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by 이채이

티비에선 풍선을 들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아이들이 함박웃음을 짓고, 백화점의 완구 코너에서 선물을 골라주는 어른의 모습, 선물을 받은 아이들의 인터뷰가 줄방영 되고 있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로 시작되는 노래가 연신 들려오는....

어린이날이었다.


"어머니는 쌀 한 되를 퍼서 자루에 담고, 마을의 작은 점방으로 가셨어.

돌아올 때는 과자 두어 봉지가 들려 있었지.

어린이날 받은 선물이었어."


당신이 받은 선물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게 뭐였어? 그 질문이 우문(愚問)이라는 걸 알면서도 묻고 싶었다. 이에 남편이 현답(賢答) 한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늘 쓸모를 가장한 마음이니까.


그날 남편이 받은 건 무엇이었을까.

과자를 먹던 아이가 반백이 되도록 그날을 기억하게 될 줄 알았을까.

우리의 기억은 때론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남편의 대답은 오래 닫아두었던 나의 기억의 문을 급히 두드렸다.

나는 만년필을 좋아했다.

쓰다 보면 쉬이 닳아버리는 볼펜이나 연필이 아니라, 만년이나 쓸 수 있다는 이름에 얽힌 신화적 발상이 좋았다. 펜촉을 사서 볼펜 뒤에 끼워 쓰던 시절, 잉크를 찍어가며 글을 쓰던 시절의 만년필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이의 고백만큼 가치가 있었다.


파커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한 푼 두 푼을 소중히 모아, 나는 나에게 선물했다.

고등학생 시절의 가난한 내가 시인을 꿈꾸는 나에게 선물한 것임을 알기에, 마음이 잉크처럼 진하고 먹먹했다.

만년필에 잉크를 넣을 때, 빈 잉크심 속으로 내 사유의 언어가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글씨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유리알 같은 글을 굴려냈다.


만년필은 내게 시의 언어를 만 년 동안 공급해 줄 것만 같았다. 내가 죽더라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만년의 시간을 견뎌줄 것만 같았다.

푸른색 잉크를 빨아들이면 나의 글은 바다를 그리워하는 문장으로 직조되었다. 붉은색 잉크는 의기소침해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용기의 글을 쓰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더 이상 만년필을 쓰지 않았다.

만년필에서 흘러나오는 엷은 선에 나의 언어를 얹어보면, 무겁고도 가치 없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시를 쓰지 않았다. 글쓰기를 멈추었다.

그 만년필은, 쓰이지 않음으로써 가장 오래 남은 무용이 되었다.


무용한 것의 유용은 어쩌면 기억의 밀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밀물에 쓸려온 유리병 편지처럼, 문득 도착하는 기억 말이다.

남편이 받은 최고의 선물이 쌀 한 됫박으로 바꾼 어머니의 과자였던 까닭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 이유의 깊이를 재기 위해 아이의 마음속으로 가라앉아본다.

시인의 꿈을 선물했던 여고 시절의 나에게로, 천천히 잠수한다.


결국 기억하는 것은 무엇이 아니라 무엇의 뒷이야기다.

오래 지나도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은, 뒷이야기 물들이는 그 마음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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