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도, 미완의 열매처럼

by 이채이


달개비의 파랑이 어찌나 곱던지.... 가을에는 오만 색을 다 주워 담아 빛의 파렛트를 완성할 수 있을 듯하다. 봄내 조르륵 초록을 가득 채우고, 여름을 수런스럽게 하던 온갖 화사의 빛들이 칸마다 그득해졌다. 꽃범의 꼬리는 살랑이는 이삭으로 박각시를 불러들여 분홍치마를 입혀주었다. 바람 부는 날 당신만이 찾을 수 있는 바람꽃은 햐양으로 흔들렸다. 이 곱고도 오묘한 색들을 흠뻑 빨아들여, 곳간에 차곡차곡 쟁이는 날에는 세상에 없는 부자가 되었다.

희미한 감꽃이 무르익은 단감이 될 때까지, 매달린 열매는 몇 번이나 발색을 거듭했던가. 섬세하게 화장을 고치는 새신부처럼 말이다. 참깨 줄기가 메마르면 꼬투리마다 툭툭 터지는 연갈색을 가을볕에 주워 모았다. 사립문을 열고 굴러오는 늙은 호박은, 들볕에 익은 어머니의 살처럼 따스하게 그을렸다. 오솔길마다 들어찬 도토리를 갈아 묵을 만들면, 그 안에 이토록 깊은 숲이 눌러앉을 수 있음은 기적 같다. 씁쓸한 상념을 다 빼버린 온전함만 남는 것이 놀라웠다.

부지런한 가을 다람쥐처럼 낱낱의 색을 모아둔다. 긴긴 겨울 세상이 어둑해서 잿빛투성이가 되면, 한 점 한 점 색을 찍어낸다. 뜨겁게 덥혀진 고구마를 반으로 가를 때는, 하얀 김이 바람꽃으로 온다. 창호지를 겹 바른 들창문 사이마다 아기단풍은 여전히 붉어서 고왔다. 항아리마다 가득한 홍시는 얼음과자처럼 사각거리며 여전히 꼿꼿했다.

삶 채우는 일상의 광경에서, 지난 계절의 빛이 빼곡하게 쏘여지는 순간이 좋았다. 문방구에서는 살 수 없는 바람 섞인 억새의 빛과 늦가을 햇살에 익은 짙은 가지색.

달달한 팥죽을 먹고 난 오후가 되면, 가지런히 모아둔 빛의 파렛트를 꺼내 본다. 올해는 치자의 빛이 조금 연하고 토란잎 위의 청개구리는 물방울로 얼룩졌다. 동지의 밤은 유독 까맣다. 별을 세던 나의 눈은 달빛에 스며들어 은은했다. 때 이른 첫눈이 내린 후에도, 손톱의 봉숭아 물이 여전히 남아 있어 안심이 되었다.

나의 세상에는 이런 것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 어떤 색상환에도 끼어들어 푸르락 검으락 할 수 있다.

거대한 공허를 만든 당신, 그 안에 빛나는 것들을 무한대로 주조해 내는 그 마음이 궁금해진다. 당신의 뒷모습에도 나를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음을 직감한다. 아무리 달려가도 왼발은 오른발을, 오른발은 왼발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시무룩해진다.

빛을 문지르며 세상에 내리는 무지개를 왜 희망의 빛이라고 하는지 나는 여전히 의문이다. 계절의 색을 쟁였듯 색을 따라온 마음을 모으려 한다. 익지 못한 채 터져버린 살구나, 제때를 못 채우고 떨어진 석류가 그저 헛되이 남은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처도, 미완의 열매처럼 여전히 아프지만, 의미 없는 것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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