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언젠가 붉었다

by 이채이

붉은 것은 모두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붉을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두고 혼자 깊어졌다. 달달하게 들어찬 석류의 알맹이를 두고, 산속에 홀로 물들어가는 옻나무를 두고 그 색의 무게를 외면해보려 했다.


꽃이 진 자리마다 발그레하게 배가 부풀어 올랐다. 부풀어 터진 석류를 잡고, 두 손으로 벌려보면 홍옥 같은 보석이 꽉 들어차 있다. 해 질 녘의 하늘을 응축해 놓은 노을이 가득하다. 석류는 석양을 향해 눈길을 보내던 사람들의 그리움과 사랑으로 붉었다.


옻나무는 오래 외면당했다. 옻나무가 제 곁을 주지 않는 것이라 수군댔지만, 사람들은 서로가 밀어낸 거리만큼 냉담했던 마음을 잊었다. 허락받지 못한 사랑처럼 불우해지는 순간마다, 다가가지 못했던 마음의 기억이 쓸려왔다.


이번 생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며, 기어이 붉어지기로 마음먹은 옻나무를 올려다보면 안다. 얼만큼의 마음을 녹여내면 핏빛처럼 붉어지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옻은 단 한 번의 손길도 없이, 밀쳐지고 지워진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자지러졌다. 그 웃음을 듣고 제 몸을 긁어 피를 낸다. 냉정했던 마음이 수목의 혈관을 찾아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나는 붉은 것의 마음을 관찰하고 있다. 붉은 것은 사랑이면서도 외로움이라는 것을. 홀로 사는 노모의 얼굴에 새겨진 보고픔도 외로움에 지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로움이 더 외롭지 않도록 마당 가득 붉은 꽃을 채워둔다는 것을 이해했다.


붉어진 눈시울은 헤어질 준비를 마친 생이, 세상에 건네는 따뜻한 작별 인사라는 것을 안다. 사그라드는 것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 있다. 아쉬운 것은 버리고 사랑할 것만 남겨서 붙들고 뿜어내면 그것이 단풍으로 물드는 것이다. 세상을 뒤덮었던 초록은 붉음이 지닌 단호함 앞에 처음으로 뒷걸음질 친다.


상처는 피를 흘린다. 피의 근원은 심장이어서, 피를 흘릴 적마다 나는 아팠다. 나의 아픔이 인간 세상에 수긍될 만큼 괴로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나를 연민하고 열망한 만큼 고독해졌다는 것은, 상처 난 심장을 보면 안다.


투각처럼 도려내진 장기가 내는 헛기침을 보면 안다. 벌컥거리는 심장이 붉지 않다면, 내 마음은 무엇으로 달아오르게 할 것인가. 나의 시가 유독 검어지는 이유는, 떨어진 핏자국이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흘러버린 것들은 돌려 막기로 메꿀 수 없다. 나의 존재는 아픔으로 모질게 증명되고 있다.


단풍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은, 감춰둔 그리움 하나씩 기억하러 온다고 믿는다. 붉은 것들의 함성 앞에서, 예정된 존재의 부재 앞에서, 한 번 더 뜨겁고 싶은 마음은 공허한 고백을 남발했다. 그럴 때면 마스카라가 진한 여인의 속눈썹이 자주 젖는다.


사람이 가을 숲에 가는 이유는 마음을 숨겨둘 그늘이 붉기 때문이다. 그늘이 어둡지 않고 환해진다면야, 그곳이야말로 사랑을 업으로 하는 인생의 도피처가 아니겠는가. 그 붉음 아래 서서,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오로지 그 이유 하나로 계절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랑했다는 것은, 언젠가 당신도 붉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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