 신난 아이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엘렌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냈다.
"저는 저들을 지켜줘야만 해요."
엘렌이 꺄르륵 웃으며 돌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려면 힘이 필요하고요."
그러고는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곳을 먼저 보여주려던 이유가 있었군요."
노라가 낮게 말했다.
엘렌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보는 게 듣는 것보다 빠르고, 이성보다는 감성이 사람을 움직여요."
나는 말없이 그녀와 뛰어노는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렌의 방식은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노라의 눈빛은 단단했다. 오히려 더 굳어져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전쟁이에요. 맞죠?”
노라가 물었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을 그렇게 부른다면야, 맞아요. 우리는 반격을 준비하고 있어요.”
엘렌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서 묘한 결의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와줄 수 없어요.”
노라의 말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자 엘렌은 피식, 코웃음을 치듯 미소 지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노라. 당신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 줄 알고 있는 모양인데… 당신은 우리에게도, GU에게도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에요.”
노라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녀의 말이 정확히 어디를 건드렸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노라는 정곡을 찔린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엘렌은 이번엔 내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지금 전쟁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쟁점은 바로 이분, 칼리뮤죠. 이방인이자, 게임 체인저. 제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건 당신이 아니라 칼리뮤예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노라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내 입장도 노라와 같아요. 당신들을 도울 수 없어요.”
“물론 그렇겠죠.”
엘렌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어요. 당신들이 이곳에 들어온 이상, 이제 ‘허락’은 필요 없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시선이 칼리뮤의 등 뒤, 금속 캡슐로 옮겨갔다.
“여긴 우리 집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원한다면 언제든… 그 물건을 당신들에게서 가져갈 수 있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리고 엘렌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조용히 경계로 바뀌었다.
"내 도움 없이, 당신들은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없어요."
나는 허리춤의 파우치를 뒤적이며 말했다. 지금 당장 꺼낼 수 있는 건 SWG 뿐이었지만, 필요하다면 엘렌의 숨을 끊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도, 엘렌은 이상하리만큼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동굴 안의 작은 집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린 GU와 달라요.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겠어요. 학대받았다고 해서 누군가를 학대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죠. 폭력을 폭력으로 갚아봤자 남는 건 끝없는 증오의 사슬뿐일 테고요. 그러니 강제로 그 물건을 빼앗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할 만큼 차분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제 윗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죠."
엘렌은 살짝 뒤돌아 우리를 힐끗 보며 덧붙였다.
"제가 그들을 설득해 볼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일어나선 안 돼요."
노라가 말했다.
그러자 엘렌은 또다시 코웃음을 치듯 웃었다.
"우린 이미 전쟁 중이에요, 노라. 그리고 당신이 무슨 힘으로 그걸 막죠? 당신이 설득해야 하는 건 우리 지도부가 아니라, 지구에 살아남은 모든 인류예요. 그들의 증오와 복수심을 전부 없앨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라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이내 다시 고개를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기회를 주세요. 자리를 만들어 준다면… 나와 칼리뮤가 어떻게든 설득해 볼게요."
엘렌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노라를 곁눈질하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해내리라 믿진 않아요. 하지만… 자리 정도는 만들어 볼게요."
"고마워요, 엘렌."
"감사는 당신들 물건을 빼앗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면… 그때 하세요."
엘렌은 말을 마치고 손짓하며 앞장섰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지하수 계곡 위의 작은 다리를 건너, 석회 벽을 깎아 만든 듯한 작은 집 앞에 도착했다.
"우선 여기서 머무르세요. 며칠간 지내기에 부족함은 없을 거예요."
그녀는 문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열린 문틈에서 은은한 주광색 조명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그녀는 발길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다시 돌렸다.
"진짜 평화를 원한다면, 희생을 피할 순 없어요. 그리고 이번엔… GU와 그들의 추종자들이 희생당할 차례예요. 부디 잘 고민해 봐요. 어떻게 그들을 설득할지."
엘렌은 마지막으로 노라를 바라보고 말한 뒤, 우리가 들어왔던 어두운 복도를 향해 천천히 걸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