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것들

by 이채이

글은 말라비틀어진 과거에 매몰된 나를 일으켜 세운다. 이내 촉촉하고 생생한 기억의 현장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은 눈 덮인 겨울 산이기도 하고, 바람 부는 갈대밭이나 질척이는 갯벌이기도 하다. 장소에 대한 기억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그 시절의 감정으로 옮아간다.

글을 쓰는 일은 단어를 가지고 노는 놀이 같고, 추억을 주무르는 방편 같기도 하다. 애절함을 소환하는 수단이고, 슬픔을 위장하는 포장지 같다. 잊힌 사랑을 꺼내는 동안은, 잠시 행복에 빠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모든 오래된 사랑은 슬픔이나 응어리를 넘어서는 기쁨의 감정을 남기는 법이니까.

사람은 자신이 알고 느끼는 한도 내에서 사물을 이해한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을 사물에 집어넣었다가, 미리 넣어 둔 것만을 끄집어낸다."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사랑도 그런 것이 아닐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내가 규정한 틀 속에서 작동한다. 새롭지만 낯설지 않다고 여기는 대상을 찾아, 비슷한 경험을 반복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서로의 음악을 공유한다. 세상의 관심은 온통 사랑 안에 나 있는 길을 통한다.

미움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문장 안에서 단어는 생김과 의미가 다를지라도, 줄기의 끝에는 사랑이라는 모진 것이 매달려 있다. 미움을 대할 때 감정은 지나치게 소모되고 허물어진다. 육신과 감정은 접착되어 있어서, 감정의 메마름은 육체의 생기를 빼앗는다. 살고자 할 때, 뒤틀린 감정의 늪에서 엉성한 몸을 겨우 곧추세운다. 기분은 몸을 상하게도 하고 펄펄 날게도 한다.

사랑과 미움 사이에 기다림이 있다. 사랑은 기다림을 낳고, 기다림은 권력의 비대칭을 드러낸다. 권력 간의 긴장은 미움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어떤 사랑도 기다림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이는 없다. 아픈 날개 죽지를 안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도, 숨죽여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다.

기다림의 권력은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자와 기다려야만 하는 자. 그 안에 주도권의 냄새가 난다. 나는 어느 쪽이었을까... 모든 사랑은 기다림이라는 이름으로 시험받는다.

사랑의 문장은 물기를 잃고 뻣뻣하게 메마른다. 사랑은 층층이 쌓아 올린 구조물 같다. 중요한 토막을 빼버림으로 와그르 쓰러지는 젠가 놀이 같다. 나는 뒤엉킨 토막나무에서 위태한 사랑을 예감한다.

흩어진 젠가 더미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젊은 날의 사랑을 떠올린다. 글을 쓰면 자꾸만 길을 잃는다. 아주 오래전, 마음 안에서 길을 잃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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