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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ac

# 61

by 더블윤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https://brunch.co.kr/@6121f01a108340c/79




Boy's


엘렌의 발자국 소리가 복도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남은 것은 은근하게 눌러오는 정적뿐이었다. 지하수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낮은 웅성거림이 이 공간을 겨우 메우고 있었다.
나는 문가에 멈춰 서서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제야 등 뒤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노라…”
칼리뮤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긴장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눈빛. 방금 전 엘렌의 말이 마음속 어딘가에 무겁게 남아 있는 듯한 표정.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나에게서 그러한 표정을 보았나 보다.

“괜찮아요?”
그녀가 먼저 물었다.

“괜찮아요. 다만…”
나는 시선을 돌려 에그리나의 넓은 동굴을 바라보았다.
“전… 정말 바보였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요.”

“갑자기 왜요?”
칼리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 폭력과 상실의 시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이상적인 꿈만 꾸며 살아왔으니까요…”

동굴 안은 따뜻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사람들은 분명 평온해 보였다. 아이들의 웃음이 섞인, 위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의 소리.
그러나 그 뒤편에서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싸우는 자들의 숨죽인 긴장이 숨어 있었다.

“… 많은 이들이 이런 현실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왔어요. 그러니 당신은 바보가 아니에요.”
칼리뮤가 위로하듯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엘렌의 말이 맞아요. 이들에게 전쟁은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르죠. 그들에겐 어떤 감정적 호소보다 ‘현실적인 돌파구’가 필요해요. 그리고 지금 그 돌파구가… 전쟁인 거죠.”
그녀의 말은 불편할 만큼 정확한 진실이었다.

“제 생각엔 그들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노라. 여차하면 여기서 도망쳐야 할 수도 있어요.”
칼리뮤가 등뒤의 캡슐을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나는 조용히 의자에 걸터앉아 머리를 싸맸다. 칼리뮤는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길에는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다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나는 저절로 그녀의 손등 위에 내 손을 포개었다.
나와 칼리뮤, 이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 이해는 연결이었고, 연결은 곧 공감이 되었다.

“지구의 자녀와 GU…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기를 바라는 건 역시 불가능하겠죠.”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칼리뮤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당연한 대답을 나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듯, 조용히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였다.
설득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머릿속에는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도 보이지 않았다. 전쟁을 멈추고 싶다는 말은 결국, 지구의 사람들더러 “얌전히 죽음을 맞이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GU와 지구는 결코 이어질 수 없는 길을 걸었다. GU는 지구를 버린 자들이 되었고, 심지어는 지구를 잊기로 마음먹었다. 반면 지구의 자녀들은 그러한 압력 아래에서도 자신들의 존재를 외치며, GU의 몰락을 꾀하고 있다.
이것이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터져 나오려 하는 중이다. 이것이 외면하고 싶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분명한 진실이었다.

“진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나는 떠오르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혼잣말을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개처럼 스쳤다.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칼리뮤를 올려다보았다. 칼리뮤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들을 설득할 현실적인 논리…”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다음 날 아침, 문밖에서 짧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선잠을 쫓아내며 문을 열자, 그곳엔 엘렌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준비됐나요?”
엘렌의 목소리는 어제와 달리 한층 차분했다.
“지도자님께서 두 분을 만나고 싶어 하세요. 바로 지금요.”

나는 잠시 칼리뮤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이미 깨어 있었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간단하게 정돈을 마친 뒤 엘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동굴 내부의 공기는 아침 특유의 서늘함을 머금고 있었고,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는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석회석 벽면에 스며든 습기 냄새, 지하수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흙의 향기… 이런 감각은 오르비트에선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엘렌은 우리가 걸어가는 동안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길게 뻗은 지하 통로를 지나며 필요한 구역마다 카드키를 가져다 댔고, 철문과 방호문이 연속해서 열렸다.
꼬불꼬불한 통로 끝, 양옆에 푸른 이끼가 자란 벽 사이로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도착했어요.”
엘렌이 그렇게 말한 뒤, 나무로 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에서 낮고 안정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엘렌은 나와 칼리뮤에게 따라 들어오라는 손짓을 건넸다. 그녀는 손잡이를 가볍게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도자실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처음엔 코라의 함장실과 비슷한 느낌을 상상했었지만, 그곳에서 보았던 절제된 회색빛 금속의 방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곳은… 마치 오래된 서고나 박물관 같았다.
벽을 따라 길게 뻗은 나무 선반에는 오래된 정착민들의 기록물들이 정렬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짙은 녹색의 러그가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공기였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 가득 풀냄새와 젖은 흙냄새, 물이 증발하며 남긴 향이 조용히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 향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안정되는 느낌마저 있었다.
그리고 방 중앙, 나무로 만든 책상 뒤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은빛이 완전히 다 빠져버린 백발, 햇빛을 오래 견뎌온 듯한 깊은 주름,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눈빛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뚜렷했다.

“반가워요.”
노인은 조용히 말하며 두 손으로 내손을 붙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나는 아이작이라 하요. 오세아니아 지역의 지구의 자녀 지도자직을 맡고 있죠."

이번에는 칼리뮤를 향해 인사하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정말 반갑습니다, 외부에서 오신 분. 온 인류를 대표하기엔 너무나 늙은 몸이지만, 지구 위의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태양계를 찾아온 당신을 환영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요."

그리고 그는 엘렌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수고 많았네, 엘렌. 항상 고맙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엘렌이 살짝 미소 지으며 짧게 답했다.

아이작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면, 이 두 사람과 이야기를 조금 나눌 테니 내게 자리를 허락해 주겠나?”

엘렌은 잠시 나와 칼리뮤를 스쳐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아이작.”

문이 닫히고, 조용한 공간에 우리 셋만 남았다. 아이작은 우리를 천천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은 오래된 나무처럼 깊고 단단했으며, 묘하게 모든 걸 꿰뚫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자, 이제…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는 우리를 작은 소파 쪽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오래된 지혜를 가진 이의 그것처럼 잔잔했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목적과 분별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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