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새벽

by 이채이

비는 냄새를 바꾼다. 아스팔트뿐인 도시에서도 습기 가득한 날은 강한 흙의 냄새가 난다. 하늘에서 내리 닥칠 빗방울을 열렬히 맞이하는 심정으로, 땅의 것들도 일제히 코를 벌름대는 것 같다. 지상의 땅 냄새로 비를 마중한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만나는 일은 저들만의 시간 속에서 정해진 약속 같다. 인간의 눈을 피해 정한 약속 말이다.

이런 아침이면 새들은 배가 고프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생명의 기운은 쏟아지는 비 앞에서 무기력하다. 지붕이 없는 집에 사는 생명들은 머리를 파묻고 서로 껴안는다. 몸과 몸이 맞닿은 온기로 서로를 포옹하고 배고픈 부리를 닦아준다. 비 오는 새벽이면 새들은 소리 내지 않는다. 우산을 맞대고 걷는 사람들의 걸음새를 가끔 내려다본다.

물이 갈리는 소리에 깨는 날은 미소가 번진다. 차들은 저들의 무게로 아스팔트를 밀어내고 포도에 가득한 물방울 위를 떠서 지나간다. 이런 날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아침을 맞이하는 일은 행복하다. 달리는 차는 물방울을 뿜고 지나간다. 물총 놀이하는 아이라도 되는냥, 까르르 웃는 가로수를 상상하는 일은 지루하지 않다.


때죽나무 아래서 통통 비를 맞던 까마귀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땅속에서 지렁이가 꿈틀대고 올록볼록한 터널을 만들며 나온다. 제 길을 만들어 이동하는 것들의 숙명은, 놓여진 길을 볼 수 없는 맹인의 습속이며 슬픔이다. 지렁이는 예민한 촉수로 땅의 습도를 측정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기어이 나온다. 졸던 까마귀는 땅에 내려앉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앞 못 보는 지렁이를 가지고 논다. 한참을 발로 건드리고 부리로 쪼다가 물고 간다.

'비가 내리면,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늘 아래에 있음을 느낀다'는 여류 시인을 생각한다. 아침의 비는 누군가에게는 한 잔 홍차를 생각나게 할 테고, 몇 날을 보지 못한 딸을 그리워하게 할 테지. 공평하게 내리는 비를 보면서도 우리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기쁘다. 세상이 이런저런 다양함으로 삐죽해져서 조화롭지 않다 느낄 때, 하늘에서 내리는 물방울은 삐죽해진 온갖 것을 어루만지고 달래며 평화롭게 씻어준다.

창가를 떠날 수 없는 나의 아침은 비의 형틀에 묶인 죄수 같다. 이대로는 책을 읽을 수도 펜을 들 수도 없다. 빗물은 내리치고 빗소리에 붙잡힌 내가 형장에서 자유로워질 순간은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멀고 높은 곳에 뜻을 둔 것도 아닌 내게 신은 비루한 나의 언어로 글을 쓰게 하신다. 이런 날은 마음이 심란해서 글이 안 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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