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필코’라는 말이 좋았다. 그 말은 기약하고 반드시 이루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다. 너와 내가 만나는 우주적 사건에서 기필코가 없다면 얼마나 맥 빠질 일인가.... 그냥 알았다. 우주는 인연을 우연처럼 가장한다는 것을.
내가 너를 스쳐 가든, 네가 나에게 흘러오든, 그 어떤 모퉁이를 돌아서든, 우리에겐 우리만의 필연이 있다. 우리의 만남은 거기서 발원한다.
비바람 치는 날엔 추녀 밑에서 종일 딴생각을 했다. 그 딴의 대부분은 당신이다.
예감은 가방 속에 구겨 넣은 영화표처럼 확정된 미래가 아니다. 속주머니에 얇게 다려 넣은, 기대의 마음이다. 몇 번을 확인하고 쓰다듬고, 조심스레 꺼내 보는 것이다. 순간의 마주침을 위해 온 하루를 기다림의 기슭에서 서 있었다.
뉘엿뉘엿한 그림자가 다가온다. 예감은 천천히, 나른하게 비쳐온다. 내 몸에 당신의 그림자가 겹치는 순간, 수줍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는 속마음을 다독인다. 펼쳐진 페이지 위로 낯선 바람이 책장을 흩뜨리듯, 마음도 그렇게 넘겨지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예감이 그러한데. 너를 만날 것 같은, 너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떨림....
네가 따끈한 붕어빵을 가슴에 품고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숨을 쌕쌕이면서도 김을 호호 불어 내게 건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나의 목마름을 먼저 알아 물병을 따주는 다정함이 없었더라면, 우산을 건네주고 웃으며 빗속을 달려가지 않았더라면... 나의 열병은 그저 몸살로 끝났을 것이다.
국방부의 주소 아래 꼭꼭 눌러 쓰인 너의 이름. 네가 적어 보낸 시는 오래오래 뜨거웠다.
"불을 놓았다. 방화였다."로 시작하는 너의 글은 온 계절을 메케하게 태우고 물들였다. 전문을 기억할 수 없는 시의 서사는, 순환의 시간을 인식하는 나에게는 마냥 붉게 기억되었다.
너는 편지의 말미에 '그냥'이라고 썼다. 그냥은 그냥이 아니고, '간절히'의 다른 말이라 읽혔다.
너의 마음은 종잡을 수 없었겠지만, 시는 심장이 가리키는 곳을 명확히 했다.
가을날 단풍은, 누군가 불을 놓은 듯 붉었다는 너를, 화상 탓에 아직도 아리다던 너를, 간절히 보고 싶다는 그 말로 이해했다. 너는 단 한 번도 사랑을 말하지 않고, 온통 '그냥'으로 기록했다. 나는 그냥이 싫어서, 답장 없이 은유했다. 한 번만이라도 그립다는 말을 보내왔더라면, 나의 어리석은 자존심은 허물어지고, 당장 너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국방부는 이후로도 영 답장을 받지 못했다. 나의 글은 우표를 품고 그저 수북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너의 그림자가 내 눈부심을 가려주던 날. 끌림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사랑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내 생애 속으로 흘러들어온 상당 부분은 늘 후회를 데리고 온다. 마치 문장의 끝에 마침표를 찍듯이. 이제는 사라져서 흔적만 남은 것들이 소중해진다.
방화의 불길이 번져온다. 북쪽에서 시작된 불은 산맥의 고래를 타고 남쪽으로 퍼지고 있다. 오래전 너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불길이 아직 내 안을 달군다. 아마 우주는, 우리의 인연을 다 식히지 못한 모양이다. 다시, 마음이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