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만 시의 온기

by 이채이

시는 시의 행간마다 부끄러움을 감춰 둘 말들을 데리고 산다. 페이지마다 자잘한 그리움이 몇 개 단어 속에 숨어있다. 사랑이니 이별 같은 거대한 말이 아니라, 나른한 오후마다 입술을 대는 머그컵이나, 오래 간직한 펜 같은 것. 자꾸만 펼쳐 읽게 되는 낡은 노트처럼 일상적인 것에 있다.


보물 찾기의 보물은 예상을 깨는 곳에 숨겨 두듯이, 시인도 제 보물을 그리 숨겨둔다. 시를 읽을 때 가끔 전율이 번개처럼 꽂힌다. 이는 상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한 내밀한 언어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한 번의 눈 맞춤으로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처럼 그렇게 떨림은 막강하다.


시인의 집에 찾아갔다. 집을 비운 시인의 마당가에 심긴 은방울꽃을 가만 건드려보았다. 은빛 종소리가 대롱대롱 흔들리며 한낮의 무료함을 청아하게 울려댔다. 글을 잠시 멈춘 시인은, 은방울을 자주 울리지 않았을까. 그 소리가 하도 맑아서 지저귐을 멈춘 새들에게 미안했다.


시인의 쓰레기통에는 간밤의 각혈이 구겨진 채 쌓여 있었다. 버리지 못한 말들은 담론을 지배하는 거대한 것이 아니라, 하루를 셈하는 밥 같은 것임을 안다. 나의 말은 시인의 간장이 되어, 그의 말맛을 더 깊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말은 아직 덜 익었다. 짭조름한 소금기만 감돌뿐, 단맛이 피어나는 장에 이르지 못했음을 안다.


그럼에도 시의 밍밍함에 내가 모은 사유의 가루를 살짝 뿌린다. 그렇게 글이 제맛을 찾아가고, 풍성한 맛이 난다면 - 그것만으로도 족하겠다. 시인의 밥과 나의 차가 차려져 나온다. 나는 밥 곁에 차 한 잔으로 놓일 수 있어 따스해졌다. 장난스레 물구나무선 시에게 다가가, 콧노래로 말을 걸고 싶다.


시인은 아직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았기에 어질러진 방안조차 조화로워 보인다. 나의 미소는 뒤섞임을 긍정한다. 책상의 연필은 닳아서 뭉툭해졌고, 지우개는 밤새도록 과로했다. 제 몸을 추스르지 못한 지우개는 아무 데나 누워서 잔다. 시인은 아직 집에 당도하지 않았으나, 그의 온기가 쓰다만 시를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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