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정

by 이채이

당신의 다정은 여전히 시가 된다.

습자지 같은 껍질을 두어 겹 벗기면, 처녀의 속살처럼 하얀 양파의 얼굴이 나온다.

뽀얀 양파를 썰다 눈물이 쏘옥 빠지고 나면, 양파 수프 첫 준비가 끝난다.

달고나 같은 색이 되도록 달달하게 볶아야 한다. 중간 불에서 자주 뒤적거리며 볶아야 고루 갈변하는 수프 베이스가 된다.


희고 맵쌉하던 속살이 열기에 그을린 달고나가 되기까지, 수행자처럼 느긋하게 인내로 저어야 한다. 지루한 반복의 시간을 건너고 따끈한 양파 수프가 완성 접시에 담긴다.

갓 구운 바게트를 바삭하게 곁들여서 뜨겁게 먹는다. 순간 배어 나오는 이마의 땀방울처럼, 고된 결 따라 송긍송글 맺힌다.


밥을 사기보다는, 마음의 사람을 집으로 들여 따끈한 수프를 먹이고 싶다.

성의와 감사가 식당의 영수증으로 증명되는 시절에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다.


백송이 장미 꽃다발을 선물하기보다는, 백일 동안 잘 가꾸어야 꽃을 피우는 것을 건네고 싶다.

가꾸고 기르는 수고로움도 없는 완성형의 꽃다발 보다, 오래 지켜보며 삶을 말없이 가르치는 것들이 나를 따스하게 한다.


화려한 절정의 순간만이 아니라 백일을 기르고 보살피는 수고로움이 있는 것.

꽃들이 애써 피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소녀의 젖몽오리 같은 여린 것이 어떻게 벙그런 꽃으로 터지는지.

그리고 한 잎 한 잎 하늘이 열리는 순간의 경이를 경험하길 원한다.

꽃이 져가는 순간도 애틋하기를.

초라하게 시든 후에 남기는 작은 씨앗의 의미를 생각해 준다면. 이것이 나의 다정이다.


식물을 키워 본 사람은 늘 투덜댄다. 물을 줘도 자꾸만 죽는다며, 애정만큼 듬뿍 물을 주고는 결국 시들게 만든다. 그래서 죽어가는 것들에게 미안해서, 이제는 아예 키우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책상 한 켠의 식물은 물배가 터져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함께 일하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며, 푸념처럼 한숨을 내쉰다. 그 한숨 속에 서린 시름에 마음이 쓰인다. 포트에 담긴 보잘것없는 식물도 햇빛과 바람을 견디고, 물의 양을 조절하는 제 나름의 법속이 있다. 사람은, 말해 무엇할 것인가.


식당에서 받는 비싼 음식보다, "밥 먹으러 건너오라"는 말에 힘이 솟고, 사랑을 느낀다. 전화 너머에서 시금치나물을 무치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난다. 단정하게 다독여 썰고 있는 김장 김치의 살큼한 맛이 전해진다. 미역국을 한 솥 가득 끓이는 우둘투둘한 손가락이 고맙다. 양어머니의 다정은 나의 다정과 같아서, 자주 웃음이 번진다.


종일 배추벌레를 잡고, 잡초에 엉겨 붙은 고운 흙을 털어 밭으로 되돌려 보내는 마음.

그녀의 성실함이 내 시의 곁가지를 내준다.

올가을, 가지마다 몽올몽올 다북한 꽃송이가 매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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