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암호문 같은

by 이채이

겨울은 그리움의 흔적을 드러낸다.

꽃을 키워보면 안다. 햇빛을 쏘인 잎이 그 빛을 섞어 제 몸으로 보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물학에서 배운 광합성이라는 엄청난 명명(命名)이 그대의 베란다에서 그 작은 토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한 줄기 꽃대에 가득 꽃망울이 매달리는 것은,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니다. 물이 빛을 만나고, 바람을 머물게 한 시간이 씨앗의 인연이었음을 안다.

한 알의 씨앗에서 풋풋한 꽃을 본다는 것은, 조화로운 것들이 겹쳐진 순간의 총합이다. 나의 애씀과는 별개로, 싹이 오르고 꽃물이 번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생명은 신비롭다.


잎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내치지 않고, 몸에 가두어 뿌리를 덥힌다. 그렇게 따뜻해진 피를 돌게 하는 뿌리의 성실함은 충만한 생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나도 때론 천상의 빛에서 기쁨의 에너지를 채운다. 먼 우주에서 훌쩍 뛰어내린 무(無)를 나의 몸으로 받으면, 어둠을 통과한 뜨거운 것이 내 속에서 발화한다. 그것은 그대가 내 맘에 안착한 순간과 같다. 그대는 나에게 그리움을 투하하였다.


시인들이 그리움의 근원을 파헤치고자 했다. 그리움이 그대에게서 생겨났음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황량한 들판에 일어난 바람이 회오리를 만들어 거대한 도시를 삼키듯, 척박한 나를 달군 그대는, 무진한 그리움이 되어 나를 잠식한다. 그리움은 그대에게서 왔지만, 나의 것이다. 나의 그리움은 그 누구의 것으로도 치환될 수 없다.


겨울이면, 그리움은 눈을 타고 내려와 무상함을 한 겹 더 덧입힌다.

그리움은 어쩌다 넘겨보는 오래된 일기장 속에 머물고, 평생 잊고 지낸 낡은 사진첩을 조심스레 들춘다. 다락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통기타와 대중가요 속에 있다. 멀리 이국으로 가버린 친구를 따라갔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퉁퉁 불어있던 손가락을 따라 떠나기도 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리움은 때로 잊히기도 하고, 고스란히 증발하기도 한다는 것을.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그리워할 것이 없을 때, 신은 마침내 나를 놓아줄 것이다.


그리움의 본질은 긁고 새기는 것이라 읽은 적이 있다. 그리는 행위에 포착된 모든 것들이 그리움의 먼 혈통처럼 이어져 있다고 나는 이해했다.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처럼, 마음을 거칠게 새기던 그 시절부터 그리움은 사람을 따라다녔으리라. 나는 그 이론에 동의하였다. 그러고 나니 고향을 떠난 철새처럼 문득 외로워졌다.


새들이 내려앉았다. 몽골고원을 지나온 북방의 새들이 눈밭에 발자국을 새기고 있다. 어지러이 흩어진 암호문 같은 난삽함이, 먼 곳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집단 무의식이라 여겼다. 새들이 남긴 발도장은 제 몸에서 떨어진 그리움의 부스러기 같은 것이었다. 울대(鳴管)가 허술한 새들은 온몸을 떨며 운다.


꽃들이 씨앗 속에 그리움의 여지를 남기듯, 새들은 눈밭에 그리움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눈이 녹듯 그리움은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본래 그러했다는 듯이.

그리움이 다하면, 나 또한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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