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해진 서로의 계절

by 이채이

어제 같은 오늘을 보냈다. 당신의 책방에 들러 책 표지를 쓰다듬었고, 근처 국숫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책방에는 책만 있어 책방이라고, 사람 없이 가을이 가버린다고. 당신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가을은 더 이상 독서(讀書)의 계절이 아니고, 독실(讀失)의 계절이라고.


그런 시답잖은 소리를 나누며 우리는 밤의 낙엽길을 걸었다. 걷는 길이 물들어 문득 아름답다 느끼는 순간이 짧았다. 돌풍이 거리의 나무를 거세게 치자, 잎들은 계통 없이 나부끼며 하강했다. 짧은 가을색을 붙잡듯 아쉬워하며, 쉬엄쉬엄 늘려 걸었다.


어제의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고, 내일의 만남에 기대가 남아있다면, 그건 단절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만남이 있다.


아침 출근길에 꼭 들르게 되는 커피하우스의 향기를 만나고, 허락 없이도 새벽부터 내려오는 태양 빛이 어깨에 닿으면, 행복한 기분이 든다. 야근 길을 지켜봐 주던 별빛 같은 가로등이 종일 나를 기다렸던 듯 반긴다. 계절은 어떤가. 꽃비를 내리게 하던 고슬고슬한 봄밤의 설렘은, 우박이 내던진 여름의 장난기조차 참아낼 만큼 깊다.

잎이 나고 지는 별리의 이치처럼, 헤어짐의 순간 다시 만남을 기약하게 하는 마음이 바로 '기대'다.


우리의 만남이 항상 온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대되는 만남이란 만남 자체가 아니라 그사이에 오가는 말과 제스처의 온기일 것이다. 성급하게 결론짓고 싶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작된 인연이 지속되는 건 결국 당신의 말과 행동이 풍기는 태도에 달려있다. 모든 것은 다듬어질 수 있다. 소중한 것일수록 더 다듬어 오래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간직하고 싶은 관계는 스스로 편안함과 진실함을 골고루 데워, 우리 앞에 따뜻한 얼굴로 걸어온다.

에고를 앞세운 말은 불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자랑이 앞서는 말은 진심을 잃은 채 허둥거린다. 겸손이 결여된 말이 혼자만 마이크를 쥐고 버틸 때, 그 자리는 더는 즐겁지 않다. 우리는 편안한 말이 조용히 손 내밀고 진실이 천천히 눈을 맞추는 순간을 원한다.


오래가는 만남이란 만남의 주기가 아니라 그 깊이를 염두에 둔 말이다. '오래'라는 말 몸속에는 '평화롭다'로 대변되는 수많은 어휘와 감정이 깃들어 있다.


나의 오랜 그리움이 달빛처럼 스며드는 날, 우리는 더욱 그윽해진 서로의 계절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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