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by 이채이

여자는 불현듯 떠났다. 입맛이 없다며 시들하던 날이었다.

남겨진 남자는 긴 겨울을 울었다. 삭풍이 불어오는 날은 겨우 일으켜 우두커니 밖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서성일지도 모른다고, 희미한 희망을 매달고 공허하게 한숨지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장지문에 꽂히고 찢어진 틈마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입가엔 금이 간 미소로 씰룩거렸다. 젊음을 견딜 수 없는 남자는 밤의 욕정에 뒤틀려서 아팠다.

남자는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떠날 때처럼 홀연히 그녀가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면서.

산속의 낮은 짧았고, 해는 날 때부터 서쪽에 있었다.

남자는 땅을 팠다. 넓게 또 깊게 팠다.

장난스럽게 발을 들이미는 바람이 양철지붕을 치며 놀려댔다.

땀이 흐른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의 등은 젖었고 팔뚝은 불끈해졌다.

제 몸보다 큰 독을 굴려와서는 땅에 묻었다. 김장독을 묻는 날처럼 설레었다.

오랜만에 남자는 빨래를 했다.

불을 때서 언 물을 녹이고 여자의 속싸개와 치마를 빨았다.

걸레를 짜서 방을 닦았다. 홍시 두 개를 대접에 담고 여자의 경대를 정리했다. 화장수가 남지 않은 빈 병도, 여자가 바르던 루즈도 가지런하게 놓았다. 잠시 마실 나간 사람을 기다리듯이. 대숲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람의 말소리와 바람의 비명조차도 구분할 수 없는 날이었다. 잠잠하던 대나무가 질척대기 시작했고 깨부술 듯 요동쳤다. 제 몸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고 징으로 진동했다.

봄이 왔으나 남자는 들일을 나가지 않았다. 빈 밭에는 노란 꽃다지가 수북하게 물들었고, 잠에서 깬 꽃뱀이 흐드러진 자운영밭에서 놀다 기절했다. 자지러지도록 아름답고 따사로운 날이었다.

소원처럼 여자는 돌아왔다. 푸릇한 자두꽃이 함박웃음을 흔들었다.

큰 가방을 부려두고, 강보의 사내아이를 내려놓았다. 방문을 열어보니 남자의 글씨처럼 살림이 또박 했다. 수북한 먼지를 닦았다. 쌀독엔 쌀이 그득했고 썩어가는 감자에서 싹이 올라왔다. 고추장을 푸러 간 장독대에는 큰 독이 없었다. 된장과 간장을 퍼 담았다. 감나무 아래 김장독을 보자 살며시 웃음이 번졌다. 남자가 좋아하는 된장국도 끓이고, 김치를 물에 씻어 조물조물 들기름에 무쳐낼 참이었다. 김치 한 포기를 꺼내러 독 뚜껑을 열었다.

독 안에는 마흔을 겨우 넘긴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움푹 패었고, 입은 검게 헤벌어진 채 악취가 번졌다. 오랜 시간 갇혀있던 것들이 깨어난 듯 꿈틀거렸다. 머리 위에서 똬리를 튼 것들이 훌쩍 튀어 올랐다.

물이 올라 절정으로 치달은 봄 것들이 숨을 죽이고,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여자의 비명은 봄의 아지랑이 속으로 흩어졌다. 독 밖으로 풀려난 것들이 여자의 은밀한 부분을 파고들어 송곳니를 꽂아 넣고 꿈틀댔다. 비명은 애절했으나 바람은 공범처럼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 소리에 놀란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keyword
이전 25화단 한 번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