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가끔 가장 비천한 모습을 하고 땅에 놀러 온다. 어쩌다 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
밤이었다. 마당가에는 일제히 피어나려는 꽃들이 꿈틀대며 우그러진 제꽃잎을 펴고 있었다. 마가렛은 데이지를 빼다 박듯 닮았지만, 키가 작고 꽃이 빡빡한 것이 낮에 보면 눈부시다. 반면 샤스타는 이른 봄 가로수 아래나 담장 아래서 큰 키를 못 이기듯 바람의 결을 따라 한들거린다. 붓질 몇 번에 가냘프고 여린 선은 한 장의 수채화가 된다.
밤의 공기가 투명해진다. 봄의 정원을 거닐고 있으면 '나는 물과 빵만 있으면 신들도 부럽지 않다'라고 말한 그리스인의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정원에서 산책을 하며 삶을 긍정했을 사람들과, 모여 앉아 커다란 빵을 뜯어먹으며 담소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자연이 주는 만족감은 정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곳을 채우는 소소한 꽃들과 완곡한 변화에 있고, 이를 즐길 줄 아는 소박한 마음에 있다.
달밤에 더 잘 어울리는 하얀 데이지가 지기 전에, 의자를 끌어 놓고 밤을 즐긴다. 달빛은 먼데 가로등과 어우러져서 빛의 경계를 부드럽게 녹인다. 외계의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스함이, 기억의 자락을 희미하게 만든다. 어둠 속에 온기가 퍼져나간다. 파도처럼 완만한 물결선을 만들어 기억을 가장자리까지 밀어낸다. 망각은 또 다른 기억에 부딪혀 다시 현실로 밀려온다. 봄밤에는 몇 날 며칠을 이리 들뜬 채로, 정신이 아득한 여자처럼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미풍에 고개를 젖혔다. 가만 옆을 보니, 낭창대는 꽃송이 위에 달빛을 쬐고 있는 지네가 있었다. 새끼손가락만 한 지네의 등장에 고즈넉하던 나의 밤은 깨어질 뻔했다. 지네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지네는 바람에 꽃그네를 타듯 살랑거리며, 놀라지 않았다. 차분하게 어둠과 밝음의 애매한 경계를 즐기고 있었다.
순간 두려움마저 잊은 나는 두 손의 깍지를 끼며 "어머 낭만적이다~!"라고 토해냈다. 인간을 마주치면 도망치기 바쁜 동물일진대, 그 지네는 도망은커녕 여유롭게 바람그네를 타고 있었다. 지네의 그 여유가 좋아, 나도 시선의 끝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노란빛을 내는 달이 있었다.
빛을 올려다보는 미물의 소망이 간절해 보여서일까. 신화를 만들어 내고 싶은 인간의 욕심 때문일까. 신은 가끔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는 어둠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곳에 거하는 상상은 나름의 원시적 정감이 있다.
지네는 꽃잠을 자는 것일까, 향기에 취한 것일까. 이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남편 손을 끌어 속삭였다. 달빛에 노곤해진 지네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명상을 하는 듯하다고.
당신이 물었다. 너의 계절에도 신이 내려오느냐고? 너의 힘듦 앞에 신이 거하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샤스타 꽃잎에 출렁거리며 앉아 있는 지네를 보면 믿고 싶어진다. '신은 인간들 몰래 가끔 지상에 내려와 거하기는 하는가 보다'라고. 경외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낮고 흉측한 모습으로 온다고. 그런 연유로 신은 세상사 고된 우리의 일상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