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약 없다'라는 형용사가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기억이 촉감으로 발원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사선으로 내리던 차가운 빗줄기 때문일 테다. 우산을 버리고 앉은 채 젖어 있던 너를 보며, 싸늘해져 오던 내 몸의 기억 때문일 거다.
나는 이런 날을 '서정시가 절로 떠오르는 날씨'라며 미소 짓곤 했다. 하늘의 감옥에서 이제 막 풀려난 구름이, 환호를 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곤 했다. 이 하늘과 저 하늘의 끝에서 부싯돌 같은 희망을 맞부닥치면, 먹구름 속에서도 강렬한 스파크가 일었다. 풀려난 것들의 자유는 땅으로 쏟아져 내리는 혼돈의 물방울이 되었다.
투덜대며 우산의 빗물을 털어내는 사람들이 밀려온다. 언젠가, 은행나무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을 걸어오는, 너를 본 적이 있다. 멀리서도 난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사사로운 감정이 기억하는 조각들을 모으면, 그 안에 마술사의 비둘기처럼 늘 네가 날아오른다. 만약 시인이 시 속으로 걸어오는 장면을 묻는다면, 나는 이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길을 멈춘 너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천상에서 놓아준 자유의 실체를 느낀다. 하늘의 것들이 품은 열망은 강렬하고, 거듭된 빗방울은 간절하다. 간절함은 어디 건 가림없이 마구 지상에 꽂힌다. 그들의 세상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거센 빗발은 망각에 빠진 땅의 무지몽매한 것들을, 죽비로 내리쳐 깨우친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은행나무는 죽음의 찬란함을 깨닫고, 너의 앞에서 우수수 노랗게 졌다. 나의 시는 이런 것이다. 빗발이 거세져서 은행잎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의 너는 시 속을 걸어오는 것으로, 예비되었다.
너의 지향은 나의 꿈이 되지 못하는데, 너의 고뇌는 나의 시가 된다. 우리 앞에 절벽 같은 공허함이 끼어있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삶이 되지 못하고 꿈이 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시가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시는 늘 그런 부조리의 틈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이치에 어긋난 모순은 진실을 담고 있다. 기약 없음이 기약된 것도, 예고 없음이 예고된 것도 모두 역설이다. 사랑을 기다리는 나의 바람은 늘 우회의 길을 돌고 있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만남은 인연과 연애를 외면하고 있었다. 아픈 가을이었다.
너의 고뇌가 다른 여인의 것과 겹쳐 보였다. 나는 바다에 뛰어드는 젊은 여자의 마음을 생각했다. 온몸에 돌덩이를 묶고 심해로 가라앉는, 그래서 다시는 떠오르지 않기를 소망하는, 그 나약한 마음을 애달피 여긴다. 예고된 최후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 헛된 것이라면, 그 여자가 헛됨을 벗어던지기를 기다린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나는 인간의 울타리 밖에 서 있다. 잠수사들이 건져 올린 푸른 눈의 여자를 보았다. 산 사람의 우산을 받쳐 쓴 여자는, 조금 편안해 보였다. 짐작할 수도 없는 전쟁의 끝에, 고통을 안고 전사한 이의 결연함이 있었다. 볕 없는 낮에 여자는 눈이 부신 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퉁퉁 불어 얼굴은 희고, 마스카라를 얹은 눈화장이 유난히 파랬다.
여자를 떠올리다 나는,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가서, 너를 씌워준다. 우산을 버린 채 멍하던 너는, 나를 보고 은유하듯 웃는다. 그 뜻 모를 웃음을 보며 삶은 이제 부드럽게 무뎌지는 기분이 든다. 이제는 애 둘러 말하지 않아도 날에 베이지 않을 듯하다.
따끈한 자판기 커피를 나누며, 한풀 누그러진 냉기가 온기로 채워지는 순간을 느끼고 있었다. 너와 나 사이에 꽃이 피어나지 않더라도,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이 순간이 영영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좋았다. 우산 속에서 프림과 설탕의 향이 따스하게 코끝으로 다가왔다. 그 향기는 우산 속에 오래 머물렀다. 우리의 첫 키스는 더 오래 고여있었다. 이것이 나의 서정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