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 숲에 울리는 현의 노래

by 이채이

서늘한 바람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살촉처럼 뾰쪽한 나뭇잎들이 검푸른 물결로 흔들리면서, 고요한 숲에 근사한 공명을 전하는 듯하다.

전나무 숲은 개별 나무가 흘리는 하얀 수지(樹脂)로 끈끈하면서도 진한 몸의 향을 뿜어낸다. 수지는 누렇게 변하며 굳는다. 소나무나 전나무, 잣나무는 모두 제 몸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려고 끈적이는 기름진 수액을 내놓는데, 이를 송진(松津)이라 한다.

송진을 만져보면 안다. 어떤 명의의 도움 없이 나무들은 스스로 자신을 치료하고 있음을. 흔들리고 아파하면서 끊임없이 자가 치유를 이어간다는 것을. 그 아픔과 고통의 결과로 우리는 단단한 수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겨우 얻은 송진이 아름다운 현의 노래를 만들어 낸다.

비올라를 연주한다. 처음 활을 잡았을 때, 소리가 나지 않아 당황했다. 말총 활이 매끄러워서 현을 긁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때 송진을 바르면, 끈적임이 활털에 마찰을 만들고, 현을 순간적으로 잡았다 놓는다. 비로소 현이 진동하며 맑은 소리를 울린다. 송진이 없으면 소리는 현에서 미끄러져 버린다.

아름다운 전나무 숲에서 풍기는 향을 맡으며, 굳은 송진이 선사하는 현의 울림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소나무의 송진은 단단하고 끈적임이 적다. 그래서 가볍고 밝은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이나 비올라에 적합하다. 전나무 송진은 소나무보다 끈적이고, 점성이 깊어서 굵은 현을 안는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는 깨어나는 계절을 곡진하게 울린다.

소나무 송진을 문질러 만든 소리는 겨울 하늘에 울리는 종소리처럼 맑다. 바람의 휘파람이 섞여, 청명하다. 전나무 숲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깊고 애상적이다. 두 소리가 만나면, 계곡을 타고 흐르는 바람과 햇살, 그늘까지 품은 숲길이 떠오른다.

송진은 나무의 목소리가 덩어리로 굳은 것이고, 현악기는 그 목소리를 다시 풀어내는 도구처럼 여겨진다. 마치 송진 속에 태초의 음이 숨어 있기라도 하듯이.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은 앙상한 겨울나무의 숲에서 연주했다. 낙엽이 지기 시작하고 겨울이 오면 용재의 비올라 연주를 듣는다. 숲의 향이 폐 속 깊이 스며든다. 현악기의 진동이 속살을 간질이고, 바람과 나무, 소리와 내 심장이 서로의 숨을 느끼며 한 박자로 맞닿는다. 그 순간, 외롭고 쓸쓸했던 날들이 살아 있음의 축복으로 가득 채워지고, 눈물은 숨을 따라 마음 구석구석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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