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국화

by 이채이

남쪽 바닷가 마을, 작은 텃밭에 있습니다. 겨울이 무색하도록 푸릇한 채소가 가득했습니다. 눈을 감고 아침의 정원을 거닐어 봅니다. 텃밭으로 가려면 장미의 아치를 지나야 하고 앙상해진 으아리 넝쿨도 지나쳐야 합니다. 국수 가락만큼 가느다란 으아리 줄기가 지낼 겨울을 생각하면 애처롭습니다. 저리 가녀린 줄기에서 주먹만 한 꽃들을 피워내는 일을 상상하면 생명은 신의 영역이라 여겨집니다.


국화 옆을 지날 때면 손가락을 뻗어 이슬을 털어주고 코를 가져다 향을 맡습니다. 고양이도 슬며시 가지를 문지르고 꽃을 건드립니다. 제 몸에 향을 바르기라도 하려는 듯 꽃들 사이를 쏘다닙니다. 모르긴 몰라도 휘어진 국화와 고양이는 봄부터 서로 알고 지낸 게 분명합니다. 꽃그늘에 앉은 자태가 저리도 포근할 수 있을까요. 고양이가 국화에게 표현하는 그 친애의 마음이 사람과 관계 짓는 것들 사이에서도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덮어둔 비닐을 살푼 걷어내고, 텃밭에서 브로콜리 한알과 붉은 갓 한 줌 그리고 비트 두어 잎을 따 옵니다. 이런 날은 약한 불에 브로콜리를 오래 볶아 더 달큰하게 합니다. 삶은 보리쌀과 토마토와 버터헤드를 더해서 지중해식 샐러드를 만들어 먹습니다. 제각각이던 재료가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식초로 다독여졌습니다.


이 아름다운 색의 재료들이 모여 나의 몸에 들어올 때, 나는 부자가 된 것 같습니다. 비트가 뱉어낸 붉은색과 브로콜리가 밀어낸 초록이며 안과 밖이 빨개져 새어 나왔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토마토까지. 나는 음식을 요리해 색을 먹고 은혜를 마십니다. 매일의 식사는 신이 내린 빛깔을 골라서 먹는 일입니다.


블루베리의 검푸른 선명함이 좋고 제철 만난 감귤의 새콤함도 좋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누그러뜨리고 커다란 볼에서 샐러드로 버무려질 때, 행복감이 조용히 차오릅니다. 여러 재료를 뒤섞을 때 나는 풍요로운 삶에 감사하게 됩니다. 한 끼 식사가 얼마나 건강한지가 하루치의 기쁨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검은콩으로 만든 두유를 곁들여서 따끈하게 먹을 때 창문 밖에 한두 송이 눈이 스쳤습니다.


나는 자주 셈을 해봅니다. 내가 오늘 먹은 음식의 컬러가 몇 종류였을까 하고요. 그때 비로소 야채칸의 당근이 떠오르고, 붉은 고구마도 기억납니다. 선물 받은 단단한 단호박도 한 덩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내일은 이들을 살짝 쪄서 으깨고 버무릴 것 같습니다. 태양 빛을 받아 제 몸에 저장하는 온갖 채소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 몸의 가장 강한 것으로 겉을 단단히 여며 빛을 견뎌내는 법과 어찌하면 온통 붉어지고 초록초록할 수 있는지를. 오십 년을 산 나도 나를 보호해 줄 무엇을 알지 못하는데, 씨앗의 비밀을 단박에 알아챈 그 지혜를 어찌하면 나도 알 수 있을는지.


겨울에도 푸릇한 텃밭의 채소로 감사의 아침을 먹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은 브로콜리처럼 푸를 것이고, 당신을 만날 땐 겉과 속이 같은 토마토처럼 붉을 것입니다. 나는 종일 초록하고 붉고 노랗기를 반복합니다. 오늘 당신 앞에서는 조금 달콤해지고 싶습니다. 창밖에 눈이 날리니까요.

*사진은 '흑임자투게더'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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