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조금은 평등하게

by 이채이

날은 밝고 어둠은 서둘러 물러난다. 밤새 눈이 내리는 풍경을 그려보았고, 귀를 기울였다. 첫눈이 쌓여 세상의 소음을 덮는 상상을 했다. 눈의 알갱이들이 흡음재처럼 깔리면서, 세상의 잡다한 소리를 다 빨아들이기를 바랐다.


서울엔 불시에 첫눈이 내렸고, 사람들은 불현듯 창가에 서서 밖을 응시했다고 한다. 거리를 걷던 아이들은 손을 뻗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것을 받아먹었다. 황막한 굶주림의 길에서, 하늘의 만나를 받아먹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쁨으로 먹던 만나가 투덜거림으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듯, 순간의 설렘은 퇴근길을 걱정하는 어른들과 빙판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시름으로 번졌다.


어떤 이는 벚꽃처럼 날리는 눈 때문에, 잊힌 옛사랑을 떠올렸다고도 했다. 하늘의 것이 내려와 더러운 것을 지워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왜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왜 바람피우던 남편의 내연녀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고, 어째서 정작 지워버리고 싶은 대상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아름다움과 설렘으로 응축되는 첫눈 앞에서 본인의 가장 추악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고.


눈을 뭉쳐 둥글게 굴려서 눈사람을 만들었다는 아이도 있었다. 눈덩이가 커질 때, 아이가 키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찰칵, 카메라 소리와 함께 굳어버린 아이 모습은, 훗날 어제를 기억하게 할 수 있을까? 사랑의 갈림길에 선 엄마가 사진을 찍어주던 날, 어른의 마음을 들끓게 하던 고뇌와 격정을 아이는 상상도 할 수 없겠지. 지켜주고 싶었던 첫눈의 기억까지도.


주차된 차들이 떠난 자리에는 아스팔트가 드러나 검었다. 아스팔트는 차지했던 넓이와 이 땅에 머문 기간을 암시해 주었다. 머무름의 시간만큼, 노상에 주차된 차량들은 두툼한 겨울 이불을 당겨 덮었다. 우리가 누군가의 곁에 머문다는 것은 평온하고 가슴 벅찬 순간뿐이 아닌, 눈비를 맞는 시린 순간도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 세월만큼 눈이 쌓이고 흙먼지가 뒤덮고 가을 잎이 내려앉는 것이다.


귤을 파는 아주머니의 손이 곱았다. 연탄난로에 몸을 돌려 쬐며 연신 코를 훌쩍였다. 첫눈을 올려다보며 오랜만에 주름지게 웃었다. 지나가던 남자가 귤 한 봉지를 사서 쪼그려 앉은 노숙인에게 건넸다. 세상이 귤빛으로 밝아졌다. 카페마다 귤을 매단 전구가 따스하게 불을 밝혔다.


눈이 내렸기에 여기저기서 마음들이 떠다녔다. 누군가에게는 사랑과 설렘으로 또 증오와 미움으로 펄펄 날렸다. 첫눈 소식을 들은 나는 가벼운 통증이 시작되었다. 잇몸의 가장 약한 부위로 파고든 아픔이 거리를 향해 마냥 서 있었다.


낙하하는 눈을 잡아 연인의 손 위에 올려주는 남자, 뜨거운 커피를 들고 혀를 내밀어 한 송이 겨울을 맛보는 여자. 당신의 주소를 정확히 찾아간 편지처럼 인간의 땅을 어긋남 없이 찾아온 신의 입김은, 그저 덮어버릴 뿐이었다.

첫눈 아래 놓인 도시는 잠시나마 하얗게, 그리고 조금은 평등해 보였다.

* 사진은 '송정희'님의 것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흩어진 암호문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