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채이

첫 것은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린다.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눈에 닿을 때 비로소 존재가 된다.


눈이 온다. 차가운 북풍에 실려서 온다.

기억의 문턱이 낮은 내게 한없이 관대하게 밀려온다.

당신의 첫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지막 것을 떠올리지 못하는 건망증 탓에

나는 눈의 약속을 잊은 지 오래다.


미동도 없이 서서 하늘의 첫 것이 하강하는 걸 본다.

먼 하늘부터 바람에 떠밀려 땅에 닿는 순간은,

첫걸음을 떼는 인어공주의 여린 발바닥처럼 낯설다.

조급하게 온 탓에 맨발로 딛는다.


눈은 소리를 잠재우며 오는데, 오늘은 왠지 귀밑머리를 긁적이며 온다.

튕겨진 먼지처럼 가볍게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런 날은 시집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시집 속에는 물의 흔적이 자국을 남겼다.

눈이 녹아 흘러내린 순간과 장맛비에 눅눅해진 시간이

그대로 구겨져 남아 있다.


추운 날, 꽃의 시는 유난히 간지럽다.

꽃잎은 시처럼 차분하게 말라 있다.

이것은 하늘에서 온 편지 같아, 시집과 하늘을 번갈아 올려다본다.


첫 것은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린다.

세상에 홀로 완성되는 것은 없다.

첫눈은 그렇게

당신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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